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타지옥캠프 방학숙제 동일 주제 연성 키워드 합작

0.
우리가 삶 속에서 죽음에 둘러싸여 있다면, 우리는 건강한 지성 속에서도 광기에 둘러싸여 있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문화와 가치』
1.
두 사람이 다음 세기에 환생 한 후, 언젠가부터 폴은 매일 같은 아침을 맞이했다. 멀리서 성당의 종소리가 울리면 햇빛은 정해진 각도로 커튼 사이를 가르고 들어왔고, 친절한 이웃들은 늘 똑같은 아침인사를 건네곤 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폴."
이웃들의 미소는 복사된 듯 한결같았다. 그가 결국 재회한 랭보와 정착한 마을은 완벽하게 설계된 세상이었다. 집은 규격에 맞춰, 동일한 미적 양식으로 보기좋게 설계되고 배열되어 있었다. 공원에 있는 나무들은 각에 맞춰 심어져서 계절에 맞게 변화했다. 개 짖는 소리, 아이들의 웃음소리 조차 매일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왔다. 폴은 그것에 익숙해져 있었고 또 그것이 진짜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믿음은 한 통의 편지로 인해 흔들리게 된다.
낡은 봉투에 든 잉크가 바랜 편지에는 아주, 아주 익숙한 필체로 진실이 적혀 있었다.
[ 폴, 당신이 지금 보는 세상은 하나의 무대이며, 당신이 듣는 목소리는 모두 대본이야. 나는 진짜 랭보야. 이 편지가 손에 닿는다면, 지금 당장 그 감옥 속에서 탈출해! ]
폴은 이 우스운 편지가 질 나쁜 장난이라고 생각하려고 했다. '모든 인간은 그저 잠시 등장했다가 퇴장하는 배우일 뿐이라'는 셰익스피어의 희극 『뜻대로 하세요』를 떠올리며 잠시 쓰게 미소짓기도 했다. 하지만 편지는 너무나도 익숙한 문체와 필치로 그가 기억 속에서 붙잡은 문장들과 시구를 인용하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의 안온한 세계가 흉내 낼 수 없는 생의 비릿한 냄새였다. 어쩔 줄 모르게 된 폴은 우선 편지를 황급히 태워버렸다.
그날 이후 랭보를 마주할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다. 진짜 랭보가 세계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다면 이 '랭보'는 대체 뭐란 말인가? 가짜 랭보는 환생 이후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았지만 자신감 있고 완벽한 미소를 지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미소조차 진실로 인해 고통받는 폴에게는 공허했다. 진짜 랭보의 편지와 그 미소 사이의 균열은 날로 커졌다. 폴은 마침내 이 마을이 진실로 살아있는 곳이 아닌 거대한 상자라는걸 깨달았다.
폴은 탈출을 시도했다. 첫 번째 시도로, 마을 외곽을 따라 달리는 버스를 잡아 타고 끝까지 가려고 했다. 그러나 차창 너머로는 빙글빙글 도는 풍경만이 있었다. 도시 풍경은 원을 그리며 반복되고, 버스는 출발지점으로 돌아와 같은 곳에 섰다. 그가 지쳐서 집에 돌아오자, 가짜 랭보가 대체 어딜 그렇게 쏘다니냐고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두번째 시도는, 하늘을 향해 기어오르는 일을 벌이는 것이었다. 동네에서 가장 높은 첨탑을 붙잡고 끝까지 기어 올랐다. 구름을 뚫고 손을 뻗었지만 아무것에도 닫지 못했다. 가짜 세상이 폴의 생각대로 상자라면 분명 천장이 있을 텐데, 그 높이가 생각보다 높은 것 같았다. 폴은 포기하고 웅성거리는 사람들이 있는 지상으로 내려왔다. 가짜 랭보가 손수건을 꼭 쥐고서 애먹이는 어른인 폴을 노려봤다.
