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리스마스 연성입니다…. 어쩌다 보니 늦었습니다.
1.
12월 24일 저녁 6시, 폴 베를렌은 인쇄소 문을 잠그며 한숨을 내쉬었다. 손가락 끝에 묻은 잉크 자국이 검게 번져 있었다. 하루 종일 교정지를 들여다보느라 눈이 시큰거리고 뻐근했다. 크리스마스이브에도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서러웠지만, 그보다는 이제 따뜻한 두 사람의 집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그를 묘하게 들뜨게 만들었다.
파리의 거리는 이미 어둠에 잠겨 있었다. 가스등 불빛 아래로 간간한 눈발이 흩날린다. 삼삼오오 모여 다니는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선물 꾸러미를 안고 집으로 서둘러 돌아간다. 창문마다 알록달록한 촛불이 켜지고, 문이 열린 교회에서는 합창단의 캐럴이 들려왔다. 폴은 낡은 외투 깃을 세우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걷다가 거리 모퉁이에 있는 오래된 문구점 앞에서 그는 멈춰 섰다. 이미 문을 닫을 준비를 하던 주인장 노인이 폴을 보더니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문을 열어주었다.
"베를렌 선생님, 또 오셨군요."
노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연민이 묻어 있었다. 폴은 그 울림이 주는 거슬림을 애써 무시하며 진열장으로 다가갔다.
"최고급 양피지 한 묶음이랑…. 그리고 저 잉크, 검은색 말고, 저기 코발트블루. 그걸로 주시죠."
"이번에도 같은 걸로?"
"네, 같은 걸로요."
노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문한 물건을 꺼냈고, 폴은 지갑을 꺼내며 작게 말했다. 지갑은 거의 비어 있었지만, 폴은 이 선물을 위해 한 달 내내 돈을 모아왔다. 주인장은 그 선물을 붉은 리본으로 정성스럽게 포장해 주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선생님."
"...메리 크리스마스."
폴은 포장된 선물을 가슴에 꼭 안고 밖으로 나왔다. 아까보다 눈발이 더 거세졌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다. 일 년 중 단 하루, 모든 것이 허락되는 날이다.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는 날이다. 집까지 가는 길에 그는 시장에도 들렀다. 빵과 치즈, 저렴한 와인 한 병, 그리고 닭고기 한 마리. 랭보가 좋아하던 요리를 할 작정이었다. 아니, 좋아했던 것들. 이내 폴은 고개를 세게 저었다. 아니, 좋아하는 것들이 맞다.
2.
폴의 집은 언덕 아래 좁은 골목에 있는 낡은 건물 4층이었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그의 심장은 이상한 박자로 거세게 뛰었다. 마치 처음 연인을 만나러 가는 소년처럼 얼굴이 상기되는 것이 느껴졌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냉기가 그를 맞았다. 방은 어둡고 황량했다. 벽지는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고, 천장에는 습기로 인한 얼룩이 번져 있었다. 하지만 폴의 눈에는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는 짐을 내려놓고 재빨리 벽난로에 불을 지폈다.
"잠깐만 기다려, 금방 따뜻해질 거야."
폴은 속삭이듯 말을 하며 움직였다. 서랍에서 양초를 꺼내 여기저기에 켜 놓았다. 촛불이 하나둘 켜질 때마다 방은 마법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어둠이 물러가고, 벽의 얼룩들이 흔들리는 그림자 속으로 숨었다. 그는 장롱 깊숙한 곳에서 낡은 상자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 작년에 만들었던 종이 장식들이 나왔다. 손때 묻은 노란 별들, 접어서 만든 황금 종들, 색종이로 만든 화환이다. 그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꺼내 벽에 붙이고 천장에 매달았다.
"이번엔 더 예쁘게 해야지. 작년보다 훨씬 더..."
그의 손은 떨렸다. 흥분 때문인지, 방금 마신 와인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였다. 오늘은 랭보가 돌아오는 날이었다. 부엌에서 냄비를 꺼내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닭고기를 씻어 양념을 하고, 감자를 깎았다. 요리를 하는 내내 그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예전에 랭보가 좋아하던 샹송. 가사는 이제 기억나지 않았지만 멜로디는 또렷했다. 테이블을 닦고 깨끗한 천을 깔았다. 접시 두 개, 포크 두 개, 와인잔 두 개. 모든 것이 둘이었다. 그는 한 걸음 물러서서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이제 선물만..."
