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곤투가 회귀를 거듭하면서 n 회차에 들어선 if, 극 자체의 완전 재창작을 한 수준의 미친 적폐 2차임에 유의... 곤투에서 곤투를 빼고 내 취향 넣음. 정말 뭐든지 괜찮은 분 전용.

 

1.

오뉴월에 이른 뻐꾸기 소리가 시원한 바람과 함께 강연장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서울 모처에서 열린 대중 강연을 위해 역사 강사인 김옥균이 초청되었다. 그리고 그 김옥균이라는 사람은 강연이 시작되기 전 삼삼오오 들어오는 사람들을 멍하니 보면서 내밀한 사색에 빠져 있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자신에게 있어서 매일 반복되는 정체불명의 악몽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다. 낯선 남자의 얼굴, 기울어지는 바닥, 총성, 익숙한 슬픔, 불타는 편지, 자신의 죽음, 이것들이 다 무엇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강의실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날 이때! 김옥균은 강연을 들으러 온 청중 중 낯익은 눈동자를 가진 남자를 보았다. 그였다. 꿈속에서 매일 밤 보던 그 눈동자다. 그 사람이다. 너무 놀란 나머지 옥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정신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로서는 모를 수가 없는 얼굴이다. 그런 기행을 벌이니 상대방도 당황하고 이쪽을 보는 것이 당연지사겠지,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전혀 당황하지를 않았다. 그리고 어떤 겸연쩍은 기색도 없이,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똑바로 옥균을 마주하지도 않은 채 중간쯤에 놓인 의자에 천천히 착석했다.

옥균은 강연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로 꿈속의 그 남자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관성의 신비로 어찌저찌 강연이 무사히 끝나고 사람들이 간동간동 짐을 싸기 시작했을 때였다. 옥균은 곧바로 튀어 나가 그 '꿈속의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저 실례지만 저희 어디서 본 적이 있지 않습니까?"

"아뇨, 저는 역사학과는 인연이 없는 사람입니다."

"혹시 어떤 일을 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보안 전문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건 대외비라."

"아, 네. 혹시 이름이...?"

"한정훈입니다."

"아아...한정훈, 한정훈이라...좋은 이름이네요. 저는 김옥균이란 사람 되겠습니다."

두 사람은 명함을 주고받으며 악수를 나눈다. 모순되게도, 모르니까 이름을 물어본 것인데 막상 듣고 나니 오래전부터 알아 온 이름 같다고 느낀다. 옥균은 매일 밤 꿈속에서 보는 사람이 약간의 미소를 고선 그럼 이만, 하고 강연장을 나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본다. 

"저, 연락해도 되겠습니까? 언제 밥 한번 사드릴게요."

정훈은 잠시 멈칫하더니 뒤돌아본다.

"네, 뭐 그러지요."

돌아온 대답이 뚱하니, 옥균은 이것이 시큰둥한 반응인지 그가 원래 감정 표현에 억제력이 있는 편인 것인지 알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렇게 정훈은 점차 옥균에게서 멀어진다. 정훈은, 걸어 나가면서, 그와 악수하는 순간에 튄 스파크 그리고 섬광처럼 떠오른 이미지들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한다.

 

2.

조선 말기, 서구 문물과 근대화 사상이 거세게 밀려드는 시대, 조정을 뒤흔드는 개화운동이 본격화된다. 개화파의 중심인물 김옥균, 조선의 내일을 바꾸겠다는 열망을 품고 고군분투하던 그 급진 개혁가 김옥균은 정변을 준비 중이고, 왕실은 그를 제거할 암살자 한정훈을 비밀리에 보낸다.

김옥균, 그는 개화당의 수장이며 조선을 바꾸기 위해 급진 정변을 도모하는 인물이었다.

한정훈, 그는 왕실 밀명으로 파견된 그림자였다. 목표를 죽이되 흔적을 남기지 않아야 했다.

이 운명의 실 두 줄이 만나서 한 번의 꼬임이 생긴 건 어느 겨울날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정체를 모른 채, 서양 책과 언어를 가르치는 비밀 모임에서 만났다. 

제물포 외곽에는 서양 서적을 몰래 보급하던 서점이 있었다. 한정훈은 김옥균의 동선을 파악하던 중, 그곳에서 우연히 서적 거래인으로 위장한 옥균을 처음 만난다. 정훈은 서점에서 일을 도우며 한동안 지냈다.

