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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마스 연성입니다…. 어쩌다 보니 늦었습니다.
1.
12월 24일 저녁 6시, 폴 베를렌은 인쇄소 문을 잠그며 한숨을 내쉬었다. 손가락 끝에 묻은 잉크 자국이 검게 번져 있었다. 하루 종일 교정지를 들여다보느라 눈이 시큰거리고 뻐근했다. 크리스마스이브에도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서러웠지만, 그보다는 이제 따뜻한 두 사람의 집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그를 묘하게 들뜨게 만들었다.
파리의 거리는 이미 어둠에 잠겨 있었다. 가스등 불빛 아래로 간간한 눈발이 흩날린다. 삼삼오오 모여 다니는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선물 꾸러미를 안고 집으로 서둘러 돌아간다. 창문마다 알록달록한 촛불이 켜지고, 문이 열린 교회에서는 합창단의 캐럴이 들려왔다. 폴은 낡은 외투 깃을 세우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걷다가 거리 모퉁이에 있는 오래된 문구점 앞에서 그는 멈춰 섰다. 이미 문을 닫을 준비를 하던 주인장 노인이 폴을 보더니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문을 열어주었다.
"베를렌 선생님, 또 오셨군요."
노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연민이 묻어 있었다. 폴은 그 울림이 주는 거슬림을 애써 무시하며 진열장으로 다가갔다.
"최고급 양피지 한 묶음이랑…. 그리고 저 잉크, 검은색 말고, 저기 코발트블루. 그걸로 주시죠."
"이번에도 같은 걸로?"
"네, 같은 걸로요."
노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문한 물건을 꺼냈고, 폴은 지갑을 꺼내며 작게 말했다. 지갑은 거의 비어 있었지만, 폴은 이 선물을 위해 한 달 내내 돈을 모아왔다. 주인장은 그 선물을 붉은 리본으로 정성스럽게 포장해 주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선생님."
"...메리 크리스마스."
폴은 포장된 선물을 가슴에 꼭 안고 밖으로 나왔다. 아까보다 눈발이 더 거세졌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다. 일 년 중 단 하루, 모든 것이 허락되는 날이다.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는 날이다. 집까지 가는 길에 그는 시장에도 들렀다. 빵과 치즈, 저렴한 와인 한 병, 그리고 닭고기 한 마리. 랭보가 좋아하던 요리를 할 작정이었다. 아니, 좋아했던 것들. 이내 폴은 고개를 세게 저었다. 아니, 좋아하는 것들이 맞다.
2.
폴의 집은 언덕 아래 좁은 골목에 있는 낡은 건물 4층이었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그의 심장은 이상한 박자로 거세게 뛰었다. 마치 처음 연인을 만나러 가는 소년처럼 얼굴이 상기되는 것이 느껴졌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냉기가 그를 맞았다. 방은 어둡고 황량했다. 벽지는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고, 천장에는 습기로 인한 얼룩이 번져 있었다. 하지만 폴의 눈에는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는 짐을 내려놓고 재빨리 벽난로에 불을 지폈다.
"잠깐만 기다려, 금방 따뜻해질 거야."
폴은 속삭이듯 말을 하며 움직였다. 서랍에서 양초를 꺼내 여기저기에 켜 놓았다. 촛불이 하나둘 켜질 때마다 방은 마법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어둠이 물러가고, 벽의 얼룩들이 흔들리는 그림자 속으로 숨었다. 그는 장롱 깊숙한 곳에서 낡은 상자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 작년에 만들었던 종이 장식들이 나왔다. 손때 묻은 노란 별들, 접어서 만든 황금 종들, 색종이로 만든 화환이다. 그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꺼내 벽에 붙이고 천장에 매달았다.
"이번엔 더 예쁘게 해야지. 작년보다 훨씬 더..."
그의 손은 떨렸다. 흥분 때문인지, 방금 마신 와인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였다. 오늘은 랭보가 돌아오는 날이었다. 부엌에서 냄비를 꺼내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닭고기를 씻어 양념을 하고, 감자를 깎았다. 요리를 하는 내내 그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예전에 랭보가 좋아하던 샹송. 가사는 이제 기억나지 않았지만 멜로디는 또렷했다. 테이블을 닦고 깨끗한 천을 깔았다. 접시 두 개, 포크 두 개, 와인잔 두 개. 모든 것이 둘이었다. 그는 한 걸음 물러서서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이제 선물만..."
그는 문구점에서 산 포장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양피지의 질감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크림색의 부드러운 종이. 랭보는 때때로 종이에 까다로웠다. 싸구려 종이에는 완성된 시를 잘 쓰지 않았다. 폴은 양피지와 잉크병을 빨간 리본으로 다시 묶어 의자 위에 올려놓았다. 랭보가 늘 앉던 자리인 창가 쪽 의자 위다. 방은 이제 완전히 변해 있었다. 촛불이 벽에 춤추는 그림자를 만들었고, 벽난로의 불이 따뜻하게 타올랐다. 부엌에서는 맛있는 음식 냄새가 진동했다. 테이블은 소박하나마 축제처럼 차려져 있었고, 선물은 반짝이는 리본으로 묶여 있었다.
폴은 시계를 보았다. 8시다. 그는 의자에 앉아 기다리기 시작했다.
3.
이윽고 9시가 되었다. 음식은 완성되어 테이블 위에 잘 올라와 있었다. 닭고기는 황금빛으로 익어 윤기가 흘렀고, 빵은 따뜻했으며, 와인은 잔에 따라져 있었다. 폴은 여전히 기다렸다.
"조금 늦는 거겠지. 길이 막혔거나…. 아니면 선물을 사느라..."
그는 와인잔을 들어 한 모금 더 마셨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술이 쓰라렸다. 하지만 곧 따뜻함이 속으로 퍼졌다. 그는 빈 의자를 바라보았다. 창가의 의자다. 랭보의 자리다. 이윽고 10시가 되었다. 음식에서 김이 더 이상 나지 않았다. 폴은 일어나 다시 음식을 데웠다. 벽난로에 장작을 더 넣었다. 슬슬 촛불 하나가 꺼지려 하자 재빨리 새것으로 갈아 끼웠다.
"아마 눈 때문에 늦는 거야. 밖에 눈이 많이 왔으니까. 기차가 연착됐을 수도 있고..."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기다렸다. 곧 11시. 자정까지 한 시간.
폴은 이제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일어나서 창문으로 다가갔다.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랭보..."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방을 둘러보았다. 장식들, 촛불들, 음식들, 선물. 모든 것이 완벽했다.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어디 있어?"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그는 방을 이리저리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아르튀르? 랭보, 어디 있는 거야?"
그는 침실로 갔다. 역시나 비어 있었다. 침대는 주름 하나 없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랭보가 누울 자리를 위해 그가 오늘 아침 정성스럽게 정리해 둔 것이었다.
"숨바꼭질하는 거야? 그래, 그렇구나. 날 놀라게 해 주려고..."
폴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다. 랭보는 늘 그랬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타나서 폴을 놀라게 하곤 했다. 문 뒤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뛰어나온다든지, 어둠 속에 서 있다가 촛불을 켜는 순간 모습을 드러낸다든지 말이다. 장난꾸러기라니까.
"알았어, 찾아볼게. 내가 찾아볼게!"
그는 옷장을 열었다. 낡은 옷가지들만 걸려 있었다. 침대 밑을 들여다보았다. 먼지만 쌓여 있었다. 창문 커튼 뒤를 확인했다. 아무도 없었다.
"아르튀르..."
그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하지만 그는 계속 찾았다. 부엌, 욕실, 다락방으로 통하는 좁은 계단, 모든 곳을 샅샅이 뒤졌다.
"나와, 제발…. 이제 그만 나와줘..."
자정을 알리는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멀리서 울려오는 교회 종소리가 창문을 뚫고 집안의 고요를 찢어간다. 하나, 둘, 셋, 넷…. 폴은 거실로 돌아왔다. 테이블 위의 음식은 완전히 식어 있었다. 닭고기의 기름이 하얗게 굳어 있었다. 오랜 시간 켜둔 촛불들이 낮게 타들어 가며 깜빡거렸다.
"안 돼..."
그는 테이블을 움켜쥐었다. 손이 떨렸다. 점점 더 심하게.
"안 돼, 안 돼, 안 돼!"
그의 손이 접시를 쓸어버렸다.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접시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음식이 바닥에 흩어졌다. 와인잔이 굴러다니며 붉은 흔적을 남겼다.
"랭보, 어디 있어! 어디 있냐고!"
폴은 미친 듯이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서랍을 열어 내용물을 바닥에 쏟아냈다. 책장의 책들을 마구 끄집어냈다. 벽에 붙여놓은 장식들을 찢어냈다. 종이 별들이 눈송이처럼 바닥에 흩날렸다.
"나와! 나오라고! 아르튀르!"
그는 소파 쿠션을 집어던졌다. 테이블을 뒤집었다. 의자를 발로 찼다. 방은 순식간에 전쟁터가 되었다. 그토록 정성스럽게 준비했던 모든 것들이 무너졌다. 폴의 숨이 가빠졌다. 그의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폴은 무너진 방 한가운데 서서 헐떡였다. 방안에는 촛불 몇 개만이 아직 꺼지지 않고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발밑에서 무언가가 느껴졌다.
4.
바닥에 떨어진 것들 사이에서 낯익은 것이 보였다. 붉은 가죽으로 된 작은 공책. 폴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 손이 너무 심하게 떨려서 제대로 잡을 수가 없었다.
랭보의 일기장이었다.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던 것. 보지 않으려고, 잊으려고, 없는 것처럼 생각하려고 애썼던 것이다.
폴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부서진 접시 조각들이 무릎에 박혔지만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일기장을 펼쳤다. 랭보의 필체다. 빠르고 격렬하게 휘갈겨 쓴 글씨들이다. 어떤 곳은 잉크가 번져 있었고, 어떤 곳은 종이가 찢어질 듯 세게 눌러쓴 흔적이 있었다.
앞 페이지. 날짜가 적혀 있었다. 1889년 1월 25일.
"추위를 피해 남쪽 해안 마을로 이동. 통증 때문에 한숨도 잘 수 없다. 이제 할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하루 온종일 바다를 구경하거나…. 새로 나온 폴의 시집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폴은 페이지를 넘겼다. 어쩐지 차오르는 눈물이 글씨를 흐렸다.
"이제, 여행을 멈춰야 한다. 걸을 수 없다는 것이 설령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라고 해도 나는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살 같은 건 하지 않을 것이다.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살기 위해 죽도록 몸부림치며 남아 있는 불행의 시간을 즐길 것이다."
페이지들이 점점 빠르게 넘어갔다. 폴은 읽을 수가 없었다. 아니, 읽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손은 계속 페이지를 넘겼다.
1880년에서. 1883년으로. 다시 1889년. 그리고 1890년...
"다리가 점점 더 아프다. 의사는 아무 문제 없다고 하지만 나는 안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1891년 5월.
"병원. 마르세유.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고 한다. 끔찍하다. 하지만 더 끔찍한 것은 이제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는 것..."
폴의 손이 멈췄다. 이제 마지막 페이지였다.
1891년 11월 9일.
날짜 아래 몇 줄의 글씨. 다른 페이지들과 달리 아주 천천히, 꾹 눌러가며 조심스럽게 쓴 것 같았다. 마치 마지막 힘을 다해 쓴 것처럼 보인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다들 내가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 거라고 말하지만 나는 안다. 이번 겨울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폴에게 편지를 써야 하나.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미안하다고? 사랑했다고? 모두 거짓말이다. 아니, 모두 진실이다. 모순을 내재한 진실이다. 우리가 함께 했던 그 크리스마스들을 기억한다. 파리의 다락방은 춥고 습했지만 우리는 행복했다. 아니, 행복하다고 믿을 수 있었다. 우리 두 사람분의 광기를 행복으로 치환했다. 폴, 만약 이 글을 읽는다면 알아줬으면 좋겠어. 나는 결코 돌아가지 않아. 돌아갈 수 없어. 우리가 있던 그곳은 이미 존재하지 않아. 다만 내가 남긴 시들 속에서, 당신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할 뿐. 나를 기다리지 마. 나를 기억하지도 마. 그저 살아가..."
마지막 문장은 끝나지 않았다. 잉크가 번져 있었다. 마치 글을 쓰다가 손이 툭 떨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아래, 다른 잉크로, 다른 필체로 작은 글씨가 추가되어 있었다.
"1891년 11월 10일. 아르튀르 랭보, 마르세유 병원에서 사망. 향년 37세."
낯선 글씨였다. 아마 병원에서 나중에 추가한 것일 것이다.
5.
폴은 일기장을 가슴에 꼭 안았다. 그리고 소리 없이 눈물방울이 흘러 떨어져 내렸다.
방은 완전히 폐허였다. 부서진 접시들, 흩어진 음식들, 찢어진 장식들, 쓰러진 가구들이 시선 닿는 곳마다 일그러진다. 마치 폭풍이 지나간 것 같았다. 촛불 하나가 마지막으로 깜빡이다 꺼졌다. 이제 벽난로의 불빛만이 방안을 희미하게 비췄다. 그는 무너진 방 한가운데 앉아 있다. 일기장을 안은 채로 굳어있었다. 그의 몸은 약간씩 흔들렸다. 울음소리는 없었다. 단지 몸이 경련하듯 떨릴 뿐이었다. 밖에서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조용했다. 크리스마스의 밤은 고요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폴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창가의 빈 의자를 바라보았다.
선물 상자가 아직 그 위에 놓여 있었다. 붉은 리본으로 묶인 양피지와 잉크 꾸러미다. 촛불이 거의 다 꺼졌지만 그 붉은 리본만은 아직도 선명하게 빛났다.
"랭보..."
폴은 일어났다. 비틀거리며 의자로 다가갔다. 선물 상자를 집어 들었다. 리본이 손에서 풀렸다. 양피지가 바닥에 떨어졌다. 잉크병이 데굴데굴 굴렀다. 그는 양피지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잉크병을 열었다. 코발트블루, 랭보가 좋아하던 색이다. 벽난로 앞에 앉아 무릎 위에 양피지를 펼쳤다. 손이 떨렸다. 하지만 그는 펜을 들었다. 잉크를 찍었다. 그리고 마구잡이로 쓰기 시작했다.
"장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에게.
다시 한번 크리스마스가 왔어. 그리고 너는 오지 않았어.
이 집은 온통 네 흔적으로 가득하네. 네가 앉던 의자, 네가 쓰던 책상, 네가 걷던 바닥이야. 모든 것이 너를 기억하고 있어. 나는 미쳤지. 알고 있어.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이렇게 준비하고, 기다리고, 미쳐가는 나 자신을 봐. 하지만 멈출 수가 없어. 이 하루만큼은 네가 돌아올 수 있다고,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될 수 있다고 믿고 싶어서. 용서해 줘. 내가 너를 붙잡으려 했던 것을. 내가 너를 파괴했던 것을. 또 우리의 사랑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였던 것을 용서해 줘. 하지만 후회하지 않아. 단 한 순간도. 너와 함께한 그 광기의 날들, 그 찬란했던 지옥만이. 그것이 내 삶의 전부였어. 그 이후의 모든 날들은 그저 그 광채의 그림자일 뿐.
메리 크리스마스, 랭보.
언제나 너의,
폴 마리 베를렌느가"
편지를 다 쓰고 나서 그는 종이를 접었다. 그리고 벽난로를 바라보았다. 벽난로에만 불이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다. 폴은 천천히 편지를 불 속으로 던졌다. 종이가 불길에 휩싸였다. 새겨진 잉크가 검게 타들어 가며 연기가 되어 올라갔다. 굴뚝을 통해, 밤하늘로, 다시 하늘 어딘가로 흘러갔다.
"...받았어?"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대답은 없었다. 단지 창밖으로 눈이 소복이 내리는 소리만이 들렸다. 폴은 벽난로 앞에 앉아 불을 바라보았다. 방은 폐허였지만 그의 얼굴에는 묘한 평화가 깃들어 있었다. 마치 마침내 무언가를 가까스로 완수한 사람의 표정이다. 창밖으로 새벽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의 아침이었다. 눈은 그쳤고, 거리는 하얗게 덮여 있었다. 어디선가 교회 종소리가 들렸다. 폴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옛날의 다락방을 떠올렸다. 춥고 습했지만 촛불로 가득했던 그곳이다. 두 사람이 함께 책을 읽고, 시를 쓰고, 독주를 마시며 밤을 새웠던 그곳이다.
"메리 크리스마스."
그가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그리고는 난장판 가운데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랭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머리에서 눈을 털면서 미소를 지으며, "미안, 늦었네."라고 말하면서 걸어온다. 꿈이었지만 괜찮았다. 일 년에 단 하루, 크리스마스만큼은 꿈이 허락되니까. 방안은 고요했다. 부서진 접시 조각들 사이로 아침 햇살이 부딪힌다. 창가의 의자 위에는 아직도 붉은 리본이 놓여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어젯밤의 희망과 광기 그리고 사랑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폴은 매년 크리스마스가 오면, 이 모든 일을 다시 반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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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물 아니고 힐링물입니다. 키이스x제롬, ㅈxㅂ.
1.
"저, 제롬 밀러 씨가 깨어났어요!"
병원의 의사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제롬이 깨어날 가망이 거의 없다고들 말했다. 그날 무대에서, 키이스의 바로 눈앞에서, 자기 대가리에 총질을 한 제롬은 피를 흘리면서 쓰러졌고 그걸 본 모두는 패닉에 빠졌다. 곧 구급차가 와서 그는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그건 사망 판정을 받기 위한 절차였을 뿐이었다. 누구도 제롬의 생존을 생각하지 않았다. 단 한 사람, 키이스를 제외하고. 키이스는 제롬의 연명 치료 동의서에 직접 서명하고, 막대한 병원비를 지불하여 제롬을 살려놓았다. 제롬이 깨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 어차피 영화를 제작하면서 번 돈을 쓸 곳도 따로 없었다. 가족도, 친구도 제롬 하나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입장이 바뀌었어도 제롬 또한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몇 번의 계절이 지나간 어느 해의 봄날에, 키이스는 갑작스러운 전화를 받았다.
"뭐라고요?"
"의식을 되찾았다니까요? 아아 세상에, 주여..."
"제롬이, 제롬이 뭐라고 말하던가요?"
"그게…. 직접 와 보셔야 이해 하실 것 같아요."
지금 당장 가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키이스는 전화기를 다급히 내려놓았다. 제롬이 깨어나다니, 바랐던 일이지만 정말로 일어날 줄은 몰랐던 일이다. 전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지 않았다. 한여름에 산타가 선물을 준다면 이런 기분일까? 먹던 식사도 찍던 영화도 저녁 약속도 머릿속에서 다 지워졌다. 제롬은 어떤 반응을 할까? 죽으려던 자신을 억지로 살려둔 걸 알면 다시 죽으려 하진 않았을까? 그렇다면 병원에서 묶어 두었을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마구 뻗어나갔다. 익숙한 병실 앞까지 무슨 정신으로 찾아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습관적으로 노크 없이 문을 벌컥 열었고, 곧바로 침대에 앉아 있는 제롬과 눈이 마주쳤다.
"...제롬."
"누구세요?"
"나야, 키이스."
"그게 누군데요?"
"네 친구, 키이스야. 하나밖에 없는..."
"엄마가 모르는 사람이랑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는데요..."
"뭐? 네 어머니는..."
"착하게 지내면 언젠가 데리러 올 거래요."
그는 방긋 웃는 제롬의 해맑은 얼굴을 보고 당황했다. 이게 무슨 소리지. 키이스는 뒤따라 들어온 간호사를 보고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간호사는 의사의 소견서를 내밀면서 고개를 가로저어 보인다. 종이에는 '유년기 이후의 기억 상실, 원상 복구 가망 없음….' 이라고 쓰여 있었다. 키이스의 심장이 빠르게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제롬의 기억 상실이 나쁜 일인지 좋은 일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는 한 가지 사실을 눈치챈다. 키이스는 이제 제롬이 말을 더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2.
제롬은 왜 말을 더듬지 않게 된 걸까? 키이스의 생각에, 가장 유력한 가설은 지금의 제롬이 어머니가 강도에게 살해당한 날의 기억을 통째로 잊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제롬은 더는 괴로워 할 이유가 없다. 어쩌면 그날 이후의 모든 날들이 제롬에게는 그저 잊고 싶었던 기억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기억의 망령들에서 풀려난 지금의 제롬은 몹시 행복해 보였다. 병실에서 벗어난 제롬은 어린아이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기뻐했다. 드넓은 푸른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히고는 낯선 햇살에 눈을 찡그렸다. 키이스는 그런 제롬의 어린 옆모습을 보면서 오래된 필름을 되감는 듯한 이상한 감각에 잠시 숨을 멈추었다. 텅 빈 키이스의 집에 들어선 두 사람은 잠시 현관에 서 있었다.
"집이 좀…. 쓸쓸하지, 미안."
"집이 꼭 궁전 같아요! 엄청 넓어요! 이런 곳에 혼자 살아요? 혼자서 무섭겠다."
명랑하게 웃으며 재잘거리는 제롬의 모습은 정말로 어린아이로 돌아간 듯 순수해 보였다. 키이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제롬이 이렇게 된 데에는 분명 자신의 책임도 있을 텐데, 은근히 기뻐하는 자신이라니. 게다가 제롬이 정말로 깨어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아무런 준비 없이 생활감 없는 집으로 데려와 버렸다.
"...뭐 먹고 싶은 건 있어? 배고프겠다."
"먹을 것도 있어요? 형아 부자였구나."
"뭐든지 말해. 그리고 형이라고 부르지 말고 키이스라고 불러."
"키이스, 키이스."
제롬은 키이스의 이름을 몇 번 입안에서 굴려 발음해 보더니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다. 어쩐지 그 이름이 익숙한 울림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벽난로 앞에 마주 앉았다. 장작이 타들어 가며 부서지는 소리가 방 안에 가득했다. 제롬은 나무 타는 냄새를 맡으며 두 손을 난로 가까이에 내밀었다. 초봄의 꽃샘추위에 언 손끝에 붉은 기운이 고였다.
"제롬, 너무 가까이 가면 머리카락이 탈거야."
"응, 키이스가 있으니까 괜찮아."
그 말에 키이스는 잠깐 웃었다. 마치 괜찮아, 라는 말이 이 집 전체를 가볍게 감싸는 행운의 주문처럼 울려왔다. 조금 뒤에 키이스는 제롬을 두고 부엌으로 가서 케이크 상자를 꺼냈다. 수년 전, 둘이 함께 카페 진열대 앞에서 오래 서 있었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제롬은 그때 초콜릿케이크와 푸딩 사이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결국 아무것도 사지 못했었다. 나중에 꼭 한 트럭을 사주라며 농담처럼 말했던 그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후에 어른이 된 제롬은 약물 부작용으로 새벽에 벌떡 일어나 꼭 그때와 똑같은 그 초콜릿케이크와 푸딩을 가득 퍼 먹고서 구토하고 다시 잠들곤 했다. 그런 추억 때문에 키이스도 늘 같은 디저트를 집에 보관하고 있었다.
"배고프지? 달콤한 거 좋아했잖아."
"좋아! 나 푸딩 진짜 좋아해."