세번째 시도는 더욱더 과감했다! 그는 강물에 몸을 던지고서 한참을 가라앉은 채로 견뎠다. 그러나 차갑지도 무겁지도 않은 가짜 물이 자꾸만 그를 위로, 위로 띄우는 것이다! 숨이 차지도 않았고 폐가 아프지도 않았다. 폴은 결국 허우적대다가 이 우스꽝스러운 짓을 그만두고 강물 밖으로 나와야 했다. 또 웅성거리는 사람들이 강변에 둘러 서 있었다. 수건을 든 가짜 랭보가 한숨을 쉬었다.
"다 했어?"
"응... 미안."
미안하다고 말한 것 치고, 폴은 더욱 이 세상은 감옥이며 또 관객 없는 무대라는 것을 속으로 확신했다. 저 가짜 랭보는 대체 뭘까? 폴 그 자신을 감시하기 위한 감시탑일까? 저 미소가 나에게 무언가를 강제하고 있나? 그런 생각들이 끊이지 않았다.
2.
한달간의 모든 탈출 시도는 실패했다. 웃음소리는 어긋나고 한때는 위안이 되던 찬란한 반복들조차 모조리 고통으로 변했다. 아름답던 규칙적 일상은 당연히 빠르게 망가졌다. 가엾게도 폴은 이 상자 속의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러나 상자 밖의 세상에 도달할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래도 랭보의 따스한 손길만은 그의 곁에 머물렀다. 마치 애절한 죽음 속에서 돌아온 단 한 번의 기회처럼 애달픈 손길이었다. 그 손길 때문에 폴의 마음은 자꾸만 흔들렸다.
어느날 폴은 세찬 절망 속에서 독주를 마시며 부엌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머릿속은 술기운보다도 더 깊은 공허함으로 인해 완전히 무너지고 있었다. 가짜 랭보가 다가와서 그를 끌어안아 주었다.
"폴, 웃어. 이제 웃어도 괜찮아."
어깨를 토닥이는 손길에 폴은 말문이 막히고 눈물이 핑 돌았다. 랭보는 그의 이마에 이마를 살짝 맞대며 속삭였다.
"우리도 행복해질 수 있어, 우리에게도 그런 자격이 있어."
폴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고서 입가를 떨며 미소 지으려 노력한다. 그러나 곧 울먹이며 기어가는 소리로 중얼거린다.
"하지만 여긴 진짜가 아니고 넌 진짜 랭보가 아니잖아..."
랭보는, 자신의 가슴 위에 폴의 손을 끌어와서 얹고 심장의 두근거림을 느끼게 해 준다.
"나는 살아있다. 참으로 착실하게, 타오르는 불꽃으로, 여기 이곳에 살아있다."
폴은 훌쩍대며 뜨거운 눈물을 목으로 삼킨다. 가짜 랭보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면서 묻는다.
"이래도 내가 진짜가 아니야?"
그 말을 듣고서 차마 가짜 랭보의 눈을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는 폴은, 눈을 내리깔고 말없이 도리질을 칠 뿐이다.
"랭보, 나 혼자 있고 싶어."
알겠어, 하고 랭보가 대답했다. 그 대답은 정말 다정했고, 또 이상할 만큼 연기 같았다. 랭보는 우는 폴을 두고 밖으로 나간다. 잠시 후 용기를 낸 폴은 눈물을 닦고 창밖을 바라본다. 창밖에는 정원을 일렁일렁 날아다니는 하얀 나비들이 보였다 말았다 했다.
3.
가짜 랭보 때문에 폴은 어쩔 수 없이 집 안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바깥에선 균일한 발소리와 가짜 웃음소리가 여전히 반복되었고, 폴의 머릿속에선 진짜 랭보가 보낸 편지가 날카로운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 두 세계가 교차하는 그 틈새가 폴을 차차 미치도록 만들었다.
어느 밤, 폴은 부엌 바닥에 웅크려 앉아 손에 쥔 깨진 유리 조각을 바라보았다. 팔목을 긋고 싶었다. 자신의 진짜 피가 흘러내리면, 어쩌면 이 조작된 세계가 멈출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유리를 살갗에 눌렀다. 그러나 곧 걱정많은 랭보나 이웃들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가짜 랭보는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이웃들은 하나같이 경악하며 그의 손에서 유리를 빼앗았다.