그가 하루는 말하기를,

“세상은 칼보다 단어에 무너집니다. 그 단어를 지키는 게 내 일이지요.”

정훈은 그가 바로 표적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그의 지적이고 결연한 태도에 이끌렸다. 왜 그 사람의 눈빛이 저를 이토록 흔드는지 의아해하면서....

정훈은 옥균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 조금 더 가까이 접근했다. 옥균 역시 이 낯선 사내의 침착함과 속을 감춘 미소에 이끌린다. 그렇게 둘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돈다.

'지금 내 심장이 임무를 거부하고 있다. 그는 나라의 적인가, 나의 사람인가?'

옥균의 정체를 알게 된 정훈은 비밀리에 김옥균을 감시하라는 명령을 수행한다. 하지만 조선이라는 늪에 갇힌 자신의 처지를 자각한 정훈은, 옥균의 연설과 철학에 끌려 점차 그를 이해하게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3.

겨울 저녁, 김옥균의 은신처이자 공부방에 두 사람분의 더운 숨이 교차한다. 창밖에는 눈이 소복이 내리고, 방 안은 등잔불 아래 정적이 흐른다. 중앙에 바둑판이 놓여 있고, 김옥균과 한정훈이 마주 앉아 있다. 이미 중반을 지난 바둑판 위에 흑과 백의 돌이 얽혀 있다.

옥균이 흑돌을 집어 들며 말한다.

“조선은 바둑 한 판과 같소. 돌 하나를 잘못 놓으면.... 수백 수가 꼬이게 되지요.”

정훈은 천천히 백돌을 내려놓으며 응수한다.

“선생, 그렇다면 지금 이 바둑은… 어느 쪽이 유리합니까?”

“글쎄, 형세로 보면 내가 밀리는 듯하지만… 장기전엔 변수가 많지요. 다만 중요한 건, 어떤 수를 두든 스스로를 속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

잠시 정적이 흐르고 바둑돌이 부딪히는 소리만이 적막을 채운다. 정훈은 한동안 말없이 판을 들여다보다, 불쑥 묻는다.

“왜 개화의 길을 가려 하십니까. 이 나라가, 이 민중이, 정말 그걸 감당할 수 있을 거라 믿으십니까?”

옥균이 미소지으며 시선을 떨군다.

“믿지 않습니다.”

정훈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믿지 않기에, 직접 움직입니다. 기다리기엔 시간이 없고, 물러서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으니까.”

“...믿지 않기에, 움직인다고요?”

그의 시선이 바둑판에서 옥균의 눈으로 옮겨간다. 서늘했던 정훈의 눈빛이, 처음으로 미세하게 흔들린다. 그 흔들림이 옥균의 눈동자에 박힌다.

“정훈, 그대는 언젠가 내 앞에 칼을 들고 설지도 모르겠군. 그래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사람 대 사람으로서 대화하고 싶소.”

정훈이 말없이 고개를 숙이며 다시 바둑판을 본다.

“방금 두신 그 수, 함정입니까?”

“그대가 이 수에 빠질 만큼 어리석은 사람이라면, 난 처음부터 바둑판을 펴지 않았을 거요.”

정훈은 백돌 하나를 들어 올렸다가, 잠시 고민하더니 천천히 내려놓는다. 일부러 옥균이 유도한 수에 놓는다. 그리고 눈을 마주치며 말한다.

“그럼 빠져드리겠습니다.”

그 순간, 등잔불이 흔들리며 정적이 흐른다. 흑과 백의 돌이 뒤얽힌 채, 둘 사이에는 흐릿한 미혹과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4.

개화당의 비밀 회합이 열리는 한성 외곽의 한 양반 가옥이 있다. 회합을 마친 뒤 사람들이 흩어지고, 마지막 남은 옥균과 정훈이 마당의 외진 처마 아래 마주 섰다.

“늦은 밤, 바람이 찹니다. 몸조심하셔야지요.”

“...정훈.”

정훈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옥균은 시선을 그에게 고정한 채,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한다.

“왕실에서 온 자라지요.”

불에 데어 뜨끔하듯 정훈은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러나 시선은 피하지 않는다.

"그렇다면요. 어쩌실 겁니까? 제가..."

“자네 같은 사람이 필요하네. 날 감시하려면 가까이 있어야겠지. 그럼, 나도 자네를 감시하겠네.”