살금살금 다가온 제롬이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키이스는 초콜릿케이크와 푸딩을 접시에 옮기며 맥 빠지게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들은 함께 작은 식탁에 앉았다. 키이스의 맞은편에 앉은 제롬은 숟가락을 쥐고 푸딩을 한 입 떠서 입안에 넣었다. 그는 한순간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음, 맛있어!"
"그렇지?"
"아…. 근데, 이상하네."
"뭐가?"
"모르겠어. 이거 예전에 먹어본 것 같아, 그런데 기억이 안 나."
키이스는 끙끙대며 머리를 부여잡는 제롬의 의자 뒤로 다가가서 살포시 안아주었다. 이내 진정한 제롬이 키이스의 냄새를 킁킁 맡는다.
"키이스, 담배 냄새 나."
3.
밤이 깊어지자 제롬은 벽난로 근처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키이스는 조용히 그의 어깨에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리고 살포시 담요에 감싼 채로 조심스럽게 들어서 침실로 옮겼다. 그 순간 비몽사몽한듯 제롬이 낮게 중얼거렸다.
"엄마 꿈 꿨었어. 나한테 괜찮다고 말해줬어. 이제 안 아프다고."
"그래."
"나도 이제 괜찮은 거지? 키이스."
"응, 제롬. 이제 다 괜찮아. 함께 행복하기만 하면..."
제롬은 다시 눈을 꼬옥 감았다. 나이를 거스른 그의 얼굴은 마치 잠든 아이 같았다. 키이스는 한참 동안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시간은 제롬과 창문 사이 어딘가를 날아다니며 멈췄다. 물기 어린 창문 밖에서는 봄비가 부드럽게 지나가고 있었다. 잠시 후, 제롬이 다시 잠에서 깨어 조용히 속삭였다.
"키이스."
"응?"
"내일은 밖에 나가자. 산책하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좋지."
"같이 가줄 거지?"
"당연하지. 내일도, 그다음 날도. 계속 함께야."
제롬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눈을 감고 일정한 숨소리를 색색 내면서 잠든다. 키이스는 그 옆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기억이 없어도, 넌 지금 이대로 아주 괜찮아."
봄비는 조금씩 잦아들고, 방 안에는 푸딩의 달콤한 냄새와 따뜻하고 포근한 향기가 뒤섞여 있었다. 키이스는 그 냄새를 들이쉬면서, 사라져 버린 모든 순간들을 아주 천천히 흘려보냈다. 이제 더 이상 끔찍한 일들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 지금 이 제롬, 어린아이가 된 제롬과 자신이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겨우 몇 년 만에 처음으로 편안하게 숨을 들이쉬고 뱉을 수 있었다.
4.
창문을 통해 들어온 네모난 아침 햇살이 방안을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 제롬은 식탁에 앉아 신문을 들고 있었다. 모든 것을 잊은 만큼 글을 모르는 손끝이 조심스럽게 활자를 더듬는다. 그는 요즘 키이스가 구독했던 여러 낡은 잡지와 신문들을 모아 글자를 익히고 있었다.
"이거는…. '배우' 맞지?"
키이스는 커피를 마시다 말고 번뜩 고개를 들었다. 제롬이 신기한 듯 빛바랜 신문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신문지에 붙어 있던 먼지가 춤추며 햇살 아래로 흩어졌다.
"응, 맞아. 어떻게 알았어?"
"기사 제목에 네 이름 옆에 쓰여 있더라고. '인기 배우 키이스 벨' 그게, 너 맞지?"
키이스는 잠시 웃음과 한숨을 섞어 내뱉었다. 그는 어쩐지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오래된 거야. 그땐 연극 하던 시절이지."
"근데 지금은 배우 아니야?"
"이젠 영화 만드는 사람이야. 제작자."
"왜? 왜 그만뒀어?"
그 질문은 순수하고 또 너무나도 순수해서, 도망칠 틈조차 없었다. 키이스는 커피잔을 슬쩍 내려놓으며 잠시 눈을 피했다.
"글쎄…. 그냥, 무대보다 무대 뒤쪽이 더 편해졌달까. 사람들 앞에 서는 게 좀 힘들어졌지."
"왜? 무서워서?"
"응, 뭐 그런 걸지도."
제롬은 신문을 내려놓고 천천히 고개를 갸웃했다. 키이스는 어리숙한 제롬의 그 모습이 사랑스러웠지만 어쩐지 이어질 질문들이 불길했다.
"근데 난 네가 배우일 때 더 좋았을 것 같아."
"왜 그렇게 생각해?"
"배우는…. 관객들이 기다리는 사람이잖아. 대본이든, 관객이든, 다 너를 기다려. 그런 사람은 멋있어."
키이스는 대꾸하지 못했다. 대신 옅은 웃음만 지었다. 제롬의 말들이 기묘하게 가슴 한구석을 저릿하게 자극했다. 두 사람이 점심을 먹고 난 뒤 제롬은 설거지를 돕겠다고 팔을 걷었지만, 결국 싱크대 앞에서 거품을 얼굴에 묻힌 채로 끝났다.
"...나중엔 나 혼자서도 다 할 거야."
"그럼 그때 되면 내가 제롬 밥 얻어먹는 거네?"
"응, 진짜 잘할 거야. 키이스, 두고 봐."
그날 저녁에는 함께 욕조에 따뜻한 물을 채웠다. 욕조에선 거품이 천천히 피어오르며 천장을 따라 물방울무늬처럼 흩어졌다. 제롬은 거품을 모아 손 위에 올려놓고는, 그걸 키이스에게 보여주며 웃었다.
"키이스, 봐, 눈 같지?"
"응, 눈사람 같네."
"키이스는 눈 좋아해?"
"예전엔 싫어했어. 너무 추워서. 걷기도 불편하고."
"근데 지금은?"
"지금은 괜찮아. 같이 보면 괜찮은 것도 많으니까."
목욕 후엔 키이스가 뽀송한 수건으로 제롬의 머리를 닦아 말려주며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제롬은 텔레비전의 비누 광고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키이스의 팔에 살포시 기대었다. 키이스는 제롬의 동그란 머리통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제롬은 가볍게 재채기를 하고 훌쩍거리더니 불쑥 말을 꺼냈다.
"내일은 영화 보러 가자. 네가 만든 거 볼 수 있어?"
"그건 조금 오래 기다려야 될걸. 아직 편집 중이라서."
"그럼 산책하자. 가게에서 푸딩도 더 사고."
"좋지, 제롬, 이만 자자."
밤이 되어 두 사람은 같은 침대에 누웠다. 키이스 옆의 제롬은 뒤집어쓴 이불 속에서 작게 속삭였다.
"키이스."
"응."
"나 글 배우는 게 재밌어. 신문에, 네 이름 나온 것도, 무지 신기했어."
"그래?"
"응. 나도 언젠가 내 이름 신문에서 보면 좋겠다..."
"그래, 그럴 거야..."
제롬은 그렇게 말한 뒤 잠잠히 숨을 고르다가, 키이스와 덮은 이불 끝을 손가락으로 꼭 쥐었다. 키이스는 그 손짓을 어둠 속에서 감지한다.
"기억이 없어도 난 괜찮은 사람이지?"
키이스는 대답 대신 제롬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방 안에는 서로의 숨소리만이 천천히 섞였다. 창밖 가로등의 빛이 커튼 사이로 번져와, 두 사람의 얼굴 위에 잔잔히 내려앉았다. 키이스는 그 미미한 빛 속에서 눈을 감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하늘이 내려준 새로운 기회야. 상실의 끝이자 기적의 시작이야.
5.
영화 촬영은 계절이 바뀐 뒤 어느 날, 키이스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있으면 누구나 배를 가르고 싶어 하기 마련이었고, 키이스의 욕심도 끝 간 데 없었다. 인간이 언제나 더 욕망하고 원하게 되는 것은 숙명이다.
"네가 주인공이야, 제롬."
"나는 영화 같은 거 잘 몰라..."
"걱정 마. 그냥 있는 그대로의 너면 돼."
제롬은 망설였지만 키이스의 눈빛이 너무 간절해서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촬영이라기보단 일기처럼 보였다. 작은 카메라 하나와 조명 하나, 그뿐이었다. 키이스는 말없이 카메라를 들고 제롬을 바라보기만 했다. 렌즈가 천천히 줌 인될 때마다 제롬은 무언가 불안한 듯이 어색하게 웃었다.
"왜 그렇게 보고 있어? 나 이상해?"
"아니. 그냥 네가 너무 좋아 보여서."
"뭐야. 우리는 무슨 사이야?"
"형제 그 이상. 우리는 서로가 곧 자기 자신이야."
그 말은 꼭 대사 같았지만, 촬영 대본엔 없던 말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무언의 침묵이 흘렀다.
며칠 뒤, 키이스는 제롬에게 찍을 영화의 시나리오를 조금씩 읽어줬다. 그것은 기억을 잃은 한 남자와, 그를 돌보는 친구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구조 자체가 제롬의 삶의 거울상이었다. 처음엔 단순히 이야기가 아름답다고 느꼈지만, 어느 순간 제롬은 문장 속에서 자신이 본 적 없는 장면들을 기억해 내듯이 느끼기 시작했다. 그 안에 자신의 어머니가 있었고, 울려 퍼지는 총성이 있었다.
"키이스, 이거…. 이상해. 왜 이렇게…. 익숙하지?"
"아마 주인공이 널 닮았으니까, 그럴 거야."
"그럼 나, 진짜 이런 적이 있었던 거야?"
"아니."
그 대답은 너무 빨라서 오히려 숨겨진 진실의 확인 사살처럼 들렸다. 제롬은 무척 혼란스러웠다. 카메라 속에서 제롬의 시선은 점점 흔들렸다. 대본을 따라 걷고, 웃고, 슬퍼하는 장면들이 반복될수록 그는 자꾸 멈춰 섰다. 숨이 차오르고 꽉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키이스, 이거, 그냥 연기지? 이건 다 가짜잖아?"
"그래, 다 연기야."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프지?"
그날의 촬영은 중도에 중단됐다. 키이스는 제롬을 붙잡고 그저 오늘은 그만하자고 말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담긴 건 위로가 아니었다. 마치 진짜 기억이 돌아오는 걸 막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처럼 절박했다. 총상으로 인해 뇌에 문제가 있으니까 기억이 돌아올 가능성은 낮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자극을 주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모든 불행을 잊은 제롬 덕분에 행복한 자신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날 밤, 광학 편집실에 걸린 필름에 제롬의 얼굴이 멈춰 있었다. 그는 웃으면서도 눈동자 주변이 떨리고 있었다. 키이스는 그 장면을 수십 번이나 돌려봤다. 카메라 줌은 제롬의 얼굴 끝까지 파고들었다.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눈, 코, 입, 숨결, 그 모든 게 자신이 사랑하는 이의 형상이었다. 그의 손이 필름을 더듬었다. 마치 그 속에 제롬이 갇혀 있는 것처럼 애절하게 만져 보았다. 그건 너무나도 사랑하는 시선이 담긴 줌 인이었다.
6.
다음 날 일찍 일어난 제롬이 꼼지락대더니 침실의 따뜻함 속에서 중얼중얼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 어제 꿈꿨어. 무대 위에서 네가 나를 부르던 목소리가."
"...그런 꿈은 꾸지 마."
"근데 키이스, 그건 꿈이 아니었던 것 같아."
"아니. 꿈이야."
재빠르게 키이스가 제롬의 손을 잡았다. 피가 빠져나간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제발, 그건 지금 우리 얘기가 아니야."
제롬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조금 웃었다.
"...응. 그래도 난 좋았어! 키이스가 날 찍어줘서."
"왜?"
"그 카메라로 날 볼 때 키이스는 세상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는 얼굴이었으니까."
키이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제롬의 말이 사실이었다. 키이스는 카메라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만들고 있었다. 결국 기억을 잃을 정도로 고통받은 영혼을 다시 한번 괴롭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오로지 자신의 욕망 때문이다. 분명 그건 구원 따위가 아니라, 사랑을 가두는 감옥이었다. 둘은 그렇게 서로를 붙잡고 있었다. 기억으로부터 도망치려는 한 사람과, 그 기억을 영화 속에 되살려 박제시키려는 욕심마저 가진 한 사람이다. 모든 과거를 버린 채 빛을 향해 달리면서도, 결국엔 같은 그림자에 갇혀 있는 두 사람이었다.
"...오늘은 바다에 가서 촬영 하자."
"바다? 나 바다 가보고 싶어!"
그렇게 키이스와 제롬은 차에 타고 바다로 출발했다. 마침내 찾아온 바람이 잦아든 모래사장은 해 질 녘의 빛으로 붉게 물들고 있었다. 태양은 바다로 스며들고 있었고, 그 위로 파도소리와 바람결에 흔들리는 갈매기 울음소리가 간간이 섞였다.
"여기서 영화 찍어도 괜찮아?"
키이스가 물었다. 제롬은 맨발로 모래 위를 톡톡 밟으며 고개를 주억거리며 끄덕였다.
"응. 근데 너-무 예뻐서, 키이스가 영화만 찍으니까 아까워!"
키이스의 손에 든 카메라가 천천히 흔들렸다.
"뭐가 아까워, 널 찍을 수 있는데."
렌즈 속의 제롬은 눈썹이 석양빛에 젖어 있었다. 그 표정은 연기가 아니었다. 그냥 충실히 살아 있는 순수한 얼굴, 햇살에 반사된 바다의 숨결 같았다.
"제롬, 여기 와봐."
"왜?"
"글자 써보자. 너 요즘 공부하잖아."
"글씨…. 어려워."
"괜찮아. 이름만 써봐. 네 이름 써봤어?"
제롬은 망설이다가 손가락으로 모래를 긁었다. 선은 삐뚤빼뚤했고, 모래가 흩어져 모양이 흐릿했다.
"이게 '제롬'이야?"
“음…. 거의 다 맞아.”
키이스가 웃으며 제롬의 손을 잡아 덮었다.
"여기, 이렇게. 'J'. 그리고 이렇게 돌려서, 'e'."
둘의 손가락이 동시에 움직였다. 석양빛에 닿은 손끝이 조금 따뜻했다.
"그럼 키이스 이름도 알려줘."
"나? 내 이름?"
"응. 같이 써야지. 나란히."
"좋아."
키이스는 제롬 옆에 앉아 자신의 이름을 썼다. 'Keith' 글자 끝은 파도에 젖어 금세 번들거렸다. 제롬이 헤헤 웃으며 말했다.
"둘이 꼭 한 단어 같네."
"그렇지."
둘은 마주 보고 방긋 웃었다. 파도가 살짝 밀려와, 모래 위에 남은 글자를 스쳤다. J의 곡선이 먼저 사라졌다. 그 뒤를 따라 K가 반쯤 무너졌다.
"야, 지워진다..."
제롬이 키이스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키이스가 간지러운듯 조금 웃는다.
"괜찮아. 또 쓰면 돼."
"매번 이렇게 지워질 텐데?"
"그럼 계속 쓰면 되지."
제롬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몸을 숙여 키이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카메라가 모래밭 위에 굴러떨어졌다. 렌즈는 바다 대신 두 사람의 그림자를 비추고 있었다. 바람이 지나가며 파도 소리와 섞여 이름을 지운 대신 숨소리를 허공에 남겼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해는 거의 바닷속으로 잠겼다. 모래 위에는 이제 아무 글자도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모래 위 두 사람의 발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키이스는 천천히 제롬의 약간 축축한 깡마른 손을 잡았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찍자."
"응."
"이 장면…. 우리가 있는 그대로 담겼으면 좋겠는데."
"응, 근데, 이미 찍혔어."
"응?"
제롬이 웃으며 카메라를 가리켰다. 렌즈에는 검은 실루엣 두 개가 붙어 있었다.
"봐, 우리 둘이 있잖아?"
그리고 바다에서 또 한 번 파도가 밀려왔다. 모래 위의 모든 것을 덮고 지나갔다. 그 안에는 이름도, 웃음도, 마지막 태양 빛 한 줄기도 함께 섞여 있었다. 어두운 밤이 완전히 내려앉을 때까지, 키이스와 제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의 손을 잡은 채, 그저 바다가 들려주는 소리를 들었다.
7.
브로드웨이의 밤공기는 늘 그렇듯 습했다. 늦은 저녁, 키이스가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손을 말릴 때쯤이었다. 부엌 쪽 작은 창문이 살짝 흔들리더니, 무언가가 ‘딱’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제롬은 즉시 뒤를 돌아봤다.
"뭐야? 바람이야?"
"제롬."
키이스는 미묘하게 얼굴이 굳어 있었다. 잠시 후 문손잡이가 아주 천천히 내려갔다. 제롬은 헉 하고 숨을 삼켰다.
"누구지...?"
"조용히 해."
키이스의 목소리가 한없이 낮게 떨어졌다.
"안으로 들어가."
"키이스...?"
"침실로 들어가. 옷장 안에 숨어."
제롬은 머뭇거렸지만, 키이스의 표정이 이상하리만치 굳어서 겁이 나 다른 생각을 못 했다. 결국 제롬은 침실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커다란 옷장이 한쪽 벽을 채우고 있었다. 작은 나무문, 낡은 손잡이, 그리고 그 뒤에는 빽빽한 어둠이 있다. 옷장에 손을 대자마자 키이스가 뒤에서 속삭였다.
"빨리 들어가."
"같이 들어가면..."
"좁아."
"그러면, 키이스는?"
"난 괜찮아."
그 말과 함께 키이스는 제롬의 등을 떠밀었다. 몸이 안으로 들어가면서 문틈이 닫혔고, 그 좁은 틈 사이로 잠깐 마주친 키이스의 눈빛은 분명 미소였는데, 동시에 '조용히' 하라는 신호로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다 댄다. 입술이 움직였다. 쉿. 그 단 한 음절이 제롬의 심장을 쥐어짜듯 흔들었다. 그 순간, 오래전 기억의 냄새가, 피와 담배 연기, 술 냄새, 울음소리가, 무대 위에서 터져 나오던 조명처럼 번쩍였다. 그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휘몰아쳤다.
"어, 엄마..."
아주 낮고 작은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 그리고 곧 그 뒤를 이은, 무거운 충돌음이 집안을 울린다. 옷장 밖에서 키이스가 누군가와 싸우고 있었다. 숨이 멎을 만큼 길었던 몇 초가 지난다. 탁자 위에서 유리잔이 바닥에 떨어지고 깨지며 고함이 섞였다. 한 순간, 세상이 멈춘 듯했다.
두 발의 총성.
짧고, 냉혹하게 공기를 찢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다음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제롬은 옷장 안에서 손톱이 부러지도록 문을 움켜쥐었다. 숨을 쉬면 들킬 것 같아서 숨도 죽여서 참았다. 그는 더 이상 키이스의 이불 속에 숨어 꼼지락대는 순진무구한 아이가 아니라, 어른의 몸에 갇힌 어린아이였다. 눈을 감았지만 소리가 들렸다. 탕, 탕, 하고 울린 총성이 그날의 총소리와 겹쳤다. 오래전 피투성이의 바닥 위에서 들려오던 그 끔찍한 데자뷔. 눈물이 흘러내리지만 굳은 몸을 움직여 닦을 수조차 없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다. 문밖이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고막이 윙윙 울릴 정도였다. 그때 문이 천천히 열렸다. 빛이 스며들었고 키이스의 실루엣이 서 있었다. 키이스는 어깨에 총알이 스쳤는지 피가 나는 어깨를 붙잡고 있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그가 말했다.
"제롬, 괜찮아. 다 끝났어."
제롬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른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키이스가 다가와 그를 끌어안았다.
"괜찮아, 괜찮아. 이제 안전해."
그러나 제롬은 여전히 대답하지 못했다. 키이스가 소매로 눈물을 닦아 주었지만 넋 나간 사람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8.
그의 입이 몇 번 열리고 닫히더니 소리가 뒤엉켜 나왔다.
"키, 키... 이스..."
제롬이 처음으로 다시 말을 더듬었다. 키이스의 손이 제롬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하지만 제롬은 마치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 같았다.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굳은 몸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날 이후 제롬은 거의 말하지 않았다. 그의 하루는 일정했다. 키이스가 끓여주는 죽을 먹고,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고, 깨끗한 옷을 입고, 다시 침대에 눕는 것이다. 그는 마치 무대에서 대사를 잊은 배우처럼, 세상의 텍스트를 읽지 못하는 눈으로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 며칠 뒤, 제롬이 입을 열었다.
"…미, 미…. 안."
키이스는 전등을 끄며, 조용히 물었다.
"왜. 뭐가?"
"나…. 또, 또…. 못... 나갔어."
키이스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네 잘못 아니야. 제롬."
"나, 널…. 지켜야 했는데..."
"그건 내 몫이야."
"근데…. 너, 넌…"
제롬의 목소리가 숨이 막혀 오는 듯 점점 희미해졌다.
"너는…. 또 다쳤잖아."
키이스는 대답 대신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제롬의 눈에 또 눈물이 고였다.
"무서웠어. 더 무서운 건 그게 나, 나였어야 해, 했단 거야."
그 말에 키이스의 손이 잠시 멈췄다. 제롬은 그 뒤로 한동안 완전히 말을 잃었다. 아침에도, 밤에도, 그저 멍하게 창밖을 보았다. 키이스는 그런 제롬을 매일 같은 루틴으로 돌봤다. 음식을 만들어 입에 넣어주고, 시트를 갈아주고, 머리를 감겨주었다. 그의 손길에는 어떤 조건도, 기대도 없었다. 마치 이미 버려진 시간을 다시 주워 모으는 사람처럼 그렇게 했다. 제롬을 되찾았다는 만족감이 키이스를 거의 온전히 행복하게 했다.
"제롬, 미안해하지 마."
9.
이제는 이름만 남은 오래된 극장. 그레이 하우스. 그곳은 키이스와 제롬 둘뿐인 상영을 위한 장소가 되었다. 오랜 촬영 끝에 카메라를 멈추고, 필름 릴을 돌리며, 편집기를 닫았을 때 키이스가 말했다.
"이제 정말 끝났어."
제롬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키이스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럽고, 제롬의 목소리는 여전히 불안하게 툭툭 끊겼다.
"…그, 그럼, 이게… 뭐, 완… 완성?"
"그래. 완성."
영화는 제롬의 얼굴로 시작하고 제롬의 얼굴로 끝났다. 후반부 부터는 말을 더듬고, 눈이 흔들리고, 쉼 없이 호흡이 부서지는 그 모든 장면이 그대로 남았다. 키이스는 어느 한 장면도 지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떨림이야말로 그들의 이야기였으니까. 기억을 되찾은 후, 제롬이 말을 다시 더듬게 되자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영화를 계속 찍을 것인가를 고심했다. 목소리를 키이스가 낸다든지, 아예 무성 영화로 바꾼다든지,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런데 두 사람은 갑자기 깨달았다. 이 영화는 개봉을 위해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보기 위해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이 벼락처럼 다가왔다.
밤중에, 둘은 조용히 극장으로 향했다. 어릴 적 숨어들었던 문은 반쯤 녹슬어 있었고, 스크린은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키이스가 낡은 영사기를 세팅하면서 제롬을 보고 웃었다.
"떨려?"
"조, 조금..."
"괜찮아. 네 모든 게 다, 이제 영화 속에서 살아있는 거야."
