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롬키이, 주니어커트. ㅈㅜ제롬, ㅂㅓㅁ키이스.

※그레이 하우스 스포일러. 🎃.

1.

제롬이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키이스에게도 계획이 있었다. 누구나 갑작스러운 불행이 닥쳐오기 전까지는 그럴듯한 계획이 있기 마련이다. 키이스는 제롬이 영화배우를 그만두게 된다고 해도 괜찮도록 좋은 위치에 넓은 정원이 딸린 집을 마련해뒀다. 언젠가 어린 시절 같이 살자고 약속했을 때 막연히 상상했던 그대로, 하얀 벽과 붉은 지붕을 가진 아름다운 2층 저택이었다. 정원에는 한 쌍의 안락의자 옆에 덩굴장미가 때맞춰 피어났다. 단, 이 집에는 딱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바로 유령이 나오기로 유명하기 때문에 저렴한 가격과 좋은 위치에도 불구하고 입주 후 며칠을 견디지 못하고 모두가 집을 되판다는 것이었다. 저택 구입 당시 키이스는 유령 따위는 믿지 않았기 때문에 무신경하게 계약했다.

 

2.

그런데 기이하게도 유령은 정말로 있었다. 키이스가 술에 취해 텅 빈 침대에서 잠을 자다 깨면 옆에서 제롬의 호흡, 온기, 냄새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 환상에 젖어 드는 것은 너무나 달콤했다. 키이스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략 감지했다. 이 집 안에서는 죽은 제롬을 만날 수 있다. 앞으로 제롬의 유령과 함께 할 수 있다. 키이스는 자신의 믿음을 수정했다. 어둑어둑한 집 안에서라면 아직 그의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다.

아침 식사 중에, 제롬은 식탁 맞은편에 앉아서 싱글벙글 웃으며 키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키이스, 어, 어서 먹어! 출근 해야지."

"제롬 네 것도 남겨 둘까?"

"난, 난 먹을 필요 없단거 알잖아."

"그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있어야 해. 절대 아무나 문 열어주면 안돼."

"내, 내가 애냐?"

"다녀올게."

키이스는 머리를 매만지며 현관에 걸린 거울 너머로 제롬이 비치지 않는다는 것을 봤지만 그냥 무시했다. 제롬은, 제롬의 유령은 현관문이 닫힐 때까지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매일 같은 그 모습을 본 키이스는, 커트는 행복하게 극장으로 출근 할 수 있었다. 극장에서는 주니어가 기다리고 있었다. 주니어가 바닥에 앉아서 기지개를 켜며 불량스럽게 까딱 인사했다.

"어라,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

"으음, 뭐, 집에 기다리는 가족이 있으니까."

"가족도 있었어요?!"

"뭐야, 그 의외라는 반응은, 상처 준다?"

"다음에 소개해주세요. 결혼하신 줄 몰랐어요."

"아아, 결혼은 아니고, 동거."

"대체 어느 천사 같으신 분의 희생인지 참..."

"말 다했냐? 연습이나 시작하자."

"예이~"

 

3.

바깥 바람을 몰고 집에 돌아온 키이스는 외투를 벗어서 현관의 옷걸이에 걸었다. 현관에는 제롬이 다소곳이 단좌하고 있었다. 

"뭐해?"

"뭐 부터 할래? 목욕, 식사, 아니면... 나?"

키이스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이런 건 어디서 봤어?"

"나, 나도 알건 다 알지..."

"알긴 뭘 알아."

"그래서, 뭐부터 할 거야?"

"너."

그리고 두사람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입맞춤했다. 키이스는 정신없이 빠져드는 꿈결 같은 느낌과 함께 제롬의 향기를 흠뻑 들이쉬었다. 제롬과의 행위는 모두 현실감이 완전히 박탈된 환상적인 느낌만을 주었다. 따뜻하고 흐물흐물한 느낌이 애틋한 가슴을 가득 채워서 곧 온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현관에 주저앉은 키이스의 한손에서 술병이 스스르 떨어졌다. 틱, 하고 유리병이 리놀륨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제롬이 사라졌다.