옥균은 뒤돌아서 한 발짝 내딛는다.

“진심 없는 혁명가보다, 진심을 잃은 첩자가 더 외로울 테니. 허허.”

"왜...!"

옥균이 다시 돌아본다. 아, 슬픔과 연민이 교차하는 얼굴이다.

“내일이면 다 끝날지 모릅니다. 그러니 오늘만큼은... 자네가 거짓일지라도, 나를 속이지 말고, 함께해주게.”

옥균은 이상을, 정훈은 현실을 믿는 사람이다. 서로의 방식은 달랐지만, 둘 다 조선을 사랑했고, 어쩌면, 그 속에서 상호 이해에 가까워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선생의 말 속에는 내일이 있군요.”

“내일은, 지금 지키지 않으면 오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정훈은 떨리는 심장을 참아내며 고개를 끄덕인다.

 

5.

한성 근교, 폐허가 된 사찰 뒷마당이다. 비가 갓 멈춘 새벽녘, 어스름한 하늘과 안개 속에서 숨을 헐떡이며 도망친 옥균은 물이 떨어지는 기와 아래 잠시 몸을 숨기고 있다. 곧이어 한정훈이 뒤쫓아 도착한다. 두 사람 모두 젖은 외투 차림으로, 손에는 피와 진흙이 묻어 있다. 정훈은 외투 주머니에 든 총을 손으로 더듬어본다.

“당신은… 왜 도망을 그만두지 않습니까. 그 누구도, 이 나라조차도… 당신을 기다리지 않는데.”

“내가 그만두면, 그 누구도 하지 않을 테니까.”

정훈의 눈은 충혈되어 있다.

“나는… 지금도 매일 선생을 쫓고 있습니다. 그게 임무인지, 개인적 감정인지, 아니면 증오인지조차… 이제 모르겠습니다.”

“그대는 나를 죽이러 오면서도 매번 나를 살렸소.”

정훈이 쓰디쓴 절망에 찬 헛웃음을 내뱉는다.

“혹시 알아요. 내가 결국 날 죽이기 위해 선생을 따라온 것일지도.”

옥균은 조용히 품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낸다. 물에 젖지 않도록 꽁꽁 싸맸던 두툼한 봉투다. 그는 그것을 정훈에게 건넨다.

“이것은 망명 제안서요. 청나라로부터 받은 비공식 서신."

“당신은... 당신은 내게 왜 그런 걸 주는 겁니까. 내가 당신을 지켜야 한다는 착각이라도 하게 만들지 말란 말입니다!”

“떠나게. 조선도, 명령도, 과거도 모두 떠나서, 자네만의 나라로 가게.”

그러나 정훈은 갈 수 없다. 이미 너무나도 많은 피를 봤고, 그는 알고 있다. 그들 둘 다, 이 나라에 의해 끝나야 한다는 사실을 아주 잘, 지독하게도 알고 있다.

 

6.

한정훈은 전직 군 출신의 보안 전문가였다. 모종의 사건 이후 군을 나와서 살아가게 되었고, 그 이후 감정이 차단된 듯 살아왔다. 주변에 별달리 지인을 두지도 않았다. 그런 그에게 먼저 접근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역사 강사인 김옥균은 그 많지 않은 사람 중 하나였다. 오늘은 그 김옥균이 운영하는 독립 서점에 방문하고 함께 식사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절대 수락하지 않았을 일정이었다. 단지, 옥균과 악수하는 순간 벼락과도 같은 직감을 느꼈다. 이 사람이다. 이 사람이 매일 밤 시달리던 내용을 이해할 수 없는 악몽의 원인이다. 정훈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의 심장은 그답지 않게 동요했다.

서점으로 들어서자, 옥균이 카운터 옆의 고서 코너에서 오래된 일본어 번역본을 훑고 있었다. 그가 책장을 덮고 일어서는 순간, 책장 반대편 정훈과 시선이 맞았다.

아, 하얀 셔츠에 검은 코트를 걸친 남자다. 약간 피곤해 보이는 눈매와, 그리고, 그 눈빛이다. 익숙하디익숙한, 너무나 잘 아는 듯한 그 눈이다.

"옥균 선생님, 맞으시죠?"

"한정훈 씨."

낯선 듯 익숙한 목소리가 교차한다.