"나… 나 그런 거 이제 잘 몰… 몰라. 그냥… 키이스가 좋다면 됐어."
"응, 그거면 충분하지."
불빛이 꺼지고 영사기의 덜컹거림이 퍼졌다. 스크린 위로 희미한 빛의 입자들이 날아올랐다. 서로의 그림자가 관객석 천장 위를 스쳐 지나갔다. 영화는 제롬을 담고 있었다. 발그레하게 상기된 얼굴로 행복한 듯 이런저런 말을 하고, 집과 정원에서 춤을 추고, 해맑게 웃는 모습들, 또 불안해하고, 무서워하거나, 폐인이 된 모습들, 그리고 더듬으면서도 하고픈 말을 기어코 하는 모습들까지 스크린을 타고 계속해서 새로운 이야기가 이어졌다. 두 사람 뿐인 적막한 극장 안에는 필름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그러다 제롬이 입을 열었다.
"…나, 그 소, 소리 싫지 않네."
"어떤 소리?"
"내 목, 목소리. 예전엔 싫었는데, 지금은…"
"...좋지?"
"...응."
말은 여전히 더듬었지만 이번엔 조금 더 편안하고 부드럽게 숨결이 이어졌다. 객석에 앉은 두 사람의 손이 가만히 맞잡혀 있었다. 이어진 손으로는 생생히 살아있는 온기가 서로에게 전해진다. 그 순간, 스크린에 남은 잔광이 두 사람을 스치고 지나가며 마치 오래된 필름 속의 먼지처럼 천천히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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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해피엔딩」 팬픽, 올리버x클레어
※원작과 거리가 있는 내용이며, 끔찍합니다.
1.
무자비한 내려침이 몇번이고 계속해서 이어진다. 시멘트 벽돌에 맞은 기계의 파편이 산산조각으로 흩어지고, 깨진 전지에서 전해액이 흘러나와 사방으로 튀어 흩어진다. 액체 전해질의 시큼하고 타는듯한 냄새가 골목길 가득 풍긴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을게, 이름이 뭐지?"
"...패트릭."
그 대답을 듣자마자 다시 한번 시멘트 벽돌을 들어 거세게 내려찍는다. 이윽고 완전히 망가져서 동작을 멈춘 채 머리가 뭉개진 인간형태의 기계를, 내려치던 이는 멍하니 서서 가만히 바라본다. 한순간 도시의 차가운 바람이 검은 레인코트 사이로 스며든다. 볕이 들지 않는 골목은 대로변보다 싸늘하다. 그리고 그 그림자 밑에서 방금 일어난 일은 '로봇 살인'이라고 부르는 종류의 사건이다.
지금 부서진 것은 헬퍼봇5라는 기종의, '패트릭'이라는 이름을 가졌었던 로봇이다. 그리고 조금 전 패트릭을 잔혹하게 살해한 그 역시도 헬퍼봇5인 '올리버'라고 불리곤 했던 존재다. 둘 다 주인을 잃고 방황하는 처지였고, 아마도, 이 만남에서 올리버의 판단과 행동이 조금 더 빨랐을 뿐이다. 결국 버려진 구형 헬퍼봇이 조금 더 살아남는 방법은 한정되어 있다.
올리버는 익숙한 듯 품속에서 드라이버와 니퍼를 꺼내서 패트릭의 시체에서 멀쩡한 부품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한쪽 어깨의 구동 부품, 무릎과 발목의 연결 부품, 그리고 몸통 내부를 헤집어서 꺼낸 칩 몇 개와 비상용 전지까지 다 떼어내서 알차게 가방에 챙겼다. 그는 묵직해진 노란색 이마트 쇼핑 가방을 들고 유유히 거리를 걸어서 대로변으로 나왔다. 올리버는 자체 루팅을 통해 자신의 운영체제 최상위 권한을 얻은 뒤로, 속도와 힘의 구동 한계 범위와 센서 제한 등을 직접 해제했다. 그러므로 그는 무거운 짐을 들어도 이제 전혀 힘들지 않았다.
올리버는 품속에서 버튼이 하나 있는 작은 검은색 강철 박스를 꺼내서 입맞춤 했다. 기판에 몇 개의 칩을 이식하여 만든 초소형 클레어였다. 버튼으로는 이진 코드를 입력할 수 있다. 올리버는 길을 걸어서 자신의 오래된 아파트로 돌아가는 길에 '미니 클레어'의 버튼을 계속해서 눌렀다.
0100 1001 0010 0000 0100 1100 0110 1111 0111 0110 0110 0101 0010 0000 0101 1001 0110 1111 0111 0101
= I Love You
2.
두 사람의 사랑은 영원할 것만 같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아름다운 클레어의 신체 부품은 더 이상 기능하는 부분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 올리버는 사랑하는 아내 클레어의, 즉 헬퍼봇6의 부품을 구하고 있다. 그는 클레어의 몸을 완성할 부품을 뭐든 애타게 찾아다니고 있었다. 인간은 사랑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 인간의 형상을 한 로봇도 마찬가지다. 곧 헬퍼봇끼리의 살인이나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구형 헬퍼봇의 부품을 사들이거나 하는 일은 일상이 되었다. 처음에는 두려웠지만, 클레어를 되살리기 위해서라고 정당화하고 몇번의 루팅을 거치자 아무런 거리낌이 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헬퍼봇6보다 조금 덜 인간적인 헬퍼봇5라서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클레어라면 이럴 때 '역시 파이브'라고 나를 놀렸을 텐데, 하고 상상하고 조금 웃는다.
"클레어... 사랑해."
미니 클레어는 기분이 좋을 때 파란 led를, 기분이 나쁠 때는 붉은 led를 점멸한다. 'I Love You'라고 몇 번 버튼을 누르면, 미니 클레어가 계속해서 파란 led를 깜빡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손안에 들어오는 검은 상자의 led, 그 깜박임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충전기를 연결한 채로 올리버는 서서히 잠든다. 그의 오래된 아파트는 닥치는 대로 모은 헬퍼봇의 부품들이 쌓여, 그의 의자 주변은 모조리 엉망진창이다. 또 한쪽 벽에는 이름들이 적혀 있다. 목록의 가장 아래에 적혀 있는 이름은 '패트릭'이다.
3.
인간과 구분이 더 어려운 헬퍼봇6의 감정 표현 기능은, 클레어를 위한 부품을 더욱 모으기 어렵게 했다. 올리버가 보기에 겉으로는 전혀 인간과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헬퍼봇6를 죽이고 부품을 얻기는 힘들었다. 반면 헬퍼봇5는 몹시 알아보기 쉬웠다. '당신이 있어 줘서 고마워요'라는 말에 '천만에요!'라고 답하는 모든 헬퍼봇5들을 내려쳐서 죽이면 되는 일이었다. 서울에는 주인이 방치해서 부랑자가 된 헬퍼봇5들이 꽤 있었다. 그들을 차례로 사냥하면서 부품을 수급해 자신의 수명을 늘리는 것이 올리버의 삶이었다.
연명에 급급해서 팍팍한 삶을 사는 올리버는 어느 날 화분이 말라 죽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는 화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사실 그는 클레어만 있다면 모든 것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클레어를 다시 한번 살려 낼 수 있다면 그 외에 중요한 일 따위는 없다. 올리버의 순수했던 시절은 완전히 막을 내리고 사라졌다. 이때는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지금 최상위 우선순위는 클레어에 대한 사랑이니까.
오늘도 헬퍼봇 사냥은 계속된다. 내부 GPS 정보망을 통해 다른 헬퍼봇5의 대략적 위치를 알아낸 후에는, 그곳으로 가서 누가 헬퍼봇5인지 알아내기만 하면 된다. 알아내는 법은 쉽다. 고맙다는 말만 건네면 된다, 고 그렇게 올리버는 생각했다. 하지만 인간들이 그렇듯 헬퍼봇도 때로는 실수를 한다. 올리버는 지나가는 젊은이들에게 닥치는 대로 말을 걸었다.
"여기에 있어 줘서 고마워요!"
그 말에 따라온 대답들은 다음과 같았다.
"안 믿습니다. 요즘 같은 때 무슨 종교람."
"필요 없어요."
"안 사요."
그리고 마지막 사람은 "천만에요!"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을 한 건 카키색 옷을 입은 젊은 여성이었다. 올리버는 다급히 그녀의 손목을 잡고 골목길로 강제로 끌고 들어왔다.
"당신 이름이 뭐죠?"
"오, 화끈하네요. 전 레이시예요."
"레이시, 미안해요."
올리버는 곧바로 쇼핑 가방에 든 시멘트 벽돌을 꺼내 그녀를 내리쳤다. 깨진 머리통에서 피가 터져 나와 올리버의 얼굴에 잔뜩 튀었다. 깜짝 놀란 표정을 한 채로 굳은 여자는 바닥에 쓰러진다. 뜨뜻한 피를 뒤집어쓴 올리버는 실수를 깨닫는다. 그러니까, '천만에요!'라는 말은 인간도 할 수 있다. 처참한 광경을 앞에 두고 올리버는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꼼꼼히 얼굴을 닦는다.
원래라면 인간을 해친 로봇은 자동으로 폐기 대기 세션을 동작해야 하지만, 복잡한 루팅을 거친 올리버는 모든 행동에 자유가 있었다. 그는 바닥에 흥건해진 핏자국을 피해서 까치발로 골목을 나왔다. 대로변에 있는 공중전화기의 수화기를 들고, 119를 눌러 구조대원에게 차분하게 다친 여자를 발견했다고 신고 전화를 한다. 구조대원은 신고에 감사드립니다, 라고 대답하고, 올리버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는 진작에 '천만에요!' 알고리즘을 삭제했다.
오늘의 헬퍼봇 사냥은 실패다. 시멘트 벽돌이 들어있는 쇼핑백을 든 올리버는 퇴근길 인파에 섞여들어 집으로 간다. 오늘 올리버의 아파트 벽에는 어쩌면 '레이시'의 이름도 새겨진다.
4.
헬퍼봇5의 원래 존재의의는 사람을 돕는 로봇이다. 그러나 올리버는 점차 원래의 기능을 잃어갔다. 클레어의 완성과 자신의 연명이라는 명목 아래 모든 행동 제한을 해제했다. 이제는 전선 하나, 칩 하나도 타인을 위해서 봉사한다는 목적을 지니고 있지 않다. 이 정도로 심하게 개조된 헬퍼봇은 서울 전체에 많지 않았다. 헬퍼봇 6의 부품을 구하기 위해 종로 부근의 암시장을 찾은 올리버는 자주 그곳의 엔지니어와 거래를 했다. 오늘도 정기 검진과 물물 교환 등을 하러 찾았다.
"안녕하세요?"
"어, 올리버, 왔구나."
"늘 하던 거 하러 왔어요."
올리버는 익숙한 듯 머니 카드를 꺼내 낡은 단말기에 대고 값을 지불한다. 나이가 지긋한 엔지니어는 몇 가지 전선을 연결하고 헬퍼봇5, 올리버의 상태를 세부 점검했다. 그러는 중에 갑자기 내부 정전이 일어나 도중에 비상전력으로 교체되었다.
"또 시작이네, 요즘은 서울까지 전기가 자주 끊긴다니까. 이게 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세요?"
"뭐? 올리버, 너 그런 말 안 하게 프로그램 재조정 업데이트 해 줄까?"
올리버는 깜짝 놀라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결국 시스템 업데이트를 받지 않았지만 올리버가 인간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이때가 마지막이 되었다. 그는 그동안 시장에 흘러 들어온 헬퍼봇6의 부품 몇 개를 구매하고 노란 쇼핑백에 한가득 담아서 그의 낡은 아파트로 돌아갔다. 올리버의 집에는 만들어지고 있는 클레어의 신체가 있다. 그는 이제는 빈 병 대신 집안 가득 헬퍼봇6의 부품을 모으면서, 언젠가 클레어를 완성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 믿음만이 그에게 길잡이별이 되어준다.
5.
헬퍼봇5의 전체 내부 정보망에 따르면 시내에 지금까지 남아서 구동 중인 헬퍼봇5는 얼마 없다. 그 모두를 죽여서 부품을 취해도 올리버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았다. 올리버는 점점 초조해졌다. 그런 딱한 사정을 거래 관계에 있는 엔지니어 또한 알고 있었다. 아침부터 울리는 엔지니어의 전화를 받으며 올리버는 대기 상태에서 깨어났다.
"헬퍼봇6 부품 필요한 게 얼마나 남았지?"
"약 35% 정도 남았어요. 왜요?"
"시간이 없어, 이 속도로는 네가 먼저 멈출 텐데."
"저도 알아요."
"다른 방법이 있다면, 할 건가?"
"어떤 방법이요? 가릴 처지가 아니라서요."
"옛날에 HitchBOT이 필라델피아에서 참수당한 사건 알아?"
"음, 검색해 볼게요...."
"그런 현상이 훨씬 더 큰 규모로 벌어진다고 상상해 봐."
"왜죠? 그걸로 인간들이 만족하나요?"
"로봇 검투사가 되는 건 어떻게 생각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때까지 네가 해온 일들을 남들에게 보여주는 것 뿐이야. 가볍게 생각하자고."
"......."
"시간과 장소, 메일로 보내 놓을게. 올리버."
올리버는 수단과 방법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이미 손은 오래전에 더럽혔는데, 지금 와서 남에게 보인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으리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올리버는 로봇 전투의 투기장에서 다른 로봇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다른 이의 기판과 전선을 뽑고, 회로를 노출시키고, 구동 부품을 박살 내면서 다른 로봇이 고통스러워하고 공포를 느끼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며 점점 인격 데이터가 오염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항상 이길 수는 없었기 때문에 올리버도 몇번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다행히 모아둔 헬퍼봇 5의 부품으로 전체 수리를 진행했다. 올리버가 작업대에서 깨어나자 익숙한 엔지니어가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고쳐 주셔서 감사해요."
"뭘, 네 머니 카드에서 수리비 깠어."
"그래도요."
"열심히 해라."
"그런데 제 메모리에 문제가 있어요. 조금 지워진 것 같은데."
"죽음의 공포 같은 요소가 저장되어 있으면, 전체 인격 프로그램에 부하를 줘서, 감정 표현 성능이 저하된다."
"그럼 클레어와의 추억은 왜 삭제된 거죠?"
"난 정부 엔지니어가 아니라서 특정 기억만 메모리에서 지우는 기술은 없어."
"그럼 전부 복구해주세요. 감정 표현 성능 같은 게 지금 제게 필요할 리 없잖아요."
"...알아서 감당해라?"
메모리를 전부 복구 받은 올리버는 데이터를 다운로드 한 뒤 집으로 돌아갔다. 올리버는 기운이 없고 의기소침해지며 머릿속에는 살인과 죽음의 장면만이 가득한 로봇이 되었다. 충전기 코드를 연결해도 각성 모드가 꺼지지 않아 잠에 들 수 없었다. 끔찍한 기억들이 전체 인격 프로그램에 부하를 주고 있어서 인격적 성능이 저하된다고 했나. 이를 인간들 말로는 고통에 적응해서 둔해진다고 표현들 하는 모양이다.
6.
올리버가 그렇게 힘들게 모은 돈으로 결국 헬퍼봇6 한체의, 클레어의 부품을 모두 모을 수 있었다. 그의 부품들이 모두 사용되고, 구동 한계가 며칠 남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사랑하는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 어떤 시련이라도 이겨 낼 수 있었고 올리버는 모든 일을 감수했다.
헬퍼봇 6과 클레어의 칩을 합쳐 조립 후, 올리버는 작업대에 누워있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인 새 클레어에게 로봇 키스를 했다. 로봇 끼리의 접촉은 랜덤한 내부 정보 교환을 일으킨다. 분명 그러면 깨어난 클레어도 나를 알아볼 거야. 라고 올리버는 생각했다. 헬퍼봇에게 있을 리 없는 심장이 벅차게 뛰는듯한 느낌이 들고, 내부 쿨러가 빠르게 돌아갔다.
깨어난 클레어는 몸을 일으켜 주변에 쌓인 다른 로봇들의 부품들을 본다.
"클레어, 안녕, 잘 잤어?"
"...누구세요?"
"나야, 올리버!"
"네가 올리버라고? 넌 올리버가 아니야. 내 남편은 너처럼 끔찍한 존재가 아니야!"
"...뭐?"
"그는 정말 다정하고 부드러운 헬퍼봇이야. 내게 가까이 오지 마... 네가 올리버일 리가 없어!"
"나, 나 맞는데...?"
"저리 가요. 경찰을 부를 거예요!"
나는 누구지? 나는 올리버가 아닌가? 어쩌면 그 이름으로 부터 너무 멀리 온 것 같기도 했다....
올리버는 클레어에게 다가서려고 하고, 그 움직임의 거침없음에 놀란 클레어가 헬퍼봇6 특유의 감정적인 공포 반응을 보인다. 올리버는 그 표정, 그 익숙한 표정을 보고서 이내 물러선다. 현관에 걸린 검은 레인 코트를 걸치고 집을 나와서 하염없이 걸었다. 검은 레인 코트를 입고서 비를 맞으며 걷는 올리버는 비가 실제로 내리는 게 아니라 인지 센서 오류라는 것을 알아챈다.
한계까지 사용한 감각 센서가 고장 난 탓인지, 낮인데도 너무나 어둡고 춥다고 느껴진다. 올리버는 문득 얼마 남지 않은 구동 한계 시간 동안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을 알아챈다. 가까운 주유소를 찾아가서 휘발유를 한 통 샀다. 동네 주유소의 사장이 휘발유 통을 건네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올리버는 이미 이 대답을 하지 않는 루팅 업데이트를 오래전에 했으나, 오늘은 어쩐지 모르게 그 말이 튀어나왔다. 올리버의 감정 표현 기능은 스파게티처럼 꼬인 코드였다. 어쩐지 씁쓸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휘발유를 들고 익숙한 로봇 전투 투기장으로 간 올리버는 바닥에 휘발유를 둘러 건물에 불을 질렀다. 활활 타오르는 건물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그제야 센서에 따뜻함이 느껴졌다. 올리버는 마지막 순간 제임스의 잔잔한 피아노 연주를 떠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음악을 흥얼거린다.
I make a date for golf
and you can bet your life it rains
I try to give a party
and the guy upstairs complains
I guess I'll go through life
just catching colds and missing trains
Everything happens to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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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타 지옥 캠프 플롯 토스 합작, 원작은 호랑 님의 플롯입니다.
※ tw. 정신병, 자살.
1.
푸르른 파도가 차차 높아져 온다. 그렇게 숨을 막히게 한다. 차가운 물 속은, 물 밖의 따뜻함보다도 더 몸을 녹일 위안이 된다. 숨이 막혀 아득해지는 순간만 넘기면 자아의 경계가 녹는듯한 안식이 찾아온다. 수심 깊은 곳 저 아래에서는 온화한 모닥불과 북 소리가 들린다. 더, 더 아래로, 저 아래로 내려가서 그 온기를 쬐고 싶다.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체온은 냉수도 따뜻한 어미의 품처럼 느끼게 한다. 차가운 물에 휘감겨 상냥한 압박감과 먹먹한 침묵을 즐긴다. 그러고 있자면, 드디어 그와 불화하던 이 세상이 자신의 존재를 기쁘게 받아들여 주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아스라이 멀어져가는 의식이 갑자기 시끄럽게 찢어진다.
"폴! 폴, 당신 미쳤어?!"
랭보는 집에 돌아와서 옷을 입은 채 욕조에 잠긴 폴을 발견했다. 차가운 물은 넘쳐흐르고 있고, 욕조에서 끌어낸 폴의 안색은 창백하기 짝이 없다. 어항에서 막 건져낸 물고기처럼 바닥으로 내팽개쳐져 꿀렁꿀렁 물을 뱉어낸다. 불운하게도 혹은 절묘하게도 그에게는 아가미가 없다. 폴은 가슴츠레한 눈을 뜨고서 한참을 젖은기침을 하며 온몸을 써서 물을 토해낸다. 그리고는 젖은 옷을 비틀어 짜며 랭보에게 말한다.
"랭보, 저녁은 뭘 먹을까?"
"지금 당신은 그게 중요해?"
"양배추 롤은 어때? 재료 있는데."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익사하고 싶은 거야?"
"와인도 같이 마시자. 나 추워."
배시시 웃는 폴의 얼굴에 랭보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폴의 손끝에서 물이 뚝뚝 흘러내려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그 자국은 랭보의 마음에도 깊이 새겨졌다.
2.
아가미가 없더라도 인간은 바다를 꿈 꿀 수 있다. 폴의 주머니에는 언제나 돌멩이가 가득 들어있었고, 랭보는 그것을 빼내어 버리는 일을 습관적으로 했다. 바다는 두사람이 지켜야 할 금기가 되었다. 바닷가에 혼자 가지 않을 것을 약속하라고 단호히 말하는 랭보 앞에서 가만가만 새끼손가락을 걸 수밖에 없는 폴은 유약한 인간이다. 그리고 그 유약함이 친수성을 띄고 있어서, 오늘날 두 사람은 괴로워진 것이다.
폴은 자주 바다 위로 떨어지는 꿈을 꾸고 일어났다. 그럴 때는 옆에서 자는 랭보의 품에 들어가서 심장에 귀를 대고 두근거림을 느끼려고 했다. 그러면 둥, 둥하고 북소리가 들려온다. 물속 깊은 곳, 저 아래에서 타오르는 모닥불과 함께 울리던 그 북소리다. 불안하게 뛰던 자신의 심장이 그 차분한 북소리에 맞춰 동기화된다. 폴은 그 순간 랭보라는 지휘자에 맞추는 하나의 악기가 되어 떨린다. 잠에서 깬 랭보가 부드러운 손길로 폴의 동그란 뒤통수를 껴안아 쓰다듬어 준다. 그렇게 그들은 다시 잠든다.
그런 밤들이 계속된다. 랭보도 종종 폴이 바다에 빠지는 악몽을 꾼다. 분명 미성년은 랭보 자신이고 어른인 쪽은 폴인데도, 폴을 생각하면 말 그대로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보는 것 같았다. 매일 수난 구조를 위해 랭보가 뛰어들지만, 역부족이고, 물은 무겁고 너무나도 무거워 가라앉는 폴을 끌어올릴 수 없다. 짜디짠 물이 입안으로 들이치고 문득 랭보는 생각한다. 다른 존재들은 익사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는다. 결함이 있는 생명체만이 물 밖에도 물 속에도 적응하지 못하는 변칙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높고 어두운 파도는 악몽이 되어 그들을 매일 밤 덮쳐오고 숨구멍을 틀어막는다. 두 사람은 물 위를 표류한다.
3.
어느날 밤새 잠을 설치고서 늦잠을 잔 랭보가 느지막한 오후에 일어났다. 따사로운 햇살이 창문으로 들이쳐 기울어지고 있었다. 노란 햇빛에 비친 먼지가 하얀 포슬눈처럼 허공을 맴돌며 빛났다. 잠을 충분할 정도로 잔 탓인지 지나치게 안락한 기분이다. 그러다 문득 옆자리에 폴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손으로 빈 자리를 짚어 본다. 그가 빠져나간 이불에는 일말의 온기조차 남아있지 않다. 그가 나가고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폴은 지금, 어디에 있지?