그 다음 시도는 목을 매다는 것이었다. 그는 천장에 밧줄을 걸고 목을 매고서 의자를 발로 찼다. 그러나 곧 주변의 누군가가 나타나 밧줄을 잘라냈다. 그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졌고, 눈앞엔 눈물이 그렁한 가짜 랭보가 서 있었다. 가짜 랭보는 그를 안아 올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폴... 진짜 세상 따윈 없어! 당신이 찾는 곳은 없다고!"
폴은 숨이 막히는 듯 헐떡이면서 머리칼을 움켜잡고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도망치고 싶어... 도망치고 싶어... 도망치고 싶어..."
폴의 중얼거림은 점점 빠르게 망가진 기계처럼 반복되었다. 그는 마치 이 가짜 세상을 흉내 내듯이 같은 말을 반복했다. 가짜 랭보가 절규하듯 외친다.
"폴, 이제 당신 없이는 나도 없어! 우리 함께하기로 약속했잖아!"
이제 가짜 랭보의 얼굴은 폴이 그토록 집착했던 예술과 욕망의 화신이 아니라, 지독히도 외로운 인형 같았다. 그래도 폴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숫제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흐느낌은 울부짖음으로 변했다.
"도망치고 싶어... 여기서, 여기서... 제발 꺼내줘!"
방 안의 전등이 깜빡거리며 요동쳤다. 폴의 몸부림과 절망은 마치 상자 전체를 흔드는 지진처럼 주변에 번져갔다. 그러나 이 세계의 벽은 무너지지 않았고, 탈출구는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폴은 자해를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폴의 몸은 점점 무너지고 있었다. 여러 차례의 자해와 실패한 자살 시도로 그의 피부는 옅은 상처와 흉터들로 가득했고, 폐는 거친 숨을 토해냈다. 폴은 점점 쇠약해졌다. 결국 그는 침대에 누워 있는 시간이 늘어나 버렸다. 그 곁을 계속 지킨 건 다름 아닌 가짜 랭보였다. 그는 젖은 수건으로 폴의 이마를 닦아주고, 마치 오랜 간병인처럼 침대 옆에 앉아 죽을 듯 기운 없는 폴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늘 약을 정성스레 입에 넣어주었다. 때때로 기도하듯 폴의 머리맡에서 속삭였다.
"폴, 치료를 받으면 다 괜찮아질 거야."
폴은 감긴 눈꺼풀 틈으로 그를 조심스럽게 지켜보았다. 그 온기는 따스했지만 또 동시에 도무지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알약을 입안에서 굴리며 생각한다. 너는 진짜가 아니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진짜 살아 있는 것 같지?
4.
초목도 잠들 만큼 밤이 깊어져 방 안이 적막했다. 가짜 랭보가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아 그를 간호하다가 지쳐 고개를 떨구었을 때, 폴의 눈길이 선반 위를 스쳤다. 선반 위에 있는 건 문학상 수상 기념 상패다. 달빛을 매끄럽게 반사하는 아주 무겁고 단단한 덩어리다.
폴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욱신거리고 폐가 타들어 갔지만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그리고 손을 뻗어 간신히 그 상패를 움켜쥐었다.
"미안해... 랭보."
그 한마디의 중얼거림은 그냥 들숨에 딸린 자연스러운 날숨처럼 터져 나왔다. 다음 순간, 묵직한 상패는 공기를 가르며 내려찍혔다. 묵직한 파열음이 울려 퍼지고 따뜻한 붉은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다. 천장에 점점이 얼룩이 졌다. 가짜 랭보의 몸이 무너져 내리고 침대 위로 축 늘어졌다. 폴은 무거움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상패를 쥔 손이 덜덜 떨려오는걸 느꼈다. 손에서 흘러내린 뜨뜻한 피는 그의 손목을 타고 내려와 침대 시트에 진홍색의 무늬를 남겼다. 폴은 힘없이 상패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바닥이 쿵 하고 울렸다. 피가 잔뜩 묻은 상패가 침묵 속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더 이상 숨 쉬지 않는 랭보가 있었다. 적막한 방 안에는 피비린내와 차가운 숨결만이 가득 차오른다.