"...기억하셨네요."

그 순간 말속에 담긴 의미심장함을 서로가 눈치챘다. 그러고도 서로의 안색을 살피며 딴청을 부린다. 정훈은 책 한 권을 들어 올렸다.

<개화와 제국의 경계선>

그는 페이지를 넘기며 여상히 말했다.

"예전에도 이런 책 좋아하셨던가요?"

옥균은 정훈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긴 손가락, 단정한 손톱, 하지만 거기 어렴풋이 깃든 핏자국이 느껴졌다.

"글쎄요. 전엔 책을 읽기보단...기록했던 것 같습니다."

정훈이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췄다. 옥균의 말에는 어떤 의도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정훈이 그것을 감지했다.

"기록하는 사람이셨나 봅니다. 뭐랄까...세상을 바꾸겠다는 확신 같은걸." 

"확신보다도, 조급함에 가까웠지요."

옥균은 말하다 말고 약간 쓰게 미소 지었다.

"시간이 없다고 느끼면, 자꾸 더 급해지니까요."

정훈은 책을 내려놓으면서 고개를 갸웃하고 기울였다.

"...시간이 부족했던 사람이라."

두 사람 사이에 잠시간의 정적이 흐른다. 서점 안에는 빗방울 소리가 조금씩 울리기 시작한다.

"저도," 

정훈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뗀다.

"시간이 있었더라면, 아마 다른 선택을 했을 것 같습니다."

옥균은 당장 대답하지 않는다. 단지 그의 시선은 손가락에서 서서히 움직여 정훈의 눈동자를 붙잡는다. 

"그때 자네가 들고 있었던 건 책이 아니라 총이었지."

정훈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진다. 그건 이미 들킨 거짓말을 애써 부정하지 않는 사람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런 표정을 짓고도 정훈은 애써 거짓말을 계속한다.

"그걸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그 사람은..."

설명하기 어려운 고통으로 인해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옥균은 다음 말을 가만히 기다린다.

"그 사람은...저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옥균은 아무 말 없이 다가와서 정훈이 내려놓은 책을 다시 제자리에 꽂는다.

"그건 기억하는 사람 마음이겠지요. 어떤 사람은, 죽으면서도 웃더군요."

정훈은 고개를 들어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쏟아진 비가 창을 타고 흐르며 유리 너머의 세상을 흐릿하게 지운다.

"죽으면서 웃는 사람이라. 그거참 잔인도 하네요."

옥균은 조용히 시선을 돌려 정훈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렇겠지. 죽이려 했던 사람을, 사랑했다는 걸 마지막에야 알게 된다면, 더욱."

정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옥균은 더 말하지 않았고, 천천히 책장을 스치듯 소리 없이 걸어 나갔다. 정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마치 수백 년 전부터 그를 보내는 연습을 해왔던 사람처럼 못 박힌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7.

둘 다 우산이 없었고 비는 그칠 것 같지 않았다. 먼저 나온 옥균과 따라 나온 정훈, 두 사람은 서점 처마 밑에 나란히 섰다.

"잠깐만요."

옥균은 돌아보지 않고 담배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러나 불을 붙이지 않고 손가락 사이에서 굴리기만 한다.

"정말 다 기억하는 겁니까?"

"기억이라기보단 꿈일세. 그런데 이상하게, 이 얼굴을 보면 그게 다 선명해지니 이것 참."

정훈은 짧게 숨을 삼켰다.

"나는...그날, 그 마지막 날에...난 선생을..."

"죽였지?"

옥균이 담담하게 말을 잘랐다. 정훈은 그만 말문이 콱 막히고 만다.

"그날 내게 총을 들었고, 난 그 총을 피할 생각이 없었지만, 정말로 피하지 못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있네."

정훈은 여전히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다. 옥균은 눈을 가늘게 떴다.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걸린다.

"마지막 순간 자네 얼굴이...너무 슬퍼 보여서."

"그 말이 더 잔인해요."

정훈이 투정 부리듯 말했다. 옥균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가 빼서 다시 주머니에 넣는다.

"이제 다 이해하네, 명령은 명령이고,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한 가지 묻고 싶은 건 있군."

두사람은 빗소리 속에서 말을 고른다.

"그토록 슬펐다면, 진심으로 내게 마음이 있었던 건가?"

"...대체 왜 웃었습니까?"