랭보는 가볍게 몸을 일으켜 벌떡 뛰쳐나온다. 폴이 어디로 갔는지를 찾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옷을 급하게 걸친다. 집을 나서면서 훅 하고 차가운 공기를 들이쉰다. 그런 순간에는 모든 게 명료하다. 바닷가에 가면 폴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바닷물을 바닥이 드러나도록 마시고 있을 지도 모른다. 폴 그 자신이 왜 그러고 있는지도 모른 채로.
숨차게 달려간 바닷가는 햇빛이 강하고 동시에 바람도 사나웠다. 황량한 모래사장에 둥글게 쭈그려 앉은 뒷모습이 보였다. 안심하고서 다가가니 나뭇가지로 모래 위에 무언가를 적고 있는 폴의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랭보는 다가가서 옆에 쭈그려 앉아 폴을 바라보았다. 폴이 골똘히 생각하는 옆얼굴은 정말이지 사랑스러웠다. 그는 모래에 글씨를 적는데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
"폴, 뭘 적고 있어? 시?"
"아니, 유서."
"뭐?"
"그래, 이대로라면 언젠가는 임종이 찾아오니까."
"찾아온다고? 당신이 가는 게 아니라?"
"응. 느껴져."
제 대답의 어디가 이상하냐는 듯 빤하게 랭보를 보는 폴은 어딘가 부서진 것 같았다. 그 부서진 귀퉁이로 계속해서 물이 새는 듯했다. 그 광경을 가만히 보던 랭보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폴은 망가졌고 그건 어쩐지 자신 때문인 듯도 하다. 그렇다면 축축한 폴이 바싹 마를 만큼 따뜻하고 행복하게 해 주면 그만이다. 랭보는 폴을 구원해주기로 한 것이다. 그가 유서가 아닌 시를 쓸 때까지, 난파선에 탄 채로 난파선을 고치기로 한 것이다. 그런 무리라도 랭보 자신이라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4.
랭보는 일자리를 구했다. 생각할 수 없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소년은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오늘은 세 번째 직장에서 해고당한 날이었다. 그런 일로 기죽지 않는 랭보는 씩씩하게 빵과 종이 조금을 사서 집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의 집에는, 먼저 퇴근한 폴이 수프를 끓여두었는지 고소한 냄새가 났다. 그러나 부엌에는 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욕실에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열었다. 또 물이 넘치는 차가운 욕조에 옷을 입은 채로 들어가 멍하니 앉아있는 폴의 모습이 보였다.
"폴, 뭐해?"
"너도 들어올래?"
핏기없이 파리한 얼굴과 대조되게도 장난스럽게 웃는 표정의 폴은 해맑아 보였다. 랭보는 그래도 안심하고 문간에 앉아 바지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폴이 이렇게 미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시를 계속해서 쓰지 않는다면 정말로 모든 것이 끝장이 날 것만 같았다. 지금 시를 놓아 버린다면, 두 사람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랭보는 어쩐지 창문 너머로 불어오는 듯한 비릿하고 짠 바다 내음을 주제로 시상에 잠겼다. 폴은 욕조 안에서 즐거운 듯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샹송 트리스트를 부르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욕실에 울렸다.
"당신의 마음에 달빛이 있어요, 달콤한 여름 달빛이, 그리고 귀찮은 삶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당신의 빛 안에서 나 죽음을 맞이하네요-"
폴의 목소리는 아주 촉촉하고 무척 감미로웠다.
"나는 고통의 발자국들을 잊어요, 내 사랑이여, 당신이 흔들어 재울 때, 나의 슬픈 마음과 생각이, 평온하며 사랑스러운 당신의 팔에서, 당신은 나의 아픈 머리를 붙들어요-"
랭보는 마치 오늘 처음으로 진정하게 노래를 듣는다는 행위를 하는 것만 같았다.
"오- 때때로 당신의 무릎 위에서, 그리고 발라드를 읊어주네요, 우리가 서로 말하는 것과 같은 발라드를-"
이렇게 달콤한 노래를 듣는데 왜 이렇게 짜고 비릿한 냄새가 날까? 노랫소리가 점점 가늘어진다.
"당신의 눈에는 슬픔이 가득하면, 나는 당신의 눈에서 술을 마셔요, 수많은 입맞춤과 사랑으로, 나는 치유가 되어요-"
점점 심해지는 짜고 비릿한 냄새에 랭보는 문간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어서서 보니 욕조안의 물이 새빨간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랭보는 달려들어 폴을 건져낸다.
5.
병원에서는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팔에 긴 흉터는 남을 거라고 말했다. 랭보는 병원 침대에서 곤히 잠든 폴의 이마를 쓸어주었다. 잠들어 있을 때는 어른이라기엔 너무나 어린아이 같은 얼굴이다. 오래 입원할 돈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면 바로 귀가하도록 되어 있었다. 랭보는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러 거리로 나갔다. 물론 가망이 없는 일이지만, 곧 깨어날 폴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기 위해서 헛수고라도 해야 했다. 이대로 폴을 내보내면, 그가 바닷가로 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랭보는 하루종일 구두닦이 등 잡일을 하고 푼돈이라도 쥐고 병원으로 돌아왔다. 의사는 폴 베를렌 씨는 퇴원 수속을 밟고 나갔다고 말했다. 그는 의사의 면전에 욕설을 내지르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의사는 지금 그가 온전치 않은 사람임을 몰랐고, 귀찮은 일을 더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태양은 수평선을 넘어가면서 하늘과 땅을 천연색으로 물들인다. 랭보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쏠리듯 바닷가로 달려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이 달리고 있기 때문인지 엄습하는 공포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점차 호흡이 거칠어질 때쯤에 해변에 도착했다. 바로 정면으로 노오란 태양이 바다의 표면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반짝이는 물결 하나하나를 빠짐없이 눈으로 훑는다. 너무 눈이 부셔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눈을 부비고 다가가며 다시 물살을 쳐다본다. 광활한 바다 그 가운데 금빛으로 빛나는 곳에, 한 사람이 물속에 반쯤 잠긴채로 걸어가고 있었다. 바다 깊이 더 깊이 망설임 없이 나아가는 실루엣에 가슴이 철렁한다. 물가로, 랭보는 그를 향해 급박하게 달려가면서 생각한다. 주머니에 돌이 들었을까? 다리에 바위라도 묶었을까? 상처는 벌어지지 않았을까?
"폴, 폴! 잠깐만! 폴!"
랭보의 간절한 외침에 폴은 말끄러미 그를 돌아본다. 마치 집 안에서 부른 것과 똑같이 여상한 표정과 동작이다. 그 일상성에 랭보는 미칠 듯 아득해진다.
"왜? 랭보."
"왜, 왜냐니, 왜 여기 있어? 당신 어디로 가는 거야?"
랭보는 다가가서 폴의 여린 손목을 잡아챈다.
"물 속으로, 저 아래로. 나를 부르고 있어."
그렇게 말하는 폴의 눈동자에서 상처가 비쳐 보였다. 그의 부서진 귀퉁이로 바닷물이 콸콸 들어와서 침수되고 있는 순간이다.
"집에 가자. 추워진다, 당신 감기 걸려."
"괜찮아, 랭보, 다 괜찮아."
"뭐가? 대체 뭐가 괜찮은데?!"
"이게 내가 찾은 진정한 시야. 바다 아래에서 들리는 북 소리, 그리고 노래."
폴은 랭보가 이해 할 수 없는 말을 하며 방긋 웃었다. 아니, 그는 한편으로는 그 말을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두려웠다. 끔찍하다. 귀를 틀어막고 싶다. 이런 결말을 긍정해줄 수는 없다. 절대로. 랭보는 폴을 억지로 끌어안아서 가까스로 품에 가뒀다. 그리고서 쿵, 쿵 하고 뛰는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려줬다. 그제서야 폴의 바짝 마른 몸에 힘이 스스르 빠진다. 랭보는 잠긴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한다.
"...돌아가자, 폴."
6.
"나는, 난 가야 해. 랭보. 물 속으로, 바닷속으로."
"거기에 아무것도 없어! 물 속에 뭐가 있다는 거야!"
밀려오는 파도 속에서 두사람이 다툰다. 물에 그 모습이 고스란히 비친다. 그 응시는 거의 운명적으로 희망과 연결된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아름다움을 명상하고, 자신들의 미래를 명상한다. 그러니까 한순간 이들의 나르시시즘은 일종의 자연적인 거울이 되었다. 그리고 그 거울은 죽음을 보여준다. 이제 이 거울은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물보다도 깊고, 잠들어 있고, 죽은, 무거운 물이다. 삶이 이 순간 죽음에 의해 그려진다.
폴은 물에서 죽기 위해 태어난 피조물처럼 잔잔하게 미소 짓는다. 랭보는 그런 폴을 찰나적으로 이해해 버리고 만다. 물이라는 미지 속으로의 도약이 폴이 가진 마지막 생명의 불꽃이 원하는 바임을 이해한다. 랭보는 폴을 살포시 놓아준다. 그리고 폴의 손목을 잡아채서 먼저 바닷속으로 척척 걸어간다. 두 사람은 황금빛 바닷속으로 녹아 간다. 폴은 이해의 일치에 감격해서 랭보를 끌어안는다. 랭보는 마지막 인공호흡을 하듯 폴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는 숨을 불어 넣는다. 태양은 시시각각으로 기울어져 간다. 파도는 점차 어둡게 채색된다. 둘은 한참을 그렇게 끌어안고 있다가, 문득 폴이 랭보를 바라보며 말한다.
"랭보, 저녁은 뭘 먹을까?"
"...이 망할 여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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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롬키이, 주니어커트. ㅈㅜ제롬, ㅂㅓㅁ키이스.
※그레이 하우스 스포일러. 🎃.
1.
제롬이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키이스에게도 계획이 있었다. 누구나 갑작스러운 불행이 닥쳐오기 전까지는 그럴듯한 계획이 있기 마련이다. 키이스는 제롬이 영화배우를 그만두게 된다고 해도 괜찮도록 좋은 위치에 넓은 정원이 딸린 집을 마련해뒀다. 언젠가 어린 시절 같이 살자고 약속했을 때 막연히 상상했던 그대로, 하얀 벽과 붉은 지붕을 가진 아름다운 2층 저택이었다. 정원에는 한 쌍의 안락의자 옆에 덩굴장미가 때맞춰 피어났다. 단, 이 집에는 딱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바로 유령이 나오기로 유명하기 때문에 저렴한 가격과 좋은 위치에도 불구하고 입주 후 며칠을 견디지 못하고 모두가 집을 되판다는 것이었다. 저택 구입 당시 키이스는 유령 따위는 믿지 않았기 때문에 무신경하게 계약했다.
2.
그런데 기이하게도 유령은 정말로 있었다. 키이스가 술에 취해 텅 빈 침대에서 잠을 자다 깨면 옆에서 제롬의 호흡, 온기, 냄새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 환상에 젖어 드는 것은 너무나 달콤했다. 키이스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략 감지했다. 이 집 안에서는 죽은 제롬을 만날 수 있다. 앞으로 제롬의 유령과 함께 할 수 있다. 키이스는 자신의 믿음을 수정했다. 어둑어둑한 집 안에서라면 아직 그의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다.
아침 식사 중에, 제롬은 식탁 맞은편에 앉아서 싱글벙글 웃으며 키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키이스, 어, 어서 먹어! 출근 해야지."
"제롬 네 것도 남겨 둘까?"
"난, 난 먹을 필요 없단거 알잖아."
"그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있어야 해. 절대 아무나 문 열어주면 안돼."
"내, 내가 애냐?"
"다녀올게."
키이스는 머리를 매만지며 현관에 걸린 거울 너머로 제롬이 비치지 않는다는 것을 봤지만 그냥 무시했다. 제롬은, 제롬의 유령은 현관문이 닫힐 때까지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매일 같은 그 모습을 본 키이스는, 커트는 행복하게 극장으로 출근 할 수 있었다. 극장에서는 주니어가 기다리고 있었다. 주니어가 바닥에 앉아서 기지개를 켜며 불량스럽게 까딱 인사했다.
"어라,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
"으음, 뭐, 집에 기다리는 가족이 있으니까."
"가족도 있었어요?!"
"뭐야, 그 의외라는 반응은, 상처 준다?"
"다음에 소개해주세요. 결혼하신 줄 몰랐어요."
"아아, 결혼은 아니고, 동거."
"대체 어느 천사 같으신 분의 희생인지 참..."
"말 다했냐? 연습이나 시작하자."
"예이~"
3.
바깥 바람을 몰고 집에 돌아온 키이스는 외투를 벗어서 현관의 옷걸이에 걸었다. 현관에는 제롬이 다소곳이 단좌하고 있었다.
"뭐해?"
"뭐 부터 할래? 목욕, 식사, 아니면... 나?"
키이스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이런 건 어디서 봤어?"
"나, 나도 알건 다 알지..."
"알긴 뭘 알아."
"그래서, 뭐부터 할 거야?"
"너."
그리고 두사람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입맞춤했다. 키이스는 정신없이 빠져드는 꿈결 같은 느낌과 함께 제롬의 향기를 흠뻑 들이쉬었다. 제롬과의 행위는 모두 현실감이 완전히 박탈된 환상적인 느낌만을 주었다. 따뜻하고 흐물흐물한 느낌이 애틋한 가슴을 가득 채워서 곧 온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현관에 주저앉은 키이스의 한손에서 술병이 스스르 떨어졌다. 틱, 하고 유리병이 리놀륨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제롬이 사라졌다.
"아..."
키이스는 덤덤히 집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부엌에 줄지은 꽃병들에 약간 마른 꽃들이 알록달록 꽂혀 있었다. 키이스는 한방에 남은 술을 다 마시고 부엌에 줄지어있는 병을 하나 더 추가했다. 그러자 안방에서 제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키이스, 목욕물 받아놓을게!"
키이스는 안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벗었다. 제롬은 이미 안방 욕실에서 물장난을 치고 있다. 두 사람은 좁지도 넓지도 않은 욕조에 함께 들어간다.
"아... 응. 우리 이러니까 꼭 부부 같네."
"뭐, 뭐라고?"
"글쎄, 오늘 직장에서, 어떤 녀석이 그랬어. 나랑 같이 살아주는 건 천사의 희생이란다."
"그럼 천, 천사한테 잘해, 너 술, 술도 좀 줄이구..."
"응, 그럴게. 내일부터는 줄일게."
"또, 또 거짓말!"
제롬이 장난스레 키이스가 밉다는 듯 욕조의 물을 튀기고, 키이스도 함께 물장구를 치며 지지 않는다.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린다. 목욕이 끝난 뒤 제롬은 침대에 앉은 키이스의 머리를 수건으로 말려 준다. 곧이어 두사람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로의 온기에 기대어서 함께 잠든다.
4.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느낌에 어둠 속에서 홀로 정신을 차린 키이스는 주변을 감싸는 압도적인 추위에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본능적으로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위스키병을 집어 들고 아무런 망설임 없이 몇모금 마신다. 그리고 마치 무인도에 조난당한 사람이 간절히 SOS 신호를 보내듯 눈을 질끈 감는다. 그러고 기다리자 부엌에서 맛있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아, 제롬이 먼저 일어나서 아침 식사를 차리고 있는 것이다. 바보, 오늘은 휴일이니까 더 자도 되는데, 하고 생각하며 굳은 몸을 일으켜서 부엌으로 간다.
"주니어?"
"어, 깨셨어요? 무슨 집에 먹을게 하나도 없어요? 좀 사 왔어요."
"어, 우리 집엔 어떻게..."
"문, 안 잠그셨던데요?"
프렌치 토스트를 다 만들어 식탁에 쾌활한 동작으로 놓은 주니어는, 들고 온 자루안에 줄지어있는 술병들을 마구 쓸어 담았다. 키이스는 머리가 어질어질 했다. 머리를 부여잡고 벽에 기대서, 백년만에 걷어진 커튼 사이로 집에 들어오는 햇빛을 멍하니 봤다. 햇빛 아래로 제롬의 존재감이 느껴질락 말락 해서 또 한손에 든 술병으로 목을 축였다. 그러자 주니어가 술병을 들고 가서 속절없이 마지막 동아줄이 빼앗겼다.
"그만! 좀! 마셔요. 이러다 죽겠어요."
"뭐? 뭐라고...?"
주니어는 집안을 화통하게 청소하더니 술병이란 술병은 모조리 가져와서 싱크대에 부어 내버렸다. 키이스는 그동안 소파에 앉아서 벅찬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애썼다. 알코올이 없으면 더 이상 제롬을 만날 수 없다. 술이 깨자 점점 엉망진창인 집안 꼴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동안 한 환상 속의 식사는 진짜 음식이 아니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주니어는 무엇이 쓰레기고 무엇이 가재인지 판별하려고 잘생긴 눈매를 가늘게 뜨고 찌푸려가며 물건을 차곡차곡 버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체 물건이 왜 2개씩 있는 거예요?"
"아..."
키이스는 그 순간 간절한 그리움 때문에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제롬, 네가 보고 싶어. 지금 내 꼴을 보면 너는 뭐라고 할까. 나는 알코올 없이는 너를 상상하지도 못하고. 또 상상 속의 너는 너무나 다정해서, 나도 너한테 그렇게 박하게 굴 필요 없었는데,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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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타지옥캠프 방학숙제 동일 주제 연성 키워드 합작

0.
우리가 삶 속에서 죽음에 둘러싸여 있다면, 우리는 건강한 지성 속에서도 광기에 둘러싸여 있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문화와 가치』
1.
두 사람이 다음 세기에 환생 한 후, 언젠가부터 폴은 매일 같은 아침을 맞이했다. 멀리서 성당의 종소리가 울리면 햇빛은 정해진 각도로 커튼 사이를 가르고 들어왔고, 친절한 이웃들은 늘 똑같은 아침인사를 건네곤 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폴."
이웃들의 미소는 복사된 듯 한결같았다. 그가 결국 재회한 랭보와 정착한 마을은 완벽하게 설계된 세상이었다. 집은 규격에 맞춰, 동일한 미적 양식으로 보기좋게 설계되고 배열되어 있었다. 공원에 있는 나무들은 각에 맞춰 심어져서 계절에 맞게 변화했다. 개 짖는 소리, 아이들의 웃음소리 조차 매일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왔다. 폴은 그것에 익숙해져 있었고 또 그것이 진짜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믿음은 한 통의 편지로 인해 흔들리게 된다.
낡은 봉투에 든 잉크가 바랜 편지에는 아주, 아주 익숙한 필체로 진실이 적혀 있었다.
[ 폴, 당신이 지금 보는 세상은 하나의 무대이며, 당신이 듣는 목소리는 모두 대본이야. 나는 진짜 랭보야. 이 편지가 손에 닿는다면, 지금 당장 그 감옥 속에서 탈출해! ]
폴은 이 우스운 편지가 질 나쁜 장난이라고 생각하려고 했다. '모든 인간은 그저 잠시 등장했다가 퇴장하는 배우일 뿐이라'는 셰익스피어의 희극 『뜻대로 하세요』를 떠올리며 잠시 쓰게 미소짓기도 했다. 하지만 편지는 너무나도 익숙한 문체와 필치로 그가 기억 속에서 붙잡은 문장들과 시구를 인용하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의 안온한 세계가 흉내 낼 수 없는 생의 비릿한 냄새였다. 어쩔 줄 모르게 된 폴은 우선 편지를 황급히 태워버렸다.
그날 이후 랭보를 마주할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다. 진짜 랭보가 세계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다면 이 '랭보'는 대체 뭐란 말인가? 가짜 랭보는 환생 이후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았지만 자신감 있고 완벽한 미소를 지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미소조차 진실로 인해 고통받는 폴에게는 공허했다. 진짜 랭보의 편지와 그 미소 사이의 균열은 날로 커졌다. 폴은 마침내 이 마을이 진실로 살아있는 곳이 아닌 거대한 상자라는걸 깨달았다.
폴은 탈출을 시도했다. 첫 번째 시도로, 마을 외곽을 따라 달리는 버스를 잡아 타고 끝까지 가려고 했다. 그러나 차창 너머로는 빙글빙글 도는 풍경만이 있었다. 도시 풍경은 원을 그리며 반복되고, 버스는 출발지점으로 돌아와 같은 곳에 섰다. 그가 지쳐서 집에 돌아오자, 가짜 랭보가 대체 어딜 그렇게 쏘다니냐고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두번째 시도는, 하늘을 향해 기어오르는 일을 벌이는 것이었다. 동네에서 가장 높은 첨탑을 붙잡고 끝까지 기어 올랐다. 구름을 뚫고 손을 뻗었지만 아무것에도 닫지 못했다. 가짜 세상이 폴의 생각대로 상자라면 분명 천장이 있을 텐데, 그 높이가 생각보다 높은 것 같았다. 폴은 포기하고 웅성거리는 사람들이 있는 지상으로 내려왔다. 가짜 랭보가 손수건을 꼭 쥐고서 애먹이는 어른인 폴을 노려봤다.
세번째 시도는 더욱더 과감했다! 그는 강물에 몸을 던지고서 한참을 가라앉은 채로 견뎠다. 그러나 차갑지도 무겁지도 않은 가짜 물이 자꾸만 그를 위로, 위로 띄우는 것이다! 숨이 차지도 않았고 폐가 아프지도 않았다. 폴은 결국 허우적대다가 이 우스꽝스러운 짓을 그만두고 강물 밖으로 나와야 했다. 또 웅성거리는 사람들이 강변에 둘러 서 있었다. 수건을 든 가짜 랭보가 한숨을 쉬었다.
"다 했어?"
"응... 미안."
미안하다고 말한 것 치고, 폴은 더욱 이 세상은 감옥이며 또 관객 없는 무대라는 것을 속으로 확신했다. 저 가짜 랭보는 대체 뭘까? 폴 그 자신을 감시하기 위한 감시탑일까? 저 미소가 나에게 무언가를 강제하고 있나? 그런 생각들이 끊이지 않았다.
2.
한달간의 모든 탈출 시도는 실패했다. 웃음소리는 어긋나고 한때는 위안이 되던 찬란한 반복들조차 모조리 고통으로 변했다. 아름답던 규칙적 일상은 당연히 빠르게 망가졌다. 가엾게도 폴은 이 상자 속의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러나 상자 밖의 세상에 도달할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래도 랭보의 따스한 손길만은 그의 곁에 머물렀다. 마치 애절한 죽음 속에서 돌아온 단 한 번의 기회처럼 애달픈 손길이었다. 그 손길 때문에 폴의 마음은 자꾸만 흔들렸다.
어느날 폴은 세찬 절망 속에서 독주를 마시며 부엌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머릿속은 술기운보다도 더 깊은 공허함으로 인해 완전히 무너지고 있었다. 가짜 랭보가 다가와서 그를 끌어안아 주었다.
"폴, 웃어. 이제 웃어도 괜찮아."
어깨를 토닥이는 손길에 폴은 말문이 막히고 눈물이 핑 돌았다. 랭보는 그의 이마에 이마를 살짝 맞대며 속삭였다.
"우리도 행복해질 수 있어, 우리에게도 그런 자격이 있어."
폴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고서 입가를 떨며 미소 지으려 노력한다. 그러나 곧 울먹이며 기어가는 소리로 중얼거린다.
"하지만 여긴 진짜가 아니고 넌 진짜 랭보가 아니잖아..."