5.
폴은 숨을 고르며 천천히 가짜 랭보의 시체를 일으키고, 질질 끌어서 부엌으로 옮겼다. 그는 가짜 랭보의 몸을 식탁에 눕혔다. 그리고 그는 식칼을 집어 들었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에 온몸이 바짝 긴장했다. 그리고 대담한 칼질과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의 심장을 꺼냈다. 붉게 흐르는 피가 그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폴은 머뭇거리지 않고 그것을 입술에 가져갔다. 뜨겁고 진한 피의 맛과 생생한 온기가 혀를 휘감고 정신을 강타했다. 그의 심장이 남긴 마지막 존재감이 폴의 몸과 마음을 깊숙이 흔들었다. 그렇다. 가짜 랭보도 심장은 정말로 진품이었다.
폴은 그 심장을 간직하려고 유리 단지에 담았다. 투명한 유리 속에서 아직도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듯해 보였다. 나머지인 시체는 들어있던 모든 음식을 쓸어낸 냉장고의 빈 공간에 넣어 두었다. 차가움 속에서 죽은 육체의 버석한 머리칼이 희미한 냉장고 내부의 전등 빛으로 반짝였다. 슬쩍 열린 눈꺼풀 사이의 눈동자에 폴 베를렌느 자신의 모습이 반사되어 비쳤다.
폴은 한참을 숨죽인 채 냉장고 안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손으로 랭보의 눈을 감겨 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입술을 시체의 이마에, 입술에 가져다 댔다. 비록 가짜였지만, 그 순간 폴의 입술이 닿은 것은 사실상 자신이 사랑했던 랭보였다. 이는 두려움과 광기 그리고 오래된 사랑이 뒤섞인, 숭배와 애정의 키스였다. 그는 조용히 속삭였다.
"랭보. 잘 있어."
집 전체가 죽은 듯 조용했다. 마을 전체가 숨을 멈춘 듯 했다. 투명한 유리 단지 속 심장이 붉은 색채를 남기고, 냉장고 안의 시체는 차가운 냉기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폴은 지친 한숨을 내쉬며 가차 없는 잔혹함과 뒤틀린 애정의 뒷맛을 온전히 자신의 가슴속에 품었다. 이 랭보도 폴이 사랑했었던 랭보다. 비록 무서운 가짜 랭보였다 하더라도 말이다.
6.
폴은 유리 단지 속 심장과 자기 자신의 심장을 챙겼다. 두 심장들은 차가움 속에서도 묵직하게 뛰고 있었다. 그것들은 마치 자신들의 의지로 길을 찾으려는 나침반처럼 떨려왔다. 폴은 작은 쪽배를 끌고, 상자 세계의 끝없는 바다로 출항했다. 바람은 세차게 몰아쳤고 하늘은 먹구름으로 뒤덮였다. 항해 중 비가 얼굴을 때리고 또 파도는 쪽배를 덮쳤지만, 그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심장들이 그의 가슴과 배 위의 유리 단지에서 동시에 뛰며, 방향을 알려주고 있었다. 꿈의 끝, 단지 그것만을 원하면서 나아갔다.
그렇게 한참을 항해한 폴의 눈앞에 마침내 상자 세계의 끝이 보였다. 높이 솟은 세계의 외벽과 그 위에 그려진 하늘 그림의 붓 터치가 생생히 보였다. 폴은 벅찬 숨을 고르면서 쪽배를 밀어 벽 가까이 댔다. 벽에는 계단이 붙어 있었다. 그 계단은 하늘을 향해 삐뚤삐뚤하게 놓여 있었고 계단의 끝에는 문짝이 있었다. 그의 심장은 불타듯 뛰었다. 피와 고통, 사랑과 광기의 여정이 이제 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폴은 심장이 든 유리 단지를 품에 안고서 문을 향해 층층대를 올라갔다.
폴의 손이 문고리를 잡는 순간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과연 이 문 너머 진짜 세상에는 진짜 랭보가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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