"아..."

키이스는 덤덤히 집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부엌에 줄지은 꽃병들에 약간 마른 꽃들이 알록달록 꽂혀 있었다. 키이스는 한방에 남은 술을 다 마시고 부엌에 줄지어있는 병을 하나 더 추가했다. 그러자 안방에서 제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키이스, 목욕물 받아놓을게!"

키이스는 안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벗었다. 제롬은 이미 안방 욕실에서 물장난을 치고 있다. 두 사람은 좁지도 넓지도 않은 욕조에 함께 들어간다.

"아... 응. 우리 이러니까 꼭 부부 같네."

"뭐, 뭐라고?"

"글쎄, 오늘 직장에서, 어떤 녀석이 그랬어. 나랑 같이 살아주는 건 천사의 희생이란다."

"그럼 천, 천사한테 잘해, 너 술, 술도 좀 줄이구..."

"응, 그럴게. 내일부터는 줄일게."

"또, 또 거짓말!"

제롬이 장난스레 키이스가 밉다는 듯 욕조의 물을 튀기고, 키이스도 함께 물장구를 치며 지지 않는다.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린다. 목욕이 끝난 뒤 제롬은 침대에 앉은 키이스의 머리를 수건으로 말려 준다. 곧이어 두사람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로의 온기에 기대어서 함께 잠든다.

 

4.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느낌에 어둠 속에서 홀로 정신을 차린 키이스는 주변을 감싸는 압도적인 추위에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본능적으로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위스키병을 집어 들고 아무런 망설임 없이 몇모금 마신다. 그리고 마치 무인도에 조난당한 사람이 간절히 SOS 신호를 보내듯 눈을 질끈 감는다. 그러고 기다리자 부엌에서 맛있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아, 제롬이 먼저 일어나서 아침 식사를 차리고 있는 것이다. 바보, 오늘은 휴일이니까 더 자도 되는데, 하고 생각하며 굳은 몸을 일으켜서 부엌으로 간다. 

"주니어?"

"어, 깨셨어요? 무슨 집에 먹을게 하나도 없어요? 좀 사 왔어요."

"어, 우리 집엔 어떻게..."

"문, 안 잠그셨던데요?"

프렌치 토스트를 다 만들어 식탁에 쾌활한 동작으로 놓은 주니어는, 들고 온 자루안에 줄지어있는 술병들을 마구 쓸어 담았다. 키이스는 머리가 어질어질 했다. 머리를 부여잡고 벽에 기대서, 백년만에 걷어진 커튼 사이로 집에 들어오는 햇빛을 멍하니 봤다. 햇빛 아래로 제롬의 존재감이 느껴질락 말락 해서 또 한손에 든 술병으로 목을 축였다. 그러자 주니어가 술병을 들고 가서 속절없이 마지막 동아줄이 빼앗겼다.

"그만! 좀! 마셔요. 이러다 죽겠어요."

"뭐? 뭐라고...?"

주니어는 집안을 화통하게 청소하더니 술병이란 술병은 모조리 가져와서 싱크대에 부어 내버렸다. 키이스는 그동안 소파에 앉아서 벅찬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애썼다. 알코올이 없으면 더 이상 제롬을 만날 수 없다. 술이 깨자 점점 엉망진창인 집안 꼴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동안 한 환상 속의 식사는 진짜 음식이 아니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주니어는 무엇이 쓰레기고 무엇이 가재인지 판별하려고 잘생긴 눈매를 가늘게 뜨고 찌푸려가며 물건을 차곡차곡 버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체 물건이 왜 2개씩 있는 거예요?"

"아..."

키이스는 그 순간 간절한 그리움 때문에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제롬, 네가 보고 싶어. 지금 내 꼴을 보면 너는 뭐라고 할까. 나는 알코올 없이는 너를 상상하지도 못하고. 또 상상 속의 너는 너무나 다정해서, 나도 너한테 그렇게 박하게 굴 필요 없었는데,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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