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이 과민한 독자는 조심할 것.

※저(수생)와 쟤왜저래님, 멜유님, 박소율님, 호랑님의 릴레이 소설입니다. 총 5편중 제 1편.

 

 

1.

파리 코뮌이 붕괴한 지 1년이었다. 코뮌의 잿더미 위로 어두운 운명이 스멀거리며 일어났다. 그 겨울, 도시엔 아직 총알 자국이 남은 담벼락들이 있었고, 불타버린 예술가들의 시가 구겨진 채 떠돌았다. 쇠락한 영혼들이 골목마다 도둑고양이의 울음소리처럼 떠돌았다. 이곳 파리 마레 지구의 한 다락방에 베를렌느가 있다. 방안의 벽지는 젖었고, 고장 난 창문은 오래전부터 닫힌 채로 방치되어 있다. 방 안은 술병과 찢긴 종잇조각들로 어질러져 있다. 촛불 하나만이 흔들리며 빛을 준다. 아내는 떠났고 아이는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으며, 그의 손에는 오로지 술병과, 누렇게 바랜 랭보의 시집이 남아 있었다. 그 시집 속에 있는 세상에 없던 단어들, 문법을 거부하는 운율, 문장 사이로 스며드는 어떤 존재들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한때 그는 확신했다. 그 시는 단순한 문학이 아니라, 진리를 소환하는 주문이다.

어둑어둑한 방안에 노크 소리가 울린다. 책상에 엎드린 채로 술과 아편에 취해 잠든 베를렌느는 깨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문은 저절로 열린다. 랭보가 돌아온 것이다! 랭보는 천천히, 느긋하게 안으로 걸어 들어온다. 머리칼은 살짝 젖었고, 손에는 원고가 한 묶음 들려 있다. 여전히 똑같이 어린 얼굴에, 웃을 줄 아는 입매, 반항적인 눈썹이다. 그러나 그의 입술은 푸르고, 얼굴은 흡사 죽은 자처럼 창백하고, 그 눈빛은 사람의 것이 아닌 듯 빛난다.

“랭보…?”

“내가 아니라 시가 돌아온 거야. 당신에게로.”

“너는… 죽은 줄로만… 브뤼셀 이후, 넌…어디에도,”

“나는 어디에도 가지 않았어.”

랭보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한 발짝 다가올 때마다, 더러운 바닥의 먼지가 마치 숨 쉬듯 일렁였다.

“나는 단지 언어의 밑바닥까지 내려갔을 뿐이야.”

베를렌느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는 온몸을 덜덜 떨며, 랭보를 바라보았다. 그가 죽은 자의 그림자인지, 환상인지, 악마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를 부른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랭보는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이 그 시를 완성해야 해.”

랭보는 테이블 위에 낡은 원고 한 묶음을 내려놓았다. 아직 쓰이지 않은 종이들. 하지만 바스락거리며 살아 있는 듯한 그 기척에 베를렌느는 직감했다. 저것은 피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이 빈 원고지는 무언가를 담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빈 관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 불타는 관의 마지막 주검이 되리라는 것을 어쩐지 모르게 마음으로 알았다.

 

2.

베를렌느는 며칠 밤을 거의 자지 못했다. 그 종이 묶음이 방 안에 놓인 순간부터, 그는 한순간도 평온할 수 없었다. 촛불은 음산하게 흔들렸고, 검은 방의 벽지는 밤마다 젖은 듯 축축하게 달라붙었다. 그러나 그는 피하지 않았다. 피할 수 없었다. 그는 알았다. 그 종이가, 그 시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 시는 완성을 원했다. 그 시가 단어들을, 심장을, 피를 바치기를 원했다. 랭보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가끔 시체처럼 나타났다가, 마치 시냇물 속의 어두운 반사광처럼 스르르 사라졌다.