"죽는 사람이 웃는 게 그리 이상한가?"

옥균이 눈을 내리깔며 말한다.

"그때 내 입에서 나왔던 마지막 말, 기억나나?"

"...'괜찮다',는 말이었죠."

"내가 죽더라도, 살아가야 할 삶이 있으니까."

"그 말이 잔인하다고요. 죽어가는 선생이, 살아있는 나를 걱정하는 게." 

정훈은 마구 뒤엉킨 흥분으로 심장이 떨려옴을 느꼈다. 

"그 순간 내가 알았습니다. 선생을 죽일 수가 없다는걸. 내가 죽인 게 아니라, 선생은 스스로 죽었고, 나는 도망친 거였다고."

"그렇다면, 지금 정훈은 왜 여기 있는 거지?"

"마지막 순간에서 도망치지 않기 위해서요."

"벌받는 거 같네 그래. 죽음 이후에도 이리 서로에게 붙들려 있는 벌을."

"그래도...그 벌이, 선생이라서 다행입니다."

옥균은 픽 웃었다. 그리고 분위기를 환기듯 장난스레 말한다.

"이번 생에서는 부디 날 죽이지는 말았으면 좋겠군."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침묵이 둘 사이를 스친다.

 

8.

옥균의 방백.
“정훈, 자네는 나의 가장 조용한 혁명이었어. 내가 바꾸고 싶던 세상이, 자네의 눈동자에 있었다네.”

 

9.

어느 날 어느 시 서울, 잎이 다 진 은행나무길 위로 흐릿한 햇살이 부서진다. 정훈은 검은 롱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한 발짝 앞서 걷고 있는 옥균을 바라봤다.

"왜 그렇게 쳐다봐?"

옥균이 별달리 웃지도 않고 말했다. 정훈은 슬쩍 시선을 거둔다.

"그냥...이렇게 평범한 하루, 우리가 보내도 되는 건가 싶어서요."

옥균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정훈을 돌아봤다.

"그래서? 자네가 나를 다시 쏠까 봐 걱정되는 건가?"

정훈은 약간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사래를 쳤다.

 "아니요...그런 뜻이 아니고... 그냥..."

옥균이 픽 웃었다.

"장난일세. 이제 좀 편하게 있어. 다른 사람들처럼..."

두 사람은 오래된 전시관에 들어선다. '한국 개화기 인물 특별전'이 열린다는 뉴스를 본 정훈이 제안하고, 흔쾌히 수락한 옥균 두 사람이 함께 찾아오기로 한 것이다.

"어쩐지 선생이라면 이런 데서 마음이 좀...편해질까 싶어서."

"재미있군." 

옥균이 입꼬리를 올렸다.

"여기 걸린 사람들 대부분, 나보다 자네한테 죽었거나 죽을 뻔했을 테지?"

정훈이 우뚝 멈추어 선다. 옥균은 그를 바라본다. 정훈은 어떻게든 웃으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그 웃음에는 부끄러운 죄책감이 섞여 나온다.

전시관은 방문객이 적어 조용하고 서늘했다. 개화기 복식, 낡은 사진, 그리고 한켠에는 '김옥균의 노트'라는 전시물이 있었다. 옥균이 조심스레 노트를 들여다본다. 붓글씨로 짧은 글귀가 적혀 있다.

'만일 내가 오늘 살아남는다면, 누군가와 나란히 걷는 날이 오기를...'

정훈이 그 옆에 서서 그 글귀를 함께 읽는다.

"이건 선생이 쓴 건가요?"

"뭐, 그냥."

"나란히 걷는 날...오늘 같은 거겠네요."

두 사람은 다시 적막속에 전시관을 걷는다.

"기억나세요?"

정훈이 문득 말했다.

"예전에...자주 바둑을 뒀는데."

옥균은 정훈을 돌아보았다. 

"바둑판에 돌을 놓을 때마다, 선생은 상대를 보지 않고, 바둑판만 보셨습니다. 그래서 전 늘 그 반대편에서 선생 얼굴을 봤어요."

옥균은 한참이나 말이 없다. 그러다 작게 중얼거리는 것이다.

"그럼 오늘은, 정훈 얼굴을 좀 볼까."

 

10.

정훈의 방백.

"선생은 말없이 웃었고, 나는 그 웃음이 용서인지, 유언인지 헷갈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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