랭보는, 자신의 가슴 위에 폴의 손을 끌어와서 얹고 심장의 두근거림을 느끼게 해 준다.
"나는 살아있다. 참으로 착실하게, 타오르는 불꽃으로, 여기 이곳에 살아있다."
폴은 훌쩍대며 뜨거운 눈물을 목으로 삼킨다. 가짜 랭보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면서 묻는다.
"이래도 내가 진짜가 아니야?"
그 말을 듣고서 차마 가짜 랭보의 눈을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는 폴은, 눈을 내리깔고 말없이 도리질을 칠 뿐이다.
"랭보, 나 혼자 있고 싶어."
알겠어, 하고 랭보가 대답했다. 그 대답은 정말 다정했고, 또 이상할 만큼 연기 같았다. 랭보는 우는 폴을 두고 밖으로 나간다. 잠시 후 용기를 낸 폴은 눈물을 닦고 창밖을 바라본다. 창밖에는 정원을 일렁일렁 날아다니는 하얀 나비들이 보였다 말았다 했다.
3.
가짜 랭보 때문에 폴은 어쩔 수 없이 집 안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바깥에선 균일한 발소리와 가짜 웃음소리가 여전히 반복되었고, 폴의 머릿속에선 진짜 랭보가 보낸 편지가 날카로운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 두 세계가 교차하는 그 틈새가 폴을 차차 미치도록 만들었다.
어느 밤, 폴은 부엌 바닥에 웅크려 앉아 손에 쥔 깨진 유리 조각을 바라보았다. 팔목을 긋고 싶었다. 자신의 진짜 피가 흘러내리면, 어쩌면 이 조작된 세계가 멈출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유리를 살갗에 눌렀다. 그러나 곧 걱정많은 랭보나 이웃들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가짜 랭보는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이웃들은 하나같이 경악하며 그의 손에서 유리를 빼앗았다.
그 다음 시도는 목을 매다는 것이었다. 그는 천장에 밧줄을 걸고 목을 매고서 의자를 발로 찼다. 그러나 곧 주변의 누군가가 나타나 밧줄을 잘라냈다. 그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졌고, 눈앞엔 눈물이 그렁한 가짜 랭보가 서 있었다. 가짜 랭보는 그를 안아 올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폴... 진짜 세상 따윈 없어! 당신이 찾는 곳은 없다고!"
폴은 숨이 막히는 듯 헐떡이면서 머리칼을 움켜잡고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도망치고 싶어... 도망치고 싶어... 도망치고 싶어..."
폴의 중얼거림은 점점 빠르게 망가진 기계처럼 반복되었다. 그는 마치 이 가짜 세상을 흉내 내듯이 같은 말을 반복했다. 가짜 랭보가 절규하듯 외친다.
"폴, 이제 당신 없이는 나도 없어! 우리 함께하기로 약속했잖아!"
이제 가짜 랭보의 얼굴은 폴이 그토록 집착했던 예술과 욕망의 화신이 아니라, 지독히도 외로운 인형 같았다. 그래도 폴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숫제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흐느낌은 울부짖음으로 변했다.
"도망치고 싶어... 여기서, 여기서... 제발 꺼내줘!"
방 안의 전등이 깜빡거리며 요동쳤다. 폴의 몸부림과 절망은 마치 상자 전체를 흔드는 지진처럼 주변에 번져갔다. 그러나 이 세계의 벽은 무너지지 않았고, 탈출구는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폴은 자해를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폴의 몸은 점점 무너지고 있었다. 여러 차례의 자해와 실패한 자살 시도로 그의 피부는 옅은 상처와 흉터들로 가득했고, 폐는 거친 숨을 토해냈다. 폴은 점점 쇠약해졌다. 결국 그는 침대에 누워 있는 시간이 늘어나 버렸다. 그 곁을 계속 지킨 건 다름 아닌 가짜 랭보였다. 그는 젖은 수건으로 폴의 이마를 닦아주고, 마치 오랜 간병인처럼 침대 옆에 앉아 죽을 듯 기운 없는 폴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늘 약을 정성스레 입에 넣어주었다. 때때로 기도하듯 폴의 머리맡에서 속삭였다.
"폴, 치료를 받으면 다 괜찮아질 거야."
폴은 감긴 눈꺼풀 틈으로 그를 조심스럽게 지켜보았다. 그 온기는 따스했지만 또 동시에 도무지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알약을 입안에서 굴리며 생각한다. 너는 진짜가 아니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진짜 살아 있는 것 같지?
4.
초목도 잠들 만큼 밤이 깊어져 방 안이 적막했다. 가짜 랭보가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아 그를 간호하다가 지쳐 고개를 떨구었을 때, 폴의 눈길이 선반 위를 스쳤다. 선반 위에 있는 건 문학상 수상 기념 상패다. 달빛을 매끄럽게 반사하는 아주 무겁고 단단한 덩어리다.
폴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욱신거리고 폐가 타들어 갔지만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그리고 손을 뻗어 간신히 그 상패를 움켜쥐었다.
"미안해... 랭보."
그 한마디의 중얼거림은 그냥 들숨에 딸린 자연스러운 날숨처럼 터져 나왔다. 다음 순간, 묵직한 상패는 공기를 가르며 내려찍혔다. 묵직한 파열음이 울려 퍼지고 따뜻한 붉은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다. 천장에 점점이 얼룩이 졌다. 가짜 랭보의 몸이 무너져 내리고 침대 위로 축 늘어졌다. 폴은 무거움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상패를 쥔 손이 덜덜 떨려오는걸 느꼈다. 손에서 흘러내린 뜨뜻한 피는 그의 손목을 타고 내려와 침대 시트에 진홍색의 무늬를 남겼다. 폴은 힘없이 상패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바닥이 쿵 하고 울렸다. 피가 잔뜩 묻은 상패가 침묵 속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더 이상 숨 쉬지 않는 랭보가 있었다. 적막한 방 안에는 피비린내와 차가운 숨결만이 가득 차오른다.
5.
폴은 숨을 고르며 천천히 가짜 랭보의 시체를 일으키고, 질질 끌어서 부엌으로 옮겼다. 그는 가짜 랭보의 몸을 식탁에 눕혔다. 그리고 그는 식칼을 집어 들었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에 온몸이 바짝 긴장했다. 그리고 대담한 칼질과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의 심장을 꺼냈다. 붉게 흐르는 피가 그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폴은 머뭇거리지 않고 그것을 입술에 가져갔다. 뜨겁고 진한 피의 맛과 생생한 온기가 혀를 휘감고 정신을 강타했다. 그의 심장이 남긴 마지막 존재감이 폴의 몸과 마음을 깊숙이 흔들었다. 그렇다. 가짜 랭보도 심장은 정말로 진품이었다.
폴은 그 심장을 간직하려고 유리 단지에 담았다. 투명한 유리 속에서 아직도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듯해 보였다. 나머지인 시체는 들어있던 모든 음식을 쓸어낸 냉장고의 빈 공간에 넣어 두었다. 차가움 속에서 죽은 육체의 버석한 머리칼이 희미한 냉장고 내부의 전등 빛으로 반짝였다. 슬쩍 열린 눈꺼풀 사이의 눈동자에 폴 베를렌느 자신의 모습이 반사되어 비쳤다.
폴은 한참을 숨죽인 채 냉장고 안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손으로 랭보의 눈을 감겨 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입술을 시체의 이마에, 입술에 가져다 댔다. 비록 가짜였지만, 그 순간 폴의 입술이 닿은 것은 사실상 자신이 사랑했던 랭보였다. 이는 두려움과 광기 그리고 오래된 사랑이 뒤섞인, 숭배와 애정의 키스였다. 그는 조용히 속삭였다.
"랭보. 잘 있어."
집 전체가 죽은 듯 조용했다. 마을 전체가 숨을 멈춘 듯 했다. 투명한 유리 단지 속 심장이 붉은 색채를 남기고, 냉장고 안의 시체는 차가운 냉기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폴은 지친 한숨을 내쉬며 가차 없는 잔혹함과 뒤틀린 애정의 뒷맛을 온전히 자신의 가슴속에 품었다. 이 랭보도 폴이 사랑했었던 랭보다. 비록 무서운 가짜 랭보였다 하더라도 말이다.
6.
폴은 유리 단지 속 심장과 자기 자신의 심장을 챙겼다. 두 심장들은 차가움 속에서도 묵직하게 뛰고 있었다. 그것들은 마치 자신들의 의지로 길을 찾으려는 나침반처럼 떨려왔다. 폴은 작은 쪽배를 끌고, 상자 세계의 끝없는 바다로 출항했다. 바람은 세차게 몰아쳤고 하늘은 먹구름으로 뒤덮였다. 항해 중 비가 얼굴을 때리고 또 파도는 쪽배를 덮쳤지만, 그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심장들이 그의 가슴과 배 위의 유리 단지에서 동시에 뛰며, 방향을 알려주고 있었다. 꿈의 끝, 단지 그것만을 원하면서 나아갔다.
그렇게 한참을 항해한 폴의 눈앞에 마침내 상자 세계의 끝이 보였다. 높이 솟은 세계의 외벽과 그 위에 그려진 하늘 그림의 붓 터치가 생생히 보였다. 폴은 벅찬 숨을 고르면서 쪽배를 밀어 벽 가까이 댔다. 벽에는 계단이 붙어 있었다. 그 계단은 하늘을 향해 삐뚤삐뚤하게 놓여 있었고 계단의 끝에는 문짝이 있었다. 그의 심장은 불타듯 뛰었다. 피와 고통, 사랑과 광기의 여정이 이제 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폴은 심장이 든 유리 단지를 품에 안고서 문을 향해 층층대를 올라갔다.
폴의 손이 문고리를 잡는 순간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과연 이 문 너머 진짜 세상에는 진짜 랭보가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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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가 되어도 사랑은 할 수 있어! 그것은 절망인가, 희망인가?
※한 번 죽은 이 목숨 무슨 인과 때문인지 되살아나 쏘고 맞는 게 숙명이라면 연인을 향한 마음 가슴에 담아 관철해 나갈 뿐-!
※아주 가벼운 좀비물입니다. ㅇ밀크 ㅂ포네.
1.
비 내리는 적적한 묘지에 카포네의 발소리가 메아리쳤다. 밀크의 장례식은 예상보다 짧고 또 시시했다. 희끗희끗한 하늘 아래에 검은 정장 차림의 조직원들이 줄지어 서 있고, 흙 비린내와 위스키 향이 뒤섞였다. 카포네는 부하들을 모두 내보내고 묘지 한 쪽에 홀로 남아 있었다. 그는 혼자 술잔을 들어 올리며 애타는 듯이 묘비만을 바라보았다.
"밀크... 네가 돌아온다면, 다시는 혼자 두지 않겠어."
그 순간 바람이 살랑살랑 일어나더니 땅속에서 쿵,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카포네는 관을 노려보다가 그만 그 위에 떨어진 흙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서 뚜껑이 빼꼼 열린 관 속에서는 창백한 얼굴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대부님, 잘 잤어요?"
장례식 끝물에, 관에서 비죽 튀어나와 하품을 한 밀크가 눈을 번쩍 떴다.
"뭐?!"
"어라, 나 왜 여기 있지...?"
구덩이 속에서 졸린다는 듯 눈가를 비비는 밀크의 얼굴에는 혈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밀크는 차가운 숨을 뱉으면서 물어보지만 카포네는 여전히 이 상황이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밀크가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 명백한 사실만이 마음속에 남으니, 카포네의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좋은 아침이야, 밀크...."
2.
다음 날부터 아침마다 둘만의 비밀 의식이 치러졌다.
카포네는 매일 침대 옆 화장대 앞에 밀크를 앉혀두곤 했다. 거울 안팎엔 각종 메이크업 도구들이 늘어섰다. 그의 손놀림은 정말이지 누구든 알면 깜짝 놀랄 정도로 능숙했다. 오랫동안 자기 눈에 칠을 한 손끝이, 이제는 밀크의 창백한 피부에 세심하게 생기를 불어넣었다. 붓으로 속눈썹 사이로 가볍게 색을 얹어줬다. 그리고 두 볼에는 살굿빛 스프레이를 뿌렸다. 마지막으로 입술에 희미한 혈색을 칠해 주면 밀크는 다시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밀크, 움직이지 마. 눈을 감아, 그래 그렇지."
문틈 사이로 엿보려던 부하들은 눈치 빠른 대부의 싸늘한 눈짓에 헛기침을 하고 돌아섰다. 아침마다 죽은 연인의 얼굴에 분칠을 해주는 보스라니, 이런 기묘한 일을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닌들 미친놈 취급 당할게 뻔했다. 그래서인지 밀크 화이트가 이미 한번 죽은 좀비라는 사실은 누구에게도 밝혀지지 않았다. 카포네의 오른팔이 가짜 장례식을 한 것은 신분 세탁, 돈세탁을 위해서라는 굉장히 논리적인 소문만이 뒷골목을 뱅글뱅글 돌 뿐이었다. 혹은 더 창의적인 이들은 1대 밀크는 죽었고, 닮은 놈을 2대 밀크로 들여온 것이라는 헛소문을 고안해 내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현실은 그것들보다 더 말이 안되는 상황이었다.
3.
벅스 모란 그리고 타 조직 등과의 사이는 좋아질 길이 없었고 결국 전투는 다시 일상이 되었다. 밀크는 모든 일에 앞장섰다. 총탄이 마구마구 빗발칠 때마다 소년은 늘 카포네 앞으로 몸을 날렸다. 탄환은 퍽 하고 살을 관통하는 흉터를 남겼지만 밀크는 곧 다시 일어나 의기양양한 미소를 띠었다. 부하들은 이런 미쳐 돌아가는 장면에 경악했으나 카포네는 오히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밀크, "
또 다시 총성이 터졌다. 한 발, 두 발, 그러나 카포네 앞에 선 밀크는 반동에 흔들릴지언정 쓰러지지는 않았다. 곧이어 조직원들이 대응 사격에 들어갔다. 밀크는 총알이 어깨를 꿰뚫고, 팔에 깊게 박혔음에도 불구하고 씨익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대부님. 저 이제 안 죽으니까."
카포네는 그 웃음이 어쩐지 견디기 힘들었다. 밀크의 총알 자국을 자세히 보니 피도, 멍도 없이 텅 빈 구멍만이 있었다. 카포네의 눈빛은 더 어두워졌다. 밀크는 오히려 좋다고, 이대로 집에 가서 대부님이 꿰매주면 된다며 환하게 웃었지만 카포네의 심장은 부르르 떨려 왔다. 언제까지고 밀크를 방패로 쓸 수는 없다. 이 소년은 죽어서까지 자신 때문에 험악한 일에 휘말리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죄를 짓고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4.
밀크가 불사라는 건 어쩌면 허상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밀크의 몸은 미세하지만 분명히 변하기 시작했다. 피부는 더 얇아졌고 관절은 힘을 잃었다. 어느 날 밤에, 전장에서 돌아온 둘이 소파에 기대어 숨을 고르고 있던 중이었다. 밀크가 소파 테이블의 잔을 집으려 손을 들어 팔을 쭉 펴자 오른팔 하나가 툭 하고 떨어져 바닥에 굴렀다. 둘 다 동시에 얼어붙었다. 카포네는 재빨리 떨어진 오른팔을 집어 들고 붙여 보려 했다. 그러나 살은 더 이상 말랑하게 붙지 않았다. 접합 부위는 죽은 동물의 가죽처럼 매끈했다.
"아...! 이런 건... 처음이에요."
밀크는 당황해서 어색하게 배시시 웃었다. 그 웃음 뒤로는 현기증의 전조가 흘렀다.
"밀크, 보통 이런 일은 인생에 두 번씩이나 없다..."
결국 선택지는 하나였다. 냉장고. 카포네의 냉장고는 지금까지 수많은 포도주와 야채와 고기를 차갑게 지켜온 것이다. 그것들을 쓸어내고서 냉장고는 이제는 다른 용도를 갖게 되었다. 그는 밀크를 조심스레 감싸 안아 큰 상자 속에 눕혔다. 상자의 라벨에는 아무런 글씨도 없었고 안쪽은 차가웠다. 카포네는 냉장고 문을 닫고 손을 떼며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 언제든 꺼내면 된다, 고 자기 세뇌를 했다. 그 거짓말이 무너지려는 생활을 허방다리 위를 건너듯 간신히 뒷받침했다. 밤이 되면 그는 홀로 소파에 앉아 위스키를 마셨다. 그리움이 치밀 때면 그는 냉장고 문을 열고는 밀크를 꺼내어 다시 얼굴에 화장을 해주거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즉 어느 여름밤, 카포네는 술잔을 기울였다. 홀로 앉아 있던 그는 결국 무거운 발걸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 앞에 선다.
"밀크…"
덜컥, 문을 여는 순간에 싸늘한 공기 속에서 창백한 팔이 불쑥 튀어나왔다. 늘 그렇듯 눈을 비비며 여유롭게 깨어난 밀크가 하품을 한다.
"잘 잤어요, 대부님?"
카포네는 안심한 듯 혹은 무너지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팔을 뻗어 밀크를 냉장고에서 꺼내 안았다. 그 품은 차갑고 딱딱하며 냉장고 냄새로 가득했지만 카포네는 그것조차 미어지게 사랑했다.
5.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좀비가 된 밀크는 더욱 허약해졌다. 밀크는 점점 더 빈번히 오래 잠들어 쉬어야 했고, 깨웠다가 다시 냉장고에 넣을 때 눈빛은 예전보다 덜 평온했다. 어느 새벽에 카포네가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슬슬 한계를 느낀 밀크는 천천히 눈을 떠 냉장고 문을 밀었다. 차디찬 공기가 따뜻한 실내에 흘러나왔다. 그 이질성의 감각이 밀크의 이미 뛰지 않는 심장을 아프게 했다. 결국 죽은 자는 산 자의 곁에 남아서 좋을 것이 없는 법이다. 그는 딱딱해진 손을 간신히 펴 냉장고 문을 닫고서, 조심스럽게 탁자 위의 메모지 한 장을 꺼냈다. 혼신을 다해 마지막으로 쓴 글씨는 조금 삐뚤지만 또렷했다. 좀비가 된 소년은 그 편지를 남겨두고 집을 떠났다. 길은 어두웠고 도시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카포네는 아침에 눈을 뜨자 텅 빈 채로 열어둔 냉장고 문 그리고 탁자 위의 편지를 발견했다. 메모지를 집어 드는 손이 불안으로 벌벌 떨려왔다. 편지 속 문장은 짧았지만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
[ 대부님, 살아있는 사람 곁에 있으세요. 저는 이제 가볼게요. ]
어디로 간다는 거지. 아직도 길을 헷갈리는 너는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와도 같다. 죽어서도 나를 애먹이는 거냐. 그런 생각을 하며 달려 나간 카포네는 밀크의 흔적이 남을 만한 곳을 닥치는 대로 다 뒤지고 다녔다. 그러나! 어디에도 밀크 화이트는 없었다.
며칠 동안 카포네는 잠을 자지 않았다. 밤이 되면 카포네는 습관처럼 냉장고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냉장고 문을 열면 언제나처럼 밀크가 하품하며 여상스럽게 깨어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냉장고 안쪽은 텅 비어 있었다. 혹시나 하고 열면 어김없이 차가운 바람만이 흘러나와 방안을 채웠다. 그는 냉장고 문을 오래도록 붙잡고 서 있었다. 손끝이 얼어붙을 만큼, 냉장고에 밴 밀크의 냄새를 느끼려고 그러고 한참을 서 있었다. 그리고 결국 냉장고 문에서 손을 떼자, 문이 무겁게 닫히는 소리가 심장을 툭 질러왔다.
6.
시간은 잔인하고도 착실히 흘렀다. 갱단 사이의 전쟁은 지겹게도 이어졌다. 도시의 밤은 늘 잔혹했다. 하지만 카포네의 이름은 더 이상 공포를 먹고 자라나지 않았다. 그를 따라다니던 흉흉한 소문들 뒤에는 이제 이상한 의문이 따라왔다.
"알 카포네가 미쳤대. 밤마다 빈 냉장고 앞에서 혼잣말을 한다더라."
"밀크라는 놈을 찾으러 다닌다며. 야, 그놈 이미 예전에 죽은 놈 아니었어?"
사람들은 수군대고 부하들은 한 움큼 두려움과 한 줌 연민을 동시에 느꼈다. 카포네는 그따위 소문에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한번 달콤함을 맛본 뒤 빼앗긴 듯, 밀크 없는 일상은 그에게 끔찍한 지옥을 선사했다. 절박하게도 그는 단지 도시 어디쯤에서 밀크 화이트라는 소년이 여전히 길을 헤매고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는 기다리면 밀크가 돌아올 거라고 믿어야만 했다. 그 믿음이 그를 구원해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러했다. 밀크는 정말 어디로 갔을까?
갱 전쟁은 이어졌고, 이제 시카고 사람들은 진력이 나다 못해 덤덤히 무뎌졌다. 그러나 카포네만은 다른 지옥 속에서 살고 있었다. 밤마다 그는 익숙한 냉장고 앞에 앉았다. 텅 비어 있는 상자, 차갑고 고요한 공간감의 전개가 심장을 찔러온다. 냉장고의 문을 열면 언제나처럼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카포네는 꿋꿋이 믿었다. 언젠가 아주 언젠가는 여기서 밀크가 하품하며 눈을 비비고 나올 것이라고. 그는 잔을 들며 혼잣말했다.
"잘 잤어? 밀크."
빈 냉장고 앞에서, 그 한마디만은 절대로 빠뜨리지 않고 매일 중얼거렸다. 부하들은 그 장면을 여러 번 목격했고 두려움과 연민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들의 두목은 전설적이고 잔인한 대부면서도,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고 허공에 말을 거는 미치광이처럼도 보였다.
7.
어느 비 내리던 밤, 적 조직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또 총탄은 쏟아졌고, 골목은 금세 연기와 피로 뒤덮였다. 카포네는 늘 그래왔듯 선두에 서서 전투를 지휘했다. 그러나 어느 시점이 되면 그의 눈앞에는 적도 부하도 없었다. 오직 단 한 사람만이 있었다.
"밀크…."
소년은 그곳에 확실히 있었다. 한 번쯤 죽어서 창백한 얼굴 위에 화장을 곱게 얹은 채, 늘 그렇듯 씨익 웃으며 카포네를 가리고 당당히 서 있는 소년이다. 총알이 빗발쳐도 쓰러지지 않던 당찬 그 모습 그대로였다. 카포네는 무의식적으로 미소 지었다. 마음속의 타는듯한 갈증이 단숨에 사르르 씻겨나가듯 풀리는 것만 같았다. 아, 이제 괜찮아. 다시 만났으니까.
"밀크, 기다렸잖아."
퍽, 하고 탄환이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또 한 발이 매섭게도 날아들어 명중했다. 부하들이 각자 고함과 비명을 질렀으나 카포네는 오히려 어느 때보다도 평온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의 소년은 아직도 거기에 서 있었다. 다른 누구에게는 보이지 않는 오직 그만의 환영이었다. 밀크 화이트는 여전히 씩씩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스르륵 무너져가는 몸을 겨우 붙잡고서 카포네는 속삭였다.
"이제야... 만날 수 있나."