그는 문구점에서 산 포장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양피지의 질감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크림색의 부드러운 종이. 랭보는 때때로 종이에 까다로웠다. 싸구려 종이에는 완성된 시를 잘 쓰지 않았다. 폴은 양피지와 잉크병을 빨간 리본으로 다시 묶어 의자 위에 올려놓았다. 랭보가 늘 앉던 자리인 창가 쪽 의자 위다. 방은 이제 완전히 변해 있었다. 촛불이 벽에 춤추는 그림자를 만들었고, 벽난로의 불이 따뜻하게 타올랐다. 부엌에서는 맛있는 음식 냄새가 진동했다. 테이블은 소박하나마 축제처럼 차려져 있었고, 선물은 반짝이는 리본으로 묶여 있었다.
폴은 시계를 보았다. 8시다. 그는 의자에 앉아 기다리기 시작했다.
3.
이윽고 9시가 되었다. 음식은 완성되어 테이블 위에 잘 올라와 있었다. 닭고기는 황금빛으로 익어 윤기가 흘렀고, 빵은 따뜻했으며, 와인은 잔에 따라져 있었다. 폴은 여전히 기다렸다.
"조금 늦는 거겠지. 길이 막혔거나…. 아니면 선물을 사느라..."
그는 와인잔을 들어 한 모금 더 마셨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술이 쓰라렸다. 하지만 곧 따뜻함이 속으로 퍼졌다. 그는 빈 의자를 바라보았다. 창가의 의자다. 랭보의 자리다. 이윽고 10시가 되었다. 음식에서 김이 더 이상 나지 않았다. 폴은 일어나 다시 음식을 데웠다. 벽난로에 장작을 더 넣었다. 슬슬 촛불 하나가 꺼지려 하자 재빨리 새것으로 갈아 끼웠다.
"아마 눈 때문에 늦는 거야. 밖에 눈이 많이 왔으니까. 기차가 연착됐을 수도 있고..."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기다렸다. 곧 11시. 자정까지 한 시간.
폴은 이제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일어나서 창문으로 다가갔다.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랭보..."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방을 둘러보았다. 장식들, 촛불들, 음식들, 선물. 모든 것이 완벽했다.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어디 있어?"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그는 방을 이리저리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아르튀르? 랭보, 어디 있는 거야?"
그는 침실로 갔다. 역시나 비어 있었다. 침대는 주름 하나 없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랭보가 누울 자리를 위해 그가 오늘 아침 정성스럽게 정리해 둔 것이었다.
"숨바꼭질하는 거야? 그래, 그렇구나. 날 놀라게 해 주려고..."
폴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다. 랭보는 늘 그랬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타나서 폴을 놀라게 하곤 했다. 문 뒤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뛰어나온다든지, 어둠 속에 서 있다가 촛불을 켜는 순간 모습을 드러낸다든지 말이다. 장난꾸러기라니까.
"알았어, 찾아볼게. 내가 찾아볼게!"
그는 옷장을 열었다. 낡은 옷가지들만 걸려 있었다. 침대 밑을 들여다보았다. 먼지만 쌓여 있었다. 창문 커튼 뒤를 확인했다. 아무도 없었다.
"아르튀르..."
그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하지만 그는 계속 찾았다. 부엌, 욕실, 다락방으로 통하는 좁은 계단, 모든 곳을 샅샅이 뒤졌다.
"나와, 제발…. 이제 그만 나와줘..."
자정을 알리는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멀리서 울려오는 교회 종소리가 창문을 뚫고 집안의 고요를 찢어간다. 하나, 둘, 셋, 넷…. 폴은 거실로 돌아왔다. 테이블 위의 음식은 완전히 식어 있었다. 닭고기의 기름이 하얗게 굳어 있었다. 오랜 시간 켜둔 촛불들이 낮게 타들어 가며 깜빡거렸다.
"안 돼..."
그는 테이블을 움켜쥐었다. 손이 떨렸다. 점점 더 심하게.
"안 돼, 안 돼, 안 돼!"
그의 손이 접시를 쓸어버렸다.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접시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음식이 바닥에 흩어졌다. 와인잔이 굴러다니며 붉은 흔적을 남겼다.
"랭보, 어디 있어! 어디 있냐고!"
폴은 미친 듯이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서랍을 열어 내용물을 바닥에 쏟아냈다. 책장의 책들을 마구 끄집어냈다. 벽에 붙여놓은 장식들을 찢어냈다. 종이 별들이 눈송이처럼 바닥에 흩날렸다.
"나와! 나오라고! 아르튀르!"