어느 날 밤, 베를렌느는 떨리는 손으로 원고를 집어 들었다. 펜촉이 잉크에 닿자, 방 안의 공기가 싸늘하게 바뀌었다. 첫 줄은 이미 적혀 있었다. 그가 쓴 적이 없음에도, 그의 글씨였다. 먼지가 날던 공간이, 마치 숨을 죽이는 듯 멈췄다. 이제 촛불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그 순간, 종이 아래에서 무언가가 울었다. 마치 얇은 얼음 아래에 갇힌 물고기의 입들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올라오려고 발버둥 치는 소리처럼 종이가 울부짖는다. 그 비명에 베를렌느는 양팔로 귀를 틀어막고 신음했다.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도 울음소리처럼 바뀌었고, 잉크는 언제부턴가 검붉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 써 내려갔다. 그리고 그 순간, 방 안이 무너졌다. 베를렌느는 자신이 여전히 방 안에 있다고 믿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고장 난 창문은 사라졌고, 바닥은 물처럼 출렁이며 검게 가라앉고만 있었다. 시 속이었다. 그는 그 자신을 압도한 그 시 안에 갇혀 있었다.

사방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랭보의 목소리, 어린아이의 목소리, 여자와 남자의 비명이 섞인 목소리, 그것들은 시의 문장 하나하나에서 스며 나와, 베를렌느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사방이 벽이었다. 그리고 벽은 시였다. 바닥도 시였다. 자신의 피부도 시였다. 그 끔찍한 입들이 터무니없는 시를 남발하며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는 붕괴했다. 참지 못해 숨을 몰아쉬었고, 사방을 채운 시가 그의 입안으로 밀려들었다. 종이가 혀를 덮었고, 잉크가 목구멍을 태우며 심장으로 흘렀다.

 

3.

베를렌느는 다시 방 안에서 깨어났다. 손에는 펜이 쥐어져 있었고, 쓰던 시는 완성되어 있었다. 랭보가 들어온 이후, 베를렌느의 집은 더 이상 평범한 공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서서히 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사소했다. 새벽이면 벽지에 물방울이 맺혔다. 처음엔 습기라 여겼다. 하지만 물방울이 아닌 땀이었다. 살처럼, 긴장한 피부처럼 방 전체가 숨을 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따라 베를렌느의 피부도 박동했다. 시계는 거꾸로 돌았다. 오후 다섯 시에 멈춘 시계가 새벽 세 시에 울렸고, 시간이 몇 시인지 낮인지 밤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더 기이한 건, 잊은 줄 알았던 과거의 시들이 자꾸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불태웠던 초고가 책상 서랍 안에 다시 꽂혀 있었고, 찢어버린 구절들이 화장실 거울 안쪽에 새겨져 있었다. 마치 집이, 시를 기억하는 몸 이기라도 한 것처럼. 베를렌느는 그 모든 기이한 징후를 랭보 탓으로 돌렸다. 

가끔, 베를렌느는 자신이 버린 시 초고를 마루 밑에서, 침대 시트 아래에서, 혹은 하수도 뚜껑 위에서 발견하곤 했다. 심지어는 랭보의 옷 주머니 속에서조차 시가 있었다. 하지만 그에 관해 묻는 건 허사였다. 랭보는 대체로 침묵했고, 가끔은 시적인 은유로만 대답했다. 그의 말은 마치 불타는 강에 떠다니는 문자 같았다.

“어떻게 된 거지....”

베를렌느는 머리를 감싸 쥐며 중얼거렸다. 그때 랭보가 뒤에서 말했다.

“시어는 돌아와. 영혼에서 나온 건 반드시, 그 창조주에게로 돌아오거든.”

그날 밤, 베를렌느는 랭보와 같은 방에서 잠들었다. 랭보는 좁은 침대 위 베를렌느의 곁에 조용히 누워, 창밖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또 다시, 베를렌느는 스스로 꿈을 꾼다고 믿었다.

그 꿈에서, 랭보는 거대한 백색의 책 앞에 서 있었다. 그 책은 성경도, 시집도 아니었다. 그것은 세계의 언어를 수놓은 원시적인 기록이며, 원초적 장부였다. 랭보는 책장을 넘겼고, 페이지 한 장을 뜯었다. 그 조각은 새하얀 눈이 되었고, 눈은 점점 커다란 형체를 갖춰갔다. 그것은 신의 눈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언어로 만들어진 눈이었다.