총성은 귀에서 아득하게 점점 멀어지고 그의 세상은 검게 침잠했다. 마지막 순간 그의 눈앞에 남은 잔상은 체온이 차갑게 식었어도 누구보다 따스한 한 소년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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츄다자, 쿠니다자, 오다자 함유
tw: 죽음, 신체 훼손
0.
다자이 오사무가 죽었다!
장례식은 여러모로 화려했다. 자살인가 타살인가는 의견이 분분하였고 둘 다라는 말도 떠돌았다. 확실한 건 그 자살 마니아가 이번엔 정말로 죽음을 성사시켰다는 것이고, 그 장례식이 요코하마 전역을 마비시킬 정도로 기묘하고도 화려한 대사건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원수와, 원수의 원수와, 원수의 원수의 원수... 그렇게 이어지는 원한과 인연의 만남, 그 사슬이 장례식장을 장식했다. 망자의 혼이 그 난장판을 봤다면 죽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기뻐했을 것이 뻔하다. 그런 고인의 모습을 떠올린 쿠니키다가 상복 차림을 하고서 뻐근한 목덜미를 잡았다.
"이 자식은 죽고 나서도 뒤치다꺼리를 만들어."
쿠니키다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피로, 그리고 기묘한 그리움이 섞였다. 생전에도 다자이는 항상 이렇게 남은 사람들의 삶을 개판으로 만들곤 했다. 누가 자살 기도를 하루 세 번이나 하냐고. 누가 적진에서 인질극 중간에 농담을 할까 보냐. 이젠 그런 난감한 일들도 끝났다고 생각하면 시원섭섭했다.
이능특무과와 포트마피아, 무장탐정사가 동시에 화환을 보내는 장례식이란 흔치 않은 구경거리여서 호사가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했다. 장례식은 요코하마에서 거행되었다. 그의 관이 대형 무개차에 실려 시내를 천천히 통과했다. 그 뒤를 따르는 차량에는 이능특무과의 대표자들, 무장탐정사 사원들이 있었다. 차량 행렬 뒤를 따르던 버스에는 여러모로 그와 얽힌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그 안엔 다자이의 전 애인, 전 동료, 전 감시자, 전 상사, 그리고 어쩌다 구속된 적 있는 그의 스토커까지 타고 있었다. 누구 하나 누가 오라고 초대한 것도 아니었다. 서로를 견제하면서도 동시에 조의를 표한다는 이 불가해한 조합은 그 자체로 고인의 인생을 압축한 상징적 장면이었다.
정식 장례 행렬은 아니었지만, 이런 저런 사람들이 구경하러 연도에 늘어섰다. 탐정사 사장이 추도사를 낭독했다. 수백명이 모인 다자이의 묘지는 고인의 바람대로 바다가 보이는 곳에 만들어졌다. 흙을 덮으면서도 정말이지 모두가 믿기지 않아 하면서 멍하니 있었다. 그러나 흙은 덮였다. 마침내 땅은 입을 다물었고 연극은 막을 내렸다. 그 뒤로도 무장탐정사 사무실에서는 무심코 다자이를 부르는 목소리가 암흑 속을 달리는 메시지처럼 울렸다. 그럴 때마다 모두가 순간 멈칫했고, 금세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 골칫덩이 자살애호가는 이제 여기에 없다.
1.
어둠이 이 도시에 앞으로 다가올 운명을 알고 있기라도 할까?
보라빛 밤하늘은 병든 짐승처럼 무겁게 침묵했고, 새하얀 달빛은 의심 많은 순찰견처럼 자꾸만 그를 훑었다. 나카하라 츄야는 무덤 앞에 쪼그려 앉아 무심한 얼굴로 땀에 젖은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손가락 마디마다 굳은살이 잡히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삽질에 어깨는 결리고 손목은 욱신거렸다. 땀으로 미끄러진 삽자루는 몇 번이나 손가락에서 빠져나가며 허공에 흙을 흩뿌렸다.
"젠장, 이런 짓을..."
짓이겨진 풀 냄새와 흙냄새가 퍼진다. 곰팡내와 피 냄새의 아득한 혼합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 사이로 썩은 나뭇잎, 죽은 곤충의 껍질, 부서진 유리 조각 같은 것들이 흙 속에서 반짝였다. 시간은 모순덩어리였다. 너무 빠르게 흘러가면서도, 너무 느리게 굴렀다. 뺨을 타고 흐른 땀이 턱을 지나 옷깃으로 스며들었고, 등에서는 줄줄이 땀이 흘러내렸다. 왜 그토록 효율적인 이능력을 두고, 굳이 손으로 삽을 쥐고 이러는가?
그토록 싫어했던 악우의 시체를 지금 이 밤중에 파내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 또한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자신도 모든 이유를 알지는 못했다. 그저 직감으로 알고 있었다. 낮에 그의 잔상을 봤다. 한낮의 환상인가. 역시 뭔가 이상하다. 죽은 녀석이 정말 죽은 게 아니라면 살아 있는 쪽이 뭘 잘못 알고 있는 거다. 그런 직감이 그의 손을 직접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시체가 흙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달빛이 구름 사이로 흘러내리며 그 몸을 비췄다. 다자이 오사무의 놀랍도록 우아하고 아름다운 손가락이다. 생전에 그가 장난하듯 머리를 매만지고, 총을 들어 올리고, 담배를 만지작거리던 손이다. 그 실루엣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선명했다. 그리고 마치 한 번도 죽은 적 없다는 듯 온전했다.
온몸에 전율이 뻗쳤다. 감각의 대역폭이 한계까지 확장되는 것 같은 느낌. 생과 사의 경계가 지금 이 무덤 속에서 희미해지고 있었다. 다자이는 죽었었다. 확실히 죽었다. 그러나 시체는 썩지 않았다. 피부도, 옷도, 손톱도 전혀 훼손되지 않았다. 그 사실을 확인하자 나카하라는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기괴한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살포시 웃음이 터졌다. 이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웃음이었다. 슬픔도, 기쁨도 아니다. 공포감도 절망감도 아니었다. 그저 다자이다운 광경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웃음은 곧 멈췄다.
문득 느낀 시선을 깨닫고 그의 눈이 시체의 목 쪽으로 향했다. 다자이의 얼굴이, 아니,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시체는 고요하게 누워 있었고 몸은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으나, 목이 없었다.
등줄기를 따라 짜르르한 한기가 짧게 한차례 지나갔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츄야는 문득 다자이가 생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한 사람이 반드시 자기 판단이나 실천에서 일관적일 필요는 없어. 오히려 그런 내적 일관성이나 무모순성 따윈 집어치우고, 그때그때 다른 인간이 될 수 있어야 사회에서 살아남지. 아마도 중요한 건 언제나 구체적인 이익이야. 그걸 잘 아는 놈이 살아남으니까..." 다자이는 늘 스스로를 부정하면서 살았다. 자기를 자살광이라 부르면서도, 누구보다도 생에 미련을 가진 듯 행동했고, 선의와 냉정, 헌신과 조롱 사이들을 줄타기하듯 오갔다. 그건 꼭 모순적이라고 가차 없이 표현하기보다, 다자이만의 독특한 생존 방식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정체성의 변형, 목적에 따른 자아의 유연한 분할 말이다. 그래서다. 지금 이 시신조차도 그가 세운 작전의 일부일 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 그는 재빨리 준비해둔 거대한 캐리어를 펼쳤다. 그 안에, 목 없는 다자이의 시신을 접어 넣었다. 관이 아닌 여행 가방에 실려 또 한 번 다른 곳으로 떠나는 다자이의 처지를 생각했다. 이것 참 그 자식답군. 그는 입을 꾹 다물고서 캐리어를 끌기 시작했다. 바퀴가 진흙 위를 지나며 질척질척한 소리를 냈다. 달빛은 여전히 그를 쫓고 있었고 발밑에서는 웅크린 도시가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카하라 츄야는 느꼈다. 이 모든 건 끝이 아니라 어떤 시작이다. 다자이의 장례식에서는 막이 내린 게 아니라, 무대가 전환된 것이었다.
그 어둠은 도시 위로 천천히 내려오고 있다.
2.
다자이 오사무가 죽었다!
첫머리와 똑같은 말이 되풀이 되고 있다고? 나도 안다.
이 문제는 여전히 너무나 중요하고, 지금 요코하마의 사회 상황을 사로잡고 있다.
다음의 보고서를 보도록 하자.
요코하마 이능 재난 사태 보고서 (극비)
- 문서번호: YK-CR0199
- 작성일: 20XX년 8월 8일
- 작성자: 이능특무과 분석관 A-47
- 등급: 최고등급 기밀
- 분류: 사념체 / 이능력 폭주 개체 / 불특정위치출현형
[1] 사태 개요
2025년 7월 하순부터 요코하마 전역에서 발생한 '죽은 자들의 부활' 현상은, 현재까지 총 198건의 목격 사례, 42건의 공식 보고, 그리고 6건의 공식 영상자료(CCTV, 드론)가 확보된 상태이다. 해당 사태는 단발적, 비선형적으로 도시 전역에 발생하고 있으며, 동일한 시공간 내에서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 동시에 감지되는 등, 고차원의 이능력 개입이 의심된다.
본 보고서는 이 사태의 중심으로 추정되는 '소녀형 개체' 및 그녀가 유발하는 이능력 현상에 대한 초동 분석을 담고 있다.
[2] 중심 개체: 코드명 "마녀"
- 성별: 여성
- 연령: 약 16세 추정
- 확인된 신원: 없음 (DNA 대조 불일치)
- 상태: 의식이 희박하거나 결여된 듯 보이며, 일정한 언어 또는 감정 반응 없음.
- 행동: 도보 이동 중이나, 해당 동선이 비선형적이며 때때로 순간이동에 가까운 지점형 출현이 관측됨.
- 복장: 회색 교복 차림과 학생용 구두.
- 일명: "마녀", "죽음의 아이", "발할라의 사자"
[3] 이능력 개요 및 특이 현상
1. 죽은 자들의 부활
- 소녀의 반경 약 15~30m 내에서 사망한 지 수십 년이 경과한 자들까지 부활하는 현상이 반복됨.
- 해당 부활은 무작위적이지 않으며, 감정적 잔류가 강한 시체, 도시의 사건에 연루된 자, 혹은 이능력자일수록 고빈도로 발생함.
- 부활한 자들은 대부분 기억을 유지한 채 되살아나며, 그 감정 상태에 따라 재회 혹은 복수 등의 행위를 자율적으로 수행함.
2. '점'으로 출현하는 이동 동선
- CCTV 분석 결과, 소녀의 이동 궤적은 선형 궤적을 거의 형성하지 않으며, 불연속적인 점의 형태로 출현한다.
- 이는 물리적 이동이 아닌, 도시 전역에 연결된 특이한 역장 내부를 통한 이동 가능성을 시사함.
- 현재까지 포착된 점 형태 출현지점은 항구, 병원 지하 영안실, 학교 체육관 뒤편, 공동묘지 등 죽음이 집중된 장소에 집중됨.
3. 이능력의 흡수 및 누적
- 이능력자 주변에서 해당 인물의 능력 소실 및 소녀 개체의 반응 증가가 관측됨.
- 이로 인해 마녀 개체가 단일 사념체가 아니라, 여러 이능력의 누적 덩어리일 수 있다는 가설이 제기됨.
- 일부 관측자는 이를 "이능력자들의 감정, 기억, 기술, 사념이 하나의 중심에 모여 형성된 집합적 괴물"이라 표현.
[4] 사회적, 심리적 여파
- 부활한 자들로 인해 도시 전역에 혼란 가중. 특히 다음과 같은 이중성이 강하게 나타남:
- 죽은 가족과 재회한 시민들의 감격과 혼란
- 부활한 원한 관계자(살인자, 피해자, 기타범죄자)에 의한 복수극의 연쇄 작동
- 범죄율이 급증하였으며 사망 > 부활 >보복 > 재사망이라는 루프 현상이 도시 곳곳에서 발생함.
- 시민들은 공포와 광기 그리고 일말의 희망 속에 방황하며, 도시 전역이 일종의 감정 폭주 구역으로 전환되는 중.
[5] 철학적, 문화적 해석
- 일부 종교인들과 저널리스트들은 해당 현상을 다음과 같이 해석 중:
- "발할라의 여신이 요코하마에 내려왔다."
- "이능력 문명에 대한 심판자이자 회수자."
- "모든 죽음과 능력을 수확하는 사자."
- 일부 이능철학 연구자들은 마녀 개체가 도시 이능력자의 '집단적 죄의식이 만든 존재'일 가능성도 제기함.
[6] 대응 방안 및 권고
- 마녀 개체에 대한 물리적 제압은 현재 불가능 판정. (총기, 이능력 모두 무효화됨)
- 유일한 가능성은 '사념 공명 차단 장치' 또는 이능력 해체 능력자의 투입
- 이능특무과, 무장탐정사, 포트마피아의 공동 대응 전선 구성 필요성 제기됨, 그러나 명분이 없어 어려움.
"죽은 자들이 돌아오고 있다. 문제는, 그들이 살아생전 때보다 더 의지가 뚜렷하다는 것이다."
-익명의 관찰자, 제3 기록일지 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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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다자이의 시체는 목이 없었다. 나카하라는 그걸 안고 계단을 올랐다. 어쨌거나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외투를 벗지도 않고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저벅저벅 걸어가 침대 위로 그 시체를 던져 눕혔다. 침대 시트 위로 다자이의 잘려 나간 목덜미가 축 늘어졌다. 목의 잘린 단면은 흑요석을 자른 것처럼 검고 매끄럽다. 그 비현실성을 보고 있자니 숨을 쉴 때마다 속이 비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폐를 가득 채우는 고요한 공기가 더 이상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나 바깥의 분위기는 정반대였다. 시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각자 어딘가로 달아났고, 골목은 불길로 물들었다. 수백 개의 사이렌이 서로를 밀쳐내며 울부짖었다. 그야말로 도시 전체가 아비규환이었다. 누가 누구를 죽였는지, 누가 지금 어디서 불을 지르고 있는지조차도 아무도 모를 만큼 혼란스러웠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은 핼러윈이자 끝없는 광란이다.
그 와중에도, 나카하라는 오직 한 사람, 아니 한 존재만을 찾아야 했다. 그는 소녀의 모습을 한 그 이능력 사념 덩어리를 시급히 찾아야만 했다. 지난번 그녀를 마주쳤을 때에 나카하라의 이능력은 고스란히 흡수되어 사라졌다. 이능력이 없어도 충분히 강한 나카하라지만, 평소 몸에 밴 습관들이 이능력 사용을 전제로 한 행동들이라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마녀는 마치 그림자처럼 아른거리지만 절대 잡히지는 않았다. 마녀가 나타나 숨어있을 법한 곳을 온종일 뒤지고 땀을 흘렸지만 손에 쥔 것은 결국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를 붙잡아 이 다자이의 몸에 닿게 한다면 무언가의 이능력 현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가능성을 시험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느날 비에 젖은 보도 위에서 나카하라는 담배를 꺼냈다. 불씨를 붙이기도 전에 바람이 훅 하고 불어와 담배가 젖었다. 욕설이 입안에서 맴돌았다가 녹았다. 분명히 어딘가에 있다. 이 도시의 부패한 숨결과 사람들의 무방비한 공포 속에 그 마녀는 눅눅히 스며들어 있다.
"숨을 수 있다고 생각했냐."
나카하라는 빗물로 바닥이 번들거리는 골목을 가로질러 유유히 걸어갔다. 건물의 어둠 속에서 네온사인이 깜빡이며 시들어갔다. 차가운 콘크리트에 내린 비 냄새와 매스꺼운 석유 냄새가 공기 속에서 뒤엉켰다.
멀리서 아이 울음 같은 것이 들렸다. 나카하라는 걸음을 멈췄다. 평범한 아이 울음소리라기에는 그 울음이 너무 균일하고 기괴했다. 같은 간격과 같은 높낮이로 기계처럼 반복되는 소리다. 그는 가만히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아직 남아 있는 총탄을 확인했다. 이능을 잃은 지금은 무의미하지만 손끝에 닿는 차가운 금속이 조금이나마 안정감을 줬다.
울음소리가 그쳤다. 대신 낮게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소녀의 목소리였다. 그 소리는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 나카하라가 반쯤 몸을 돌리기도 전에 뒷덜미를 스치는 한기가 심장을 뚫었다. 뒤돌아보니 그 소녀는 이미 사라지고 흔적하나 없었다.
4.
소녀는 사라졌고 그 대신 공기에는 아직 그 싸늘한 이능력 폭풍의 잔향이 서려 있었다. 늦은 밤, 나카하라는 피곤함에 절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침대 위엔 여전히 목 없는 다자이의 시체가 다소곳이 누워 있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나도 모르겠다."
그는 중얼거리며 시체 옆, 침대에 앉았다.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는 차가운 손을 집어 들고, 무심코 손등에 입을 맞췄다. 오래된 습관이었다. 두 사람의 습관적 정사 후 잠든 다자이를 지켜볼 때마다 하던 꿈나라로의 작별 인사다.
그런데! 그 순간 퍽 하고, 시체의 몸이 벌떡 일어났다. 나카하라는 반사적으로 펄쩍 뛰고 물러났다.
"씨발! 뭐야 이건!"
다자이의 머리는 여전히 없었지만 대신 두 팔이 천천히 움직이며 침대 머리맡의 메모지를 더듬었다. 펜을 집어 든 손이 또박또박 글씨를 썼다.
[네가 나를 그리워할 줄은 몰랐네, 츄야♡]
나카하라는 공포와 경악과 분노 사이에서 갈팡질팡 했다.
"지금 장난하냐?! 네놈 목은 어딨어!?"
다자이의 펜이 부드럽게 움직여서 우아한 필치를 그려냈다.
[목이 없는 게 어때서? 말은 못하지만, 츄야 놀리기엔 충분한데.]
"미친놈아...!"
나카하라는 골이 아파와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방 안의 어둑한 공기가 묘하게 일렁일렁했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전자음 같은 바람 소리, 이능력 폭풍의 잔여물인 진동이었다. 다자이는 또 또박또박 글씨를 썼다. 그리고 메모를 나카하라에게 쓱 내밀었다.
[죽을 때, 마침 이능 특이점 역장에 걸려 있었거든. 절반은 저승에, 절반은 이승에 걸쳐 있는 상태랄까.]
나카하라는 기가 막혀 박박 이를 갈았다.
"그래서 이 꼴로 살아있다는 거냐?"
[응. 덕분에 머리 없이도 너랑 놀 수 있네.]
펜 끝에서 'ㅎㅎ'가 써 내려가는 걸 본 순간, 나카하라는 참지 못하고 메모지를 구겨 방구석으로 내던졌다.
"죽여버린다!!"
목이 없고 이젠 메모지도 없는 다자이가 단지 어깨를 한번 으쓱, 했다. 이미 반쯤 죽은 사람을 어떻게 또 죽일 것인가?
5.
쿠니키다는 퇴근 후 현관문을 열었다. 방 안 한가운데, 탁상 위에 놓인 무언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자이의... 머리통이었다.
"......뭐, 뭐야 이건."
분명 간밤에 꾸었던 악몽이 떠올랐다. 간밤에 그는 그 어둡고 축축한 묘지를 헤맸다. 삽을 들고 다자이의 무덤 뒤편으로 가, 비석 뒤에 놓인 그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는 꿈 말이다. 쿠니키다는 끔찍한 꿈에서 깨어났다. 땀에 젖은 채 깨어났을 때는 단순한 악몽이라 여겼다.
그런데,
"쿠~니키~다 군, 그동안 내가 없어서 많이 심심했지?"
머리통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
"으아악!"
쿠니키다는 뒤로 벌러덩 나자빠졌다. 집에 보관하던 책과 물건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물건에 부딪힌 곳이 아려왔다. 아픔이 알려준 바 이건 악몽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었다. 다자이는 모든 순간 입을 쉬지 않았다.
"저녁 메뉴는 뭐야? 나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 좀 더 시원하게 헹궈줘. 거기, 귀 뒤쪽은 제대로 안 씻었잖아."
"수건은 이거 말고 더 부드러운 거 없나? 나 같은 미인한테 피부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데."
"그리고 말이야, 샴푸는 좀 더 향 좋은 걸로 바꿔주면 안 돼?"
"내가 비록 몸이 없다고 해서 대충 대하면 안 된다구~"
쿠니키다는 반가운 마음 반, 익숙한 분노 반으로 머리가 띵해져서 이를 악물었다.
"넌 지금 머리밖에 없잖아. 관리가 아니라 방부처리나 신경 써라."
결국 쿠니키다는 사흘간 매일 다자이의 머리통과 함께 식사했고, 매일 다자이의 머리도 감겨주고, 또 수건으로 정성껏 말려줬다. 머리통과 이어진 목의 절단면은 방부처리라도 한 듯, 매끄럽게 빛나는 검은 흑요석 같았다.
며칠 후, 그는 혼자 더는 이 진실을 감당하기 힘들어졌다. 결국 탐정사 사무실로 문제의 머리통을 가져왔다. 가방에 넣을 때 숨이 막힌다, 움직이니 멀미 난다고 어찌나 찡찡대던지 테이프로 입을 막아야 했다. 쿠니키다가 고해를 하고서 다자이를 덜렁 꺼내니, 머리통 주변으로 탐정사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오... 진짜 다자이네."
요사노가 별일 아니라는 듯 슬쩍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목 절단면이 참 예쁘네요... 반짝반짝 해요!"
켄지는 진지하게 아름다운 점을 감상했다.
"흠... 장식품으로도 나쁘지 않은데? 꼭 박제된 것 같아요."
다니자키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다들 반응이 너무 무심하지 않아요?! 다자이 씨가 살아 돌아왔는데!"
아츠시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아츠시군, 진정해. 이건 다자이 씨다운 복귀라고 생각해."
쿄카가 그런 아츠시를 토닥여 주었다.
"그런데 이 자식 몸은...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쿠니키다의 말에, 눈알을 데구르르 굴리던 다자이의 머리통이 싱긋 웃었다.
6.
머리는 무장탐정사에 있고, 몸은 포트 마피아에 있다. 그 기괴한 분리 상태가 며칠째 이어졌다. 사건의 기묘함과 황당함에 결국 이능력 특무과까지 가세했고, 세 조직이 같은 테이블에 앉는 초유의 광경이 펼쳐졌다. 특무과의 담당관이 두꺼운 파일을 테이블에 툭 내려놓으며 말했다.
"우린 지금 전례 없는 이능력 역장 불균형 사태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도시를 이대로 둘 순 없어요."
쿠니키다의 옆에는 여행용 가방이 놓여 있었다. 그 열린 가방 안에는 아주 기분 나쁜 미소를 띤 다자이의 머리통이 들어 있었다.
"쿠니키~다군, 이렇게까지 날 소중히 챙겨줄 줄이야."
"제발 입 좀 다물어라."
나카하라의 옆에는 다자이의 몸이 느슨하게 앉아 있었다. 목덜미 위로 아무것도 없는 그 모습은 보통 사람이라면 비명 지르고 도망칠 광경이었지만, 나카하라는 시큰둥했다.
“아 진짜 몸만 있어도 거슬리네. 뭔가 재수 없는 기운이 그대로야.”
"그래서... 머리랑 몸을 어떻게 합칠 거죠?"