“신의 눈은 문장이야.” 

랭보는 선언하듯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걸 찢을 거야. 인간의 언어를 통해.”

베를렌느는 자신이 피투성이인 채 그 곁에 서 있다는 걸 알았다.

그의 손엔 칼이 들려 있었다.

 

4.

베를렌느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깼다. 양 뺨은 젖어 있었고, 손끝이 서늘했다. 뼛속이 차갑게 식었다. 손에 들려 있던 건, 진짜 칼이다. 부엌 서랍에서나 나올 법한, 칼이다. 그리고 옆에 랭보가 누워 있었다. 셔츠가 벌어져 있었고, 가슴엔 핏빛으로 시구가 새겨져 있었다. 베를렌느는 헉 하고 숨을 삼켰다. 그 순간 랭보가 천천히 눈을 떴다. 의외로 고요한 얼굴이었다. 고통도, 분노도 없다. 랭보는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지옥은 이제 당신 몫이야, 폴 베를렌느.”

그 한마디에, 방 안의 촛불이 훅 꺼졌다. 그 순간 베를렌느는 알았다.

지옥은 불이 아니라,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5.

밤마다 두 사람은 불에 데인 사람처럼 땀에 젖어, 언어를 토해냈다. 두 사람은 불꽃의 고장을 살아 지났다.

그들이 쓰는 글은 더 이상 프랑스어가 아니었다. 형체도 없고, 법칙도 없었다. 종이에 박힌 문장들은 마치 살아 있는 듯 꿈틀거리다가, 어느 순간엔 저절로 불붙어 타올랐다. 그리고 그 타오름은 종이에서 멈추지 않았다. 잉크는 핏줄처럼 고동쳤고, 펜촉은 이빨처럼 날카로워졌다. 어느 날 밤, 종이 위에서 글자가 뚝 떨어져 랭보의 손등을 물었다. 그 피로 랭보는 시를 계속해서 써 내려갔다.

그러다 어느새, 그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는 시인이 아니야. 나는 살아 있는 도서관이야. 지옥에서 도망친 단어들이 내 머리 안에 살아.”

그것은 독백인지 고백인지 애매했다. 베를렌느는 대답하지 못했다. 랭보도 애초에 대답을 바라지 않았다.

시들어가는 꽃 같기도 하고, 썩어가는 고깃덩이 같기도 한 서로의 모습을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랭보를 사랑하는지, 아니면 단어 너머에 있는 저주를 사랑하는 건지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내가...쓴 것들이 그를 살게 해.”

그건 깨달음이 아니라 악몽이었다. 그는 도망치려 했다. 짐을 쌌고, 문고리를 돌렸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랭보가 조용히 말했다.

“나를 버릴 수 없어, 폴. 나는 당신이 쓴 시야.”

그 말에 그는 얼어붙었다. 그날 밤, 베를렌느는 단 한 줄의 시도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펜을 서랍으로 치우고, 잉크병을 닫아서 선반에 처박았고, 원고를 찢어 벽난로에 넣었다.

그러자 기적처럼, 랭보가 사라졌다.

다음날 아침, 방은 조용했고, 침대는 비어 있었다. 젖은 종이도, 고동치는 잉크도, 책상에 머리를 묻은 소년도 없었다. 베를렌느는 안도하며 자유를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하루뿐이었다. 그는 다시 시를 쓰고 싶어졌다. 그 충동은 말로 설명할 수도 없었다. 마치 가려운 곳을 긁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느낌이나, 악성 기침 같았다. 그는 결국, 다시 펜을 들었다. 단 하나의 줄만, 단 하나의 단어만 쓰기로 했다.

그리고 그가 점 하나를 찍는 순간! 문은 저절로 열렸다. 문간에는 랭보가 서 있었다. 마치 그의 운명적인 결말의 시작을 예증하듯이 그렇게 서 있었다.

은근한 눈빛, 창백한 미소, 부서질 듯한 몸으로, 그는 또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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