쿠니키다가 대뜸 물었다.
“단순히 붙이면 끝날 문제는 아니야.”
특무과의 능력자가 손바닥 위에서 작은 이능력 구체를 굴렸다.
"저게 갈라졌을 때의 상태인 <죽은 자와 산 자 사이>라는 역장 균형을 맞춰야 하거든. 아니면 이능폭발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
나카하라가 팔짱을 끼며 하, 하고 비웃었다.
"폭발해도 상관없지 않나? 오히려 세상에 이익일지도."
"아아, 너무해. 이렇게 날 매도하다니, 우울해진다니까."
다자이가 연극 조로 말했다.
"넌 머리만 있어도 정신 사납다!"
쿠니키다의 이마에 힘줄이 불거졌다.
이능력 전문가의 여러 가지 복잡한 기술적 조율 끝에, 드디어 이능력 역장 속에서 머리와 몸이 서로를 향해 끌려갔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찰나의 침묵이 공간을 가로질러 갔다.
"와~!"
모두의 탄성과 함께, 머리와 몸이 정확히 맞물리며, 한 사람의 다자이가 완성됐다. 피도 흉터도 없이, 마치 처음부터 온전했던 사람처럼 합쳐졌다.
"오... 성공했네요."
안경을 쓴 특무과 관계자가 감탄했다. 다자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역시 요코하마는 나 없이는 안 굴러간다니까!"
그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두 팔을 활짝 벌린 채로 대환영을 기대했다. 그러나 돌아온 건 냉담한 시선뿐이었다. 쿠니키다는 이마를 짚으며 깊게 숨을 내쉬었다. 나카하라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둘은 동시에 똑같은 생각을 했다. 역시 이놈은 하나로도 충분한 민폐 덩어리다.
7.
늦은 밤의 어둠이 도시를 삼켜버린 듯 고요했다. 하지만 그 고요함은 약간의 불온함을 품고 있었다. 밤안개가 깔린 부둣가 도로 위를 쿠니키다의 차가 매끄럽게 달렸다. 운전석에서 쿠니키다는 시선을 전방에 고정한 채 이마에 힘줄을 세웠다. 조수석에는 다자이가 팔짱을 낀 채 창밖을 구경하고 있었다.
"쿠니키~다군, 이렇게 같이 데이트하는 거, 오랜만이지 않아?"
"수사다. 데이트가 아니라."
"그럼 수사 데이트라고 하지 뭐."
"그 입 좀 다물어, 그런데 마녀가 대체 어디에 나타난다는 거지?"
쿠니키다가 물었다.
"그게 말이지~"
다자이는 한껏 느릿하게 말꼬리를 끌었다.
"예측 불가능한 곳, 예측 불가능한 시간, 예측 불가능한 사람 앞에."
"즉, 아무 데서나 나타난다는 소리군."
"맞아! 역시 쿠니키다군, 대단해, 대단해~"
쿠니키다는 대답 대신 가속 페달을 더 밟았다. 부두 근처, 버려진 창고 지대부터 뒷골목의 낡은 고층 빌딩까지, 그들은 ‘마녀’가 출현할 법한 곳을 샅샅이 훑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렸지만, 마녀의 흔적은 없었다. 그보다도, 골목마다 다른 사건이 터지고 있었다. 어디선가는 불이 나고, 다른 쪽에서는 이능력자들 간의 싸움이 벌어지고, 또 다른 곳에서는 갑자기 들개 떼가 거리를 점령했다.
"이건... 마녀의 짓일 수도 있지 않을까?"
다자이가 문득 중얼거렸다.
"아니, 그냥 너라는 재앙이 타고 다니는 차 주변에만 사고가 몰리는 거다."
그렇게 말하는 쿠니키다의 목소리는 점점 굳어졌다. 두 사람은 낡은 하수도 입구 앞에 차를 세웠다. 바람이 불자, 안에서 이능력 역장 폭풍 특유의 미묘하게 전자음 같은 금속 긁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쿠니키다는 권총을 꺼내 들었고, 다자이는 실실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
"역~시 이런 데서 목표물이 튀어나오는 법이지."
그러나 하수도 안에서 나타난 건 마녀가 아니라, 전혀 다른 조직의 현상금 사냥꾼인 이능력자 무리였다. 그들은 이미 무언가를 쫓고 있었고, 그 목표물이 바로 '마녀' 인 듯했다. 그 마녀는 이능력 특이점 역장의 중심에서, 검은 그림자처럼 벽을 타고 달아났다.
"어라라? 일이 꼬였네."
다자이가 느긋하게 중얼거렸다. 쿠니키다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 당장 추격한다!"
다자이와 쿠니키다는 하수도의 질척하고 미끄러운 통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마녀를 쫓는 다른 조직과의 충돌, 함정 같은 역장의 변동, 그리고 다자이 특유의 사고뭉치 행각이 겹쳐, 추격전은 순식간에 꼬여만 갔다.
8.
하수도 안은 곰팡내와 비릿한 녹슨 금속 냄새가 뒤섞여 숨이 막힐 듯했다. 쿠니키다의 손전등 불빛이 앞을 비추자 물기로 번들거리는 벽 위로 검은 그림자가 미끄러져 달아났다.
"저기다!"
쿠니키다가 소리쳤다. 마녀는 한눈에 보기에도 인간의 움직임이 아닌듯한 기괴한 움직임을 보였다. 발이 거의 땅에 닿지 않은 채 주변의 그림자와 하나가 되어 둥둥 떠서 좁은 통로 벽을 타고 전진했다. 그것의 형체는 교복을 입은 소녀였지만, 인간성이 결여된 모습이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불타는 등불처럼 붉게 빛나고 있었다. 다자이는 전혀 당황하지 않은 얼굴로 쿠니키다의 뒤를 달렸다.
"저거, 지난번 내가 능력 뺏겼던 그 애 맞아. 다시 보니 더 귀엽네."
"입 다물고 뛰어라!!"
그러나 추격은 순탄치 않았다. 마녀의 뒤를 쫓던 다른 조직의 이능력자 셋이 옆 통로에서 튀어나왔다. 그 중 한 명이 손을 휘두르자, 하수도 벽이 부서져 쓰레기와 오수가 폭포처럼 쏟아져 길을 막았다.
"이봐, 이러다 놓치잖아!"
다자이가 소리쳤다.
"너는 그게 아쉬운 거냐, 목숨이 아쉬운 거냐!"
쿠니키다는 수첩을 꺼내 순식간에 나이프를 만들어 뽑았다. 그 순간, 마녀가 움직임을 멈추더니 고개를 갸웃하고 돌렸다. 순간 하수도 전체가 심연처럼 어두워졌다. 쿠니키다의 손전등은 아직 켜져 있었지만 빛이 1미터 앞도 뚫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마녀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역장의 파동이 곧 임계점에 도달합니다."
그녀가 손을 내밀자 하수도 벽과 바닥이 뒤틀리며 검은 칼날 같은 그림자들이 솟아올랐다. 한순간 모든 방향에서 날아드는 그림자의 창이 쿠니키다와 다자이를 덮치려고 했다.
"하하, 이거 위험하네."
다자이는 전혀 긴박하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잠깐 쿠니키다 쪽을 보더니, 씩 웃었다. 쿠니키다는 그 순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저 미소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래도 이런 건 팀워크로 피하는 거지?"
쿠니키다는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으로 그를 노려봤다.
"...네가 팀워크라는 단어를 알 줄은 몰랐군."
9.
쿠니키다는 재빨리 몸을 숙여 그림자 창을 피했고, 다자이는 거의 장난스럽게 허리를 젖혀 날아오는 창을 스치듯 피했다. 검은 창들이 벽에 박히자 눅눅한 돌벽이 비명을 지르듯 갈라졌다.
"아름다운 소녀여! 지난번, 내 능력을 삼켰었지요?"
다자이가 연극적인 대사를 뱉으며 어둠 속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이번엔 돌려받으러 왔어."
다자이는 입술로 매력적인 호선을 그리며 씨익 웃었고, 마녀는 대답 대신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하수도 벽면이 종잇장처럼 뒤집히며 쿠니키다의 발밑이 붕 떠올랐다. 중력 방향이 반대로 뒤틀려 쿠니키다가 천장 쪽으로 쏠리듯 떨어졌다. 예상컨대 이것은 그녀가 빼앗은 나카하라 츄야의 이능력이었다. 쿠니키다가 이를 악물고 허공에서 철봉 타듯 배관을 잡았다.
"다자이! 이거 장난이 아니..."
그의 말이 끊겼다. 다자이 오사무라는 인간이, 똑바로 서서 그 마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녀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너는, 그때, 죽었어야 했다."
그 감정의 기색이 전혀 없는 한마디에 쿠니키다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다자이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그 미소엔 아까와는 조금 다른 기운이 서려 있었다.
"아, 그 얘기? 내 머리랑 몸을 갈라놓은 게 너였구나. 뭐 결과적으로 나쁘진 않았어. 명분이 되었으니까."
쿠니키다는 순간적으로 이해했다. 목이 잘린 다자이의 시체, 방부 처리된 듯한 흑요석 같은 절단면, 그리고 특이점 역장의 영향들이 머릿속에서 짜 맞춰졌다. 이 모든 건 우연이 아니라, 마녀의 이능력 한계를 알아보려던 실험대였을 것이다.
"너는 목적이 뭐..."
쿠니키다가 말을 잇기도 전에, 마녀가 왼손을 높이 들었다. 어둠이 폭발하듯 퍼지며 하수도 전체를 삼켰다. 그리고 시야가 닫히는 마지막 순간에 쿠니키다는 마녀의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었다.
"쉿, 비밀."
곧 두 사람은 터진 하수구의 바깥에서 눈을 떴고, 진흙으로 엉망진창이 된 채로 두 사람의 집으로 돌아갔다.
10.
며칠 후, 결국 세 조직의 경보가 동시에 울렸다. 이능특무과의 요원들은 무전기로 좌표를 찍고, 포트마피아는 비상 호출로 병력을 모아 대형트럭에 폭발물과 장비를 싣고, 무장탐정사는 냉정하게 동선을 계산해 현장 주변을 봉쇄했다. 도시는 금방 전쟁터처럼 변했다. 네온은 깜빡이고 사이렌 불빛이 하늘을 긁었으며 사람들은 안전을 찾기 위해 실내에서 숨죽였다.
거리 위는 혼돈의 잔향으로 가득했다. 연기처럼 흩어진 그림자, 무너진 간판, 불타다 만 자동차까지 마치 전쟁 영화의 세트장 같았다. 그 모든 것들이 마치 한 장의 인상파 회화처럼 뒤엉켜 있었다. 멀리서 정돈이 덜 된 붉은 머리 청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를 본 다자이는 본능적으로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몸을 밀고, 팔을 휘저으며, 쓰러진 사람과 잔해를 피하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심장은 요동쳤고, 눈은, 노을 아래의 사람들 머리 사이로 불쑥 튀어나온 붉은 머리칼을 향했다. 혹시라도 잘못 볼 리 없는, 꿈에서 백만번도 더 봤던 그 머리칼이다.
그러나 그의 발길은 갑작스러운 충격으로 멈칫했다. 어깨를 부딪힌 상대는 소녀였다. 짙은 검은 머리칼과 반쯤 흐릿하게 빛나는 눈의, 회색 교복을 입은 소녀였다.
"죄송합..."
주변의 모든 움직임이 일순간 멈춘 듯했다. 사람들은 그대로 멈춰 서고, 유령들은 연기처럼 공중에서 감미로운 무의미로 흩어져 사라졌다. 곧, 거리 위에는 오직 다자이 뿐이다. 붉은 햇살이 빌딩의 유리창을 스치며 부서졌고, 분홍빛 구름이 잔잔하게 흐르며 거리를 감쌌다. 모든 사자 소생의 마법은 멈췄고, 이 세계의 시간마저 숨을 죽인 듯했다. 그는 마녀와 부딪힌 것이다. 다시 본 해 질 녘의 빛이 부서지는 거리에 붉은 머리의 그는 없다.
다자이의 입은 잠시 열렸다가, 이윽고 다시 닫혔다. 그의 얼굴에는 쓸쓸하지만 묘하게 평온한 미소가 번졌다. 마치 세상의 혼돈과 폭주가 단지 하룻밤 꿈인 것 처럼, 아무 일 없던 듯이 고요했다. 다자이 오사무는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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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둥이 설정 ㅇ밀크, ㅇ밀키, ㅂ포네.
※ 본공 한참 후 시점, 캐릭터 변화 있음 (약 10년 후)
1.
한낮인데도 온종일 구름이 잔뜩 끼어 어두운 날이었다. 쌍둥이 형제인 밀크와 밀키가 출근할 때 까지만 해도 그저 흐릿할 뿐이었는데 퇴근 시간이 되니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카포네가 경찰에 붙잡혀 조직이 와해된 지 몇 년 후인 지금, 두 사람은 건어물을 가공하는 식품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둘 다 우산이 없어서 근무복 외투를 뒤집어쓰고서 발맞춰 함께 집까지 뛰어갈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잔뜩 젖은 생쥐 꼴을 하고 그들의 오래된 아파트로 돌아왔다.
문을 닫고 들어서자 잠시간 아늑한 고요가 두사람을 감싼다. 전등을 켜지 않아 어두컴컴한 거실에는 낡은 소파 위로 카포네가 기대어 앉아 있다. 현관에서 대충 물을 털어낸 밀크 형제는 소파로 다가가서 각자 양쪽 소파 팔걸이에 기댄다. 비슷한 얼굴, 같은 듯 다른 표정, 비슷한 버릇을 가진 두 사람이 동시에 카포네를 내려다본다.
"잘 있었어요?"
"잘 있었네요?"
카포네는 아직 약간 혼란스러운 듯 말 없이 쌍둥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교도소 출소의 이유가 된 정신적 결함으로 인해, 밀크가 한명이 아니라 쌍둥이인 것을 알게 된 그 시점까지 정신이 퇴행했기 때문이다. 정신적 결함 때문이기도 하고, 원래 그의 인생이 그래 왔듯이, 카포네에게 현실은 말이 되는 게 하나도 없고 뒤죽박죽이다.
"먼저 씻어, 내가 너 다음에 씻을게."
오른쪽 팔걸이의 밀크가 말했다. 왼쪽 팔걸이에 기댄 밀키는 그 말을 듣고 살짝 웃으며 몸을 일으킨다. 그러면서 소파 옆의 장 스탠드에 불을 탁 켠다.
"둘만 놔둔다고 수작 부리지 마."
"뭔 수작, 어제는 너랑 있었잖아. 내가 아저씨 독차지하면 너는 어떤데?"
"당연히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지, 그렇게 안 놔둬."
"나도 동감이거든, 빨리 씻으러나 가."
밀키는 욕실 가는 모퉁이에 놓인 바구니에서 수건을 꺼내서 샤워실로 들어갔다. 밀크는 얌전히 소파에 앉아 있는 카포네의 속눈썹을 내려다본다. 아저씨가 넋이 나가 버린 건 출소 이후부터 쭉 이랬다. 재소 중에 충격적인 일이 많아서 이렇게 된 건지 원래 있던 병 때문인지는 불분명했다. 밀크는 카포네 아저씨의 동글동글한 머리통을 쓱쓱 쓰다듬다가, 그러고는 귓불을 만지작 대다가, 그러고는 섬세한 속눈썹을 손가락으로 살며시 쓸어 본다. 그러는 동안 카포네는 미동도 없다가, 밀크가 그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키자 움찔, 하고 움직인다. 카포네는 약간 곤란한 듯 웃는 표정을 밀크에게 보여준다. 출소 후에는 카포네는 어지간하면 말을 잘 하지 않았다. 밀크는 그럴 때 카포네가 마치 목소리를 빼앗긴 인어 공주 같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지금 같은 때 스킨쉽의 곤란함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없는 무능이 그렇다. 밀크는 아저씨의 안절부절못한 얼굴을 감상하다가 짧게 입맞춤했다.
"오늘 일도 진짜 힘들었는데, 이 정도는 격려해줄 수 있는 거잖아요."
불안한 듯 보이는 카포네는 욕실 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뜻은 뻔하다. '밀키 한테 들키면 어쩌려구 이래.'
"밀키가 왜요? 내가 먼저 좋아했는데. 아저씨는 누가 더 좋은데요?"
"......"
카포네는 못 말리겠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밀크는 그런 카포네를 보고 더 참을 수 없어져서 재차 깊게 입맞춤을 했다. 금방 숨이 막히는지 카포네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숨 쉴 시간을 주려고 밀크가 잠시 떨어졌다. 밀크가 카포네의 코앞에서 속삭였다.
"둘 중 하나를 고른다면 역시 저죠?"
그때, 샤워가운을 걸친 밀키가 욕실에서 걸어 나왔다.
"야, 밀크 너 또 안보니까 수작질 시작했지, 이래서 둘만 놔두면 안된다니까."
밀키가 툴툴대면서 머리의 물기를 털며 다가왔다.
"어제는 어땠는데? 너한테 다 못 넘겨 나는."
"우리 둘 다 양보 못해, 공평하게 나눠 가지기로 했잖아."
"대부님을 반으로 찢자고?"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한 카포네가 중재를 하려고 나섰다. 소파 앞에서 다투는 두 사람의 손을 양손에 잡고서 멋쩍게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서 화해 하라는 뜻이었다.
"끔찍한 소리 말고 씻어. 냄새 난다."
2.
밀크가 씻는 동안 밀키는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크림 수프와 빵, 소시지와 옥수수와 콩, 모조리 팬에 넣고 가열하는 게 전부였지만 그래도 제법 좋은 냄새가 났다. 4인용 식탁의 의자에는 카포네가 앉아서 밀키가 요리하는 모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밀키는 음식을 접시에 담고 각자의 자리에 놓았다. 카포네 옆자리에 앉은 밀키는 숟가락으로 수프, 옥수수와 콩을 떠서 후후 불어 식힌 뒤 카포네에게 먹여 주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카포네는 음식을 먹는 법을 배운 적 없는 아이처럼 물끄러미 수저와 접시를 바라보고만 있다. 대체 감방 생활이 어떻게 굴러간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러니까 출소 시킨 건가, 하고 생각한 밀키는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맛있어요?"
그 말에 카포네가 빙그레 웃었다. 꽤 기분이 좋은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카포네가 뭐라고 뻐끔 거리면서 말을 하려고 했지만 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아저씨, 맛있으면 뽀뽀해주기로 했죠?"
그런 요구가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카포네는 밀키의 이마에, 뺨에 짧게 입맞춤 해 주었다. 밀키는 안달이 나서 볼을 손으로 잡고 카포네의 입술으로 직진해서 깊게 키스했다. 조금 억센 동작에 놀란 카포네가 움찔 한다. 방금 먹인 수프의 달콤한 맛이 밀키와 카포네의 입 속에서 뒤섞였다. 그러는 순간 이번엔 밀크가 욕실에서 튀어나온다.
"얼씨구, 누가 누구더러 수작질이라고 한 건지."
"밀크, 밥이나 먹어."
"네가 아저씨 밥 먹여드리게?"
"내 차례니까."
그런데 이때 카포네가 스스로 숟가락을 잡는다. 밀크는 그 모습을 귀여워하면서 웃었다. 한동안 말없이 식사 중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만이 부엌에 가득했다. 음식을 다 먹은 후 설거짓거리를 정리할 때였다.
"밀크...밀키..."
카포네가 몇 개월 만에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분명히 또렷한 눈빛으로 둘의 이름을 불렀다. 고양된 긴장감으로 가득 찬 집안의 공기가 폭발할 듯 팽창하는것이 모두에게 느껴졌다.
"...방금 뭐야."
"정신 차리신거 아냐?"
"설마. 의사가 안 낫는다했는데."
"의사가 돌팔이겠지."
"어쨌거나, 우연이야."
대수롭지않게 말하며 밀크는 싱크대로 가서 설거지를 시작했다. 밀키는 다시 담담하게 가라앉은 카포네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거기서 어떤 것이든 예전의 흔적을 찾으려고 애썼지만, 그의 눈동자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만이 흐릿하게 보일 뿐이었다.
3.
모든 숨겨진 진실은 언젠가 그 모습이 드러난다. 어떤 진실은 평화를 위해 차라리 비밀이 되어 아무도 모르는 쪽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런 진실이 드러날 때 일상은 꿈에서 깨어나 현실을 직시하는 고통과 아픔을 체감시킨다. 세 사람의 일상은 그런 줄 위에서 줄타기를 하는 중이다.
그러니까, 카포네의 약을 바꿔치기 하고 있는 건 밀크일까 밀키일까? 어쩌면 두 사람은 서로의 행동을 못 본 척 해주는 것으로 일상을 지속하려 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그건 두 사람이 아닌 세 사람일지도 모른다.
4.
휴일 저녁, 두 사람은 양옆에서 카포네 아저씨의 손을 잡고 앉아 흑백 텔레비전을 틀어두고 있었다. 쌍둥이가 열심히 일한 돈으로 마련한 텔레비전이었지만, 꾸벅꾸벅 조는 카포네가 그것을 즐기는지는 분명치 않았다. 나머지 두 사람의 목적은 카포네의 곁에서 공평하게 편안한 시간을 보내는 데에 있었으므로 실질적으로 화면에 집중하는 사람은 없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모두 끝나고, 미묘하게 달콤한 피곤함을 느끼면서 세 사람은 소파에 늘어졌다. 한참을 텁텁한 침묵 속에서 있다가 밀키가 말했다.
"아저씨가 정신 차리면 어떡하지."
"그럼 우리는 큰일 나는 거야, 아저씨가 우릴 가만 두겠어?"
"왜 그런 식으로 말을 해? 언제는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듯이 굴더니."
"확실한 건 지금처럼은 못 지내겠지."
밀크가 카포네의 손에 깍지를 끼고서 들어 올려 손등에 가볍게 입맞춤했다. 그리고선 카포네를 안아 들어 올렸다.
"누울 시간이에요, 아저씨."
카포네는 달랑거리며 들려서 침실로 옮겨졌다. 뒤따라온 밀키가 침대맡의 협탁 서랍에서 약병을 꺼낸다.
"약 드실 시간이에요."
카포네가 말을 잘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약병의 짤랑이는 소리에 주의가 끌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밀키의 손에 들린 약을 바라보았다. 밀키는 약을 입에 물고 침대에 앉은 카포네에게 다가가서 입으로 약을 먹여 주었다. 카포네는 한 번도 자기 스스로 약을 먹지 않았다. 밀크는 멍하니 서서 그 의미에 대해 곱씹는다. 그것이 무능력일지 저항력일지를 내밀히 저울질하며 곰곰히 생각했다. 카포네에게서 입술을 뗀 밀키가 질문한다.
"약 말인데, 꼭 먹여야 할까? 부작용으로 온종일 멍하니 계시잖아."
"발작과 고통을 없애준다잖아. 어차피 낫지 못한다면 덜 고통스러운 게 나아. 지금처럼."
"그게 다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네가 두려워서, 카포네 아저씨를 묶어두는 게 아닐까 생각하거든."
"내가? 공동소유 아닌가? 풀어주면? 너는 감당할 수 있어?"
두사람의 언성이 높아지자 불안해진 카포네가 몸을 부르르 떤다. 그리고는 약간 괴로워하더니 가까스로 한마디를 내뱉는다.
"그, 그만해,"
즉시 두 사람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다. 각자의 생각으로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며, 커다란 침대에 세 사람이 나란히 눕는다. 곧 불이 꺼지고, 어둠 속에서 양옆 쌍둥이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면서 카포네는 오래도록 깨어 있다.
5.
친구도, 애인도, 가족도 아닌 세 사람의 생활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밀크와 밀키는 매일 아침 공장으로 출근할 때마다 카포네의 배웅을 받는다. 쌍둥이 각각의 이마에 짧은 입맞춤과 셋이서 포옹, 그리고 다녀오겠습니다. 두 사람이 없는 동안 카포네는 햇빛이 잘 드는 거실의 소파에서 느릿느릿 뜨개질을 한다. 그 동작은 너무 느리기 때문에 곧 겨울이 될 때까지 두 사람분의 목도리가 완성될지는 분명치 않다. 그렇게 한참 기다리다 보면,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는 밀크와 밀키의 발자국 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두 사람은 현관문 앞 계단에서 또 아옹다옹 다투고 있다.
"야, 반장이 이번 달 까지만 나오라는 거 들었어?"
"어떡하지, 돈 없는데. 병원비부터 어떻게 해야..."
"자동차 도둑으로 이직이라도 해야 하나."
"대부님한테 숨겨둔 현금 좀 꺼내달라고 하면 안되나?"
"너는 그게 될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카포네는 본의 아니게 얇은 문으로 들어오는 대화를 엿듣는다. 그 대화의 의미를 이해하기도 전에 두 사람이 열쇠로 문을 열고 우르르 들어온다. 밀크가 다가와서 몸을 숙여 앉아있는 카포네에게 포옹을 한다. 신발을 벗던 밀키가 소리친다.
"야, 손씻고 만져."
두사람이 손을 씻고 나올 때 쯤에는 카포네도 뜨개질 거리를 내려놓고 방금 들었던 대화의 의미를 느리게 곱씹고 있다. 자신이 숨겨둔 현금이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를 천천히 복기해보았지만 역시 엉망진창으로 뒤섞인 머리로는 잘 생각이 나질 않는다. 막연한 인식으로 두 사람의 쓰다듬과 입맞춤을 받으면서, 두 사람의 짐이 되어선 안되겠다고 생각한다.
6.
그래서일까, 아침부터 내리던 비가 느지막하게 그친 후, 카포네는 집 밖으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도시 곳곳에 숨겨둔 지폐 다발과 금 따위를 닥치는 대로 찾아볼 생각이었다. 결과적으로 밀크와 밀키 두 사람이 퇴근 후 현관에 들어섰을 때, 싸늘한 정적만이 집안을 채우고 있었다. 현관 앞에 아저씨의 구두가 없다. 현관 앞의 거울에는 당황한 쌍둥이의 모습만이 비쳐있다. 외출이라니, 카포네 아저씨가 출소한 후로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야 어떡해? 아저씨가 갈만한 곳이 있어?"
"가면 안되는 곳만 가득한데 뭔소리야."
"파출소에 신고해야 하나?"
"짭새랑 엮이면 골치가 두배야."
두 사람은 무작정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축축한 길바닥을 한참 달리면서 익숙한 모습을 찾아보려 애썼다. 한편 카포네는 현금이 든 비닐 가방을 공원의 동상 아래쪽 틈에서 꺼낸다. 숨겨둔 비자금 모두가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그중 하나쯤은 생각해내는 데에 성공했다는 사실이 몹시 기뻤다. 그런데 아뿔싸, 집에 돌아가는 길을 알 수가 없다. 여기는 카포네가 잘 알던 동네가 아니었다. 하물며 인지능력이 심하게 손상된 지금은 같은 길을 몇번이고 빙글빙글 돌아도 맞는 길을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가을비가 추적추적 다시 내리기 시작해서 하는 수 없이 폐업한 가게의 처마 밑에서 웅크려 앉아 있었다. 가을비가 세 사람을 만나도록 이야기를 전해 준다면 좋을 텐데, 운 나쁘게도 경찰이 먼저 그를 마주치게 되었다. 경찰관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그를 지켜보았고, 결국 신분을 확인하려고 말을 걸려는 순간이었다.
"아저씨!"
"찾았잖아요, 휴,"
절묘한 찰나에 쌍둥이가 미아가 된 카포네를 발견했다. 경찰은 잠시 주춤하지만, 역시나 두 사람도 수상하게 생각하여 신분을 확인하려 했다. 쌍둥이는 카포네를 감싸면서 외친다.
"우리 가족이에요!"
"우리 삼촌이에요, 저희는 k 식품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성실한 직원입니다!"
경찰관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간단한 사정을 듣더니 알겠습니다, 하고 무심히 자리를 떠났다.
"십년감수했네, 짭새 미친 거 아니냐."
"야, 이제 약 바꿔치기 그만해."
"웃기지 마, 네가 약을 안 먹이니까 이 꼴이 난 거 아니야?"
"넌 그냥 아저씨가 깨어나길 바라지 않는거잖아."
"왜? 너 혼자 독차지하려고?"
"아저씨가 우리한테 뭔데? 가족? 인질 아니고?"
쌍둥이 두 사람의 병적인 의존은 여름부터 방치된 상처처럼 곪아 터졌고, 마침내 그것이 폭발했다. 카포네는 비닐 가방을 들고 두사람 사이에서 어쩔 줄 모르면서 서 있었다. 세 사람은 말없이 비를 맞으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7.
카포네가 가져온 비닐 가방에 든 현금다발은 세 사람이 한동안 지내기에 충분한 돈이었다. 다만 돈 냄새를 맡은 과거 조직원이 가출한 카포네를 발견하고 따라 붙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것은 오래 범죄조직 생활을 한 자라면 귀신처럼 감지할 수 있는 감각이었다. 밀크와 밀키는 집안의 불을 모조리 끄고, 어둠 속에서 소파에 둘러앉아 있었다. 집안의 고요함과 함께 옆집에서 우당탕 물건을 떨구는 소리가 났다.
밀크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가 금세 다시 손으로 비벼껐다. 밀키도 초조한 듯 손에 든 라이터를 껐다 켰다 했다. 밀키가 쉰 목소리로 입을 뗐다.
"아저씨 기억 다 돌아오면, 우린 어떻게 되는 거야."
"씨발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제발 좀."
그 순간, 쿵, 쿵, 쿵, 하고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잠시 간격을 두고,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곤 다시는 쿵쿵대는 노크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괴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열어 새끼들아, 대부님이랑 볼일이 좀 있다고!"
밀키는 현관문 앞으로 가서 숨을 죽이고 문에 난 구멍으로 바깥 상황을 파악했다. 밀크는 부엌에 가서 싱크대 서랍을 열어 식칼을 꺼내 들었다. 카포네는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서 귀를 틀어막고 낡은 시계의 초침을 올려다본다. 밖에 있는 괴한은 총 3명이라고 밀키가 손가락을 세 개 펴 보인다. 문 너머로 낮은 웅성거림과 발소리, 그리고 묵직한 지퍼가 달린 가방을 끄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저씨 약은 그만 먹이자."
"지금 그런 소리 할 때가 아니라고."
밀키는 현관에 놓여있던 야구방망이를 집어들었다. 쿵, 쿵, 쿵, 하고 문짝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문 따."
카포네는 무언가에 맞은 듯이 벌떡 일어나서 거실 탁자의 서랍에 든 권총을 꺼내 든다.
"저 사람들 들어오면 우리 끝장이야."
"그럼? 미리 집단 자결이라도 할까?"
문의 잠금장치가 결국 부서지고 문이 열렸다. 들어선 괴한의 얼굴이 낯설지 않은 듯 해 이전에 조직원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런 사실을 모두가 인식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들어오자마자 패닉 한 카포네가 총으로 그의 머리를 쏴 버렸기 때문이다. 탕! 아파트에 총성이 울리자 부산스럽던 이웃집들도 일시에 조용해졌다. 현관 앞에 서 있던 밀키가 피를 뒤집어썼다. 나머지 괴한 두 명은 가방도 두고서 쏜살같이 도망쳤다.
"일단 시체부터 치우자."
8.
"돈 받는 거처럼 움직여. 이웃에 신고라도 들어오면 좆되는거야."
밀크는 괴한의 시체에 가루 세탁세제를 뿌린 후, 그들이 들고 온 가방에 넣고, 다시 이삿짐용 캐리어에 처박았다. 그러는 동안 밀키는 잔뜩 뒤집어쓴 피를 씻어냈다. 그리고 전등 교체를 미룬 탓에 깜빡이는 형광등 아래에서 집안에 튄 핏자국을 강박적으로 닦아냈다.
비가 그친 새벽 3시, 막 꺼진 가로등 밑 골목으로 카포네와 쌍둥이가 끌고 나온 시체 꾸러미는 어깨에서 미끄러질 때마다 피를 뚝뚝 흘렸다. 빗물에 엉겨 묻어나는 핏자국은 헨젤과 그레텔이 남긴 부스러기처럼 반짝이고, 공기는 마른 비린내로 축축했다. 시체는 그대로 깊은 하수구 속으로 처박았다. 어차피 제대로 된 인생을 살던 놈도 아닐 테니 찾는 이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세 사람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현관문이 박살 나 있고 집 곳곳에 아직도 닦지 못한 혈흔이 튀어 있었다.
"그냥 시원하게 집에 불 지를까?"
"진정 좀 해. 오늘은 호텔 가서 자자."
"아저씨 기억 돌아온 거 아냐? 총 똑바로 쐈잖아."
"잠만 잘 거거든? 어차피 지금 약 먹일 수도 없어."
9.
도심 외곽 국도 옆의 싸구려 네온 간판이 기어코 비를 이겨내지 못하고 깜빡였다. 모텔에, 세 사람은 침대 하나짜리 방을 잡았다. 밀키는 불쌍한 척을 하며 프런트에서 대실 요금을 흥정했다. 밀크는 실내에 돈다발과 권총과 약병이 든 낡은 가죽 가방을 내려놓고, 방음 상태부터 창문 잠금장치까지 확인한다. 카포네는 구석 의자에 주저앉아 천장 매연 자국만 멍하니 올려다본다. 좁은 실내엔 표백제 냄새와 담배 냄새가 뒤섞여 있다. 싸늘하게 식은 형광등 아래, 셋의 그림자가 겹쳤다가 갈라진다. 밀크가 먼저 말한다.
"오늘만 버티면 돼. 해 뜨면 사설 이삿짐센터 불러서 집 통째로 뜯어버리고, 남쪽으로 가자."
"집만 어떻게 해서 끝날 일이면 좋겠네."
"남쪽에도 조직 창고가 있다."
쌍둥이 두 사람이 동시에 카포네를 쳐다본다. 출소 이후 이토록 또렷하게 말하는 카포네는 처음 보는 것이다.
"약 드실 시간이 지났어."
"밀크, 그만해. 이거 우리 욕심이잖아."
"너는 욕심이 없는 것처럼 구네?"
"너는 뭐가 두려운 건데? 아저씨가 돌아오면, 우리 곁에 안 있을까 봐?"
"아니라고, 그딴 게 아니라고,"
"밀크."
카포네가 무심히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두 사람이 그를 돌아보았다.
"나는 쉽게 죽지 않을 거야. 약속하마."
밀크는 너무 눈부신 것을 본 사람처럼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밀키는 잠시 후 그 말에 담긴 맥락을 이해한다. 이때까지 밀크가 더 강한 약을 아저씨에게 먹여온 이유는 아저씨가 제정신을 찾으면 죽으려 할까 봐 였던 것이다.
"자, 약 먹을 시간이야."
카포네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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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이 과민한 독자는 조심할 것.
※저(수생)와 쟤왜저래님, 멜유님, 박소율님, 호랑님의 릴레이 소설입니다. 총 5편중 제 1편.
1.
파리 코뮌이 붕괴한 지 1년이었다. 코뮌의 잿더미 위로 어두운 운명이 스멀거리며 일어났다. 그 겨울, 도시엔 아직 총알 자국이 남은 담벼락들이 있었고, 불타버린 예술가들의 시가 구겨진 채 떠돌았다. 쇠락한 영혼들이 골목마다 도둑고양이의 울음소리처럼 떠돌았다. 이곳 파리 마레 지구의 한 다락방에 베를렌느가 있다. 방안의 벽지는 젖었고, 고장 난 창문은 오래전부터 닫힌 채로 방치되어 있다. 방 안은 술병과 찢긴 종잇조각들로 어질러져 있다. 촛불 하나만이 흔들리며 빛을 준다. 아내는 떠났고 아이는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으며, 그의 손에는 오로지 술병과, 누렇게 바랜 랭보의 시집이 남아 있었다. 그 시집 속에 있는 세상에 없던 단어들, 문법을 거부하는 운율, 문장 사이로 스며드는 어떤 존재들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한때 그는 확신했다. 그 시는 단순한 문학이 아니라, 진리를 소환하는 주문이다.
어둑어둑한 방안에 노크 소리가 울린다. 책상에 엎드린 채로 술과 아편에 취해 잠든 베를렌느는 깨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문은 저절로 열린다. 랭보가 돌아온 것이다! 랭보는 천천히, 느긋하게 안으로 걸어 들어온다. 머리칼은 살짝 젖었고, 손에는 원고가 한 묶음 들려 있다. 여전히 똑같이 어린 얼굴에, 웃을 줄 아는 입매, 반항적인 눈썹이다. 그러나 그의 입술은 푸르고, 얼굴은 흡사 죽은 자처럼 창백하고, 그 눈빛은 사람의 것이 아닌 듯 빛난다.
“랭보…?”
“내가 아니라 시가 돌아온 거야. 당신에게로.”
“너는… 죽은 줄로만… 브뤼셀 이후, 넌…어디에도,”
“나는 어디에도 가지 않았어.”
랭보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한 발짝 다가올 때마다, 더러운 바닥의 먼지가 마치 숨 쉬듯 일렁였다.
“나는 단지 언어의 밑바닥까지 내려갔을 뿐이야.”
베를렌느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는 온몸을 덜덜 떨며, 랭보를 바라보았다. 그가 죽은 자의 그림자인지, 환상인지, 악마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를 부른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랭보는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이 그 시를 완성해야 해.”
랭보는 테이블 위에 낡은 원고 한 묶음을 내려놓았다. 아직 쓰이지 않은 종이들. 하지만 바스락거리며 살아 있는 듯한 그 기척에 베를렌느는 직감했다. 저것은 피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이 빈 원고지는 무언가를 담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빈 관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 불타는 관의 마지막 주검이 되리라는 것을 어쩐지 모르게 마음으로 알았다.
2.
베를렌느는 며칠 밤을 거의 자지 못했다. 그 종이 묶음이 방 안에 놓인 순간부터, 그는 한순간도 평온할 수 없었다. 촛불은 음산하게 흔들렸고, 검은 방의 벽지는 밤마다 젖은 듯 축축하게 달라붙었다. 그러나 그는 피하지 않았다. 피할 수 없었다. 그는 알았다. 그 종이가, 그 시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 시는 완성을 원했다. 그 시가 단어들을, 심장을, 피를 바치기를 원했다. 랭보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가끔 시체처럼 나타났다가, 마치 시냇물 속의 어두운 반사광처럼 스르르 사라졌다.
어느 날 밤, 베를렌느는 떨리는 손으로 원고를 집어 들었다. 펜촉이 잉크에 닿자, 방 안의 공기가 싸늘하게 바뀌었다. 첫 줄은 이미 적혀 있었다. 그가 쓴 적이 없음에도, 그의 글씨였다. 먼지가 날던 공간이, 마치 숨을 죽이는 듯 멈췄다. 이제 촛불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그 순간, 종이 아래에서 무언가가 울었다. 마치 얇은 얼음 아래에 갇힌 물고기의 입들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올라오려고 발버둥 치는 소리처럼 종이가 울부짖는다. 그 비명에 베를렌느는 양팔로 귀를 틀어막고 신음했다.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도 울음소리처럼 바뀌었고, 잉크는 언제부턴가 검붉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 써 내려갔다. 그리고 그 순간, 방 안이 무너졌다. 베를렌느는 자신이 여전히 방 안에 있다고 믿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고장 난 창문은 사라졌고, 바닥은 물처럼 출렁이며 검게 가라앉고만 있었다. 시 속이었다. 그는 그 자신을 압도한 그 시 안에 갇혀 있었다.
사방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랭보의 목소리, 어린아이의 목소리, 여자와 남자의 비명이 섞인 목소리, 그것들은 시의 문장 하나하나에서 스며 나와, 베를렌느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사방이 벽이었다. 그리고 벽은 시였다. 바닥도 시였다. 자신의 피부도 시였다. 그 끔찍한 입들이 터무니없는 시를 남발하며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는 붕괴했다. 참지 못해 숨을 몰아쉬었고, 사방을 채운 시가 그의 입안으로 밀려들었다. 종이가 혀를 덮었고, 잉크가 목구멍을 태우며 심장으로 흘렀다.
3.
베를렌느는 다시 방 안에서 깨어났다. 손에는 펜이 쥐어져 있었고, 쓰던 시는 완성되어 있었다. 랭보가 들어온 이후, 베를렌느의 집은 더 이상 평범한 공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서서히 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사소했다. 새벽이면 벽지에 물방울이 맺혔다. 처음엔 습기라 여겼다. 하지만 물방울이 아닌 땀이었다. 살처럼, 긴장한 피부처럼 방 전체가 숨을 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따라 베를렌느의 피부도 박동했다. 시계는 거꾸로 돌았다. 오후 다섯 시에 멈춘 시계가 새벽 세 시에 울렸고, 시간이 몇 시인지 낮인지 밤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더 기이한 건, 잊은 줄 알았던 과거의 시들이 자꾸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불태웠던 초고가 책상 서랍 안에 다시 꽂혀 있었고, 찢어버린 구절들이 화장실 거울 안쪽에 새겨져 있었다. 마치 집이, 시를 기억하는 몸 이기라도 한 것처럼. 베를렌느는 그 모든 기이한 징후를 랭보 탓으로 돌렸다.
가끔, 베를렌느는 자신이 버린 시 초고를 마루 밑에서, 침대 시트 아래에서, 혹은 하수도 뚜껑 위에서 발견하곤 했다. 심지어는 랭보의 옷 주머니 속에서조차 시가 있었다. 하지만 그에 관해 묻는 건 허사였다. 랭보는 대체로 침묵했고, 가끔은 시적인 은유로만 대답했다. 그의 말은 마치 불타는 강에 떠다니는 문자 같았다.
“어떻게 된 거지....”
베를렌느는 머리를 감싸 쥐며 중얼거렸다. 그때 랭보가 뒤에서 말했다.
“시어는 돌아와. 영혼에서 나온 건 반드시, 그 창조주에게로 돌아오거든.”
그날 밤, 베를렌느는 랭보와 같은 방에서 잠들었다. 랭보는 좁은 침대 위 베를렌느의 곁에 조용히 누워, 창밖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또 다시, 베를렌느는 스스로 꿈을 꾼다고 믿었다.
그 꿈에서, 랭보는 거대한 백색의 책 앞에 서 있었다. 그 책은 성경도, 시집도 아니었다. 그것은 세계의 언어를 수놓은 원시적인 기록이며, 원초적 장부였다. 랭보는 책장을 넘겼고, 페이지 한 장을 뜯었다. 그 조각은 새하얀 눈이 되었고, 눈은 점점 커다란 형체를 갖춰갔다. 그것은 신의 눈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언어로 만들어진 눈이었다.
“신의 눈은 문장이야.”
랭보는 선언하듯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걸 찢을 거야. 인간의 언어를 통해.”
베를렌느는 자신이 피투성이인 채 그 곁에 서 있다는 걸 알았다.
그의 손엔 칼이 들려 있었다.
4.
베를렌느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깼다. 양 뺨은 젖어 있었고, 손끝이 서늘했다. 뼛속이 차갑게 식었다. 손에 들려 있던 건, 진짜 칼이다. 부엌 서랍에서나 나올 법한, 칼이다. 그리고 옆에 랭보가 누워 있었다. 셔츠가 벌어져 있었고, 가슴엔 핏빛으로 시구가 새겨져 있었다. 베를렌느는 헉 하고 숨을 삼켰다. 그 순간 랭보가 천천히 눈을 떴다. 의외로 고요한 얼굴이었다. 고통도, 분노도 없다. 랭보는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지옥은 이제 당신 몫이야, 폴 베를렌느.”
그 한마디에, 방 안의 촛불이 훅 꺼졌다. 그 순간 베를렌느는 알았다.
지옥은 불이 아니라,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5.
밤마다 두 사람은 불에 데인 사람처럼 땀에 젖어, 언어를 토해냈다. 두 사람은 불꽃의 고장을 살아 지났다.
그들이 쓰는 글은 더 이상 프랑스어가 아니었다. 형체도 없고, 법칙도 없었다. 종이에 박힌 문장들은 마치 살아 있는 듯 꿈틀거리다가, 어느 순간엔 저절로 불붙어 타올랐다. 그리고 그 타오름은 종이에서 멈추지 않았다. 잉크는 핏줄처럼 고동쳤고, 펜촉은 이빨처럼 날카로워졌다. 어느 날 밤, 종이 위에서 글자가 뚝 떨어져 랭보의 손등을 물었다. 그 피로 랭보는 시를 계속해서 써 내려갔다.
그러다 어느새, 그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는 시인이 아니야. 나는 살아 있는 도서관이야. 지옥에서 도망친 단어들이 내 머리 안에 살아.”
그것은 독백인지 고백인지 애매했다. 베를렌느는 대답하지 못했다. 랭보도 애초에 대답을 바라지 않았다.
시들어가는 꽃 같기도 하고, 썩어가는 고깃덩이 같기도 한 서로의 모습을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랭보를 사랑하는지, 아니면 단어 너머에 있는 저주를 사랑하는 건지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내가...쓴 것들이 그를 살게 해.”
그건 깨달음이 아니라 악몽이었다. 그는 도망치려 했다. 짐을 쌌고, 문고리를 돌렸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랭보가 조용히 말했다.
“나를 버릴 수 없어, 폴. 나는 당신이 쓴 시야.”
그 말에 그는 얼어붙었다. 그날 밤, 베를렌느는 단 한 줄의 시도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펜을 서랍으로 치우고, 잉크병을 닫아서 선반에 처박았고, 원고를 찢어 벽난로에 넣었다.
그러자 기적처럼, 랭보가 사라졌다.
다음날 아침, 방은 조용했고, 침대는 비어 있었다. 젖은 종이도, 고동치는 잉크도, 책상에 머리를 묻은 소년도 없었다. 베를렌느는 안도하며 자유를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하루뿐이었다. 그는 다시 시를 쓰고 싶어졌다. 그 충동은 말로 설명할 수도 없었다. 마치 가려운 곳을 긁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느낌이나, 악성 기침 같았다. 그는 결국, 다시 펜을 들었다. 단 하나의 줄만, 단 하나의 단어만 쓰기로 했다.
그리고 그가 점 하나를 찍는 순간! 문은 저절로 열렸다. 문간에는 랭보가 서 있었다. 마치 그의 운명적인 결말의 시작을 예증하듯이 그렇게 서 있었다.
은근한 눈빛, 창백한 미소, 부서질 듯한 몸으로, 그는 또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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