그는 소파 쿠션을 집어던졌다. 테이블을 뒤집었다. 의자를 발로 찼다. 방은 순식간에 전쟁터가 되었다. 그토록 정성스럽게 준비했던 모든 것들이 무너졌다. 폴의 숨이 가빠졌다. 그의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폴은 무너진 방 한가운데 서서 헐떡였다. 방안에는 촛불 몇 개만이 아직 꺼지지 않고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발밑에서 무언가가 느껴졌다.
4.
바닥에 떨어진 것들 사이에서 낯익은 것이 보였다. 붉은 가죽으로 된 작은 공책. 폴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 손이 너무 심하게 떨려서 제대로 잡을 수가 없었다.
랭보의 일기장이었다.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던 것. 보지 않으려고, 잊으려고, 없는 것처럼 생각하려고 애썼던 것이다.
폴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부서진 접시 조각들이 무릎에 박혔지만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일기장을 펼쳤다. 랭보의 필체다. 빠르고 격렬하게 휘갈겨 쓴 글씨들이다. 어떤 곳은 잉크가 번져 있었고, 어떤 곳은 종이가 찢어질 듯 세게 눌러쓴 흔적이 있었다.
앞 페이지. 날짜가 적혀 있었다. 1889년 1월 25일.
"추위를 피해 남쪽 해안 마을로 이동. 통증 때문에 한숨도 잘 수 없다. 이제 할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하루 온종일 바다를 구경하거나…. 새로 나온 폴의 시집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폴은 페이지를 넘겼다. 어쩐지 차오르는 눈물이 글씨를 흐렸다.
"이제, 여행을 멈춰야 한다. 걸을 수 없다는 것이 설령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라고 해도 나는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살 같은 건 하지 않을 것이다.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살기 위해 죽도록 몸부림치며 남아 있는 불행의 시간을 즐길 것이다."
페이지들이 점점 빠르게 넘어갔다. 폴은 읽을 수가 없었다. 아니, 읽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손은 계속 페이지를 넘겼다.
1880년에서. 1883년으로. 다시 1889년. 그리고 1890년...
"다리가 점점 더 아프다. 의사는 아무 문제 없다고 하지만 나는 안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1891년 5월.
"병원. 마르세유.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고 한다. 끔찍하다. 하지만 더 끔찍한 것은 이제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는 것..."
폴의 손이 멈췄다. 이제 마지막 페이지였다.
1891년 11월 9일.
날짜 아래 몇 줄의 글씨. 다른 페이지들과 달리 아주 천천히, 꾹 눌러가며 조심스럽게 쓴 것 같았다. 마치 마지막 힘을 다해 쓴 것처럼 보인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다들 내가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 거라고 말하지만 나는 안다. 이번 겨울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폴에게 편지를 써야 하나.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미안하다고? 사랑했다고? 모두 거짓말이다. 아니, 모두 진실이다. 모순을 내재한 진실이다. 우리가 함께 했던 그 크리스마스들을 기억한다. 파리의 다락방은 춥고 습했지만 우리는 행복했다. 아니, 행복하다고 믿을 수 있었다. 우리 두 사람분의 광기를 행복으로 치환했다. 폴, 만약 이 글을 읽는다면 알아줬으면 좋겠어. 나는 결코 돌아가지 않아. 돌아갈 수 없어. 우리가 있던 그곳은 이미 존재하지 않아. 다만 내가 남긴 시들 속에서, 당신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할 뿐. 나를 기다리지 마. 나를 기억하지도 마. 그저 살아가..."
마지막 문장은 끝나지 않았다. 잉크가 번져 있었다. 마치 글을 쓰다가 손이 툭 떨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아래, 다른 잉크로, 다른 필체로 작은 글씨가 추가되어 있었다.
"1891년 11월 10일. 아르튀르 랭보, 마르세유 병원에서 사망. 향년 37세."
낯선 글씨였다. 아마 병원에서 나중에 추가한 것일 것이다.
5.
폴은 일기장을 가슴에 꼭 안았다. 그리고 소리 없이 눈물방울이 흘러 떨어져 내렸다.
방은 완전히 폐허였다. 부서진 접시들, 흩어진 음식들, 찢어진 장식들, 쓰러진 가구들이 시선 닿는 곳마다 일그러진다. 마치 폭풍이 지나간 것 같았다. 촛불 하나가 마지막으로 깜빡이다 꺼졌다. 이제 벽난로의 불빛만이 방안을 희미하게 비췄다. 그는 무너진 방 한가운데 앉아 있다. 일기장을 안은 채로 굳어있었다. 그의 몸은 약간씩 흔들렸다. 울음소리는 없었다. 단지 몸이 경련하듯 떨릴 뿐이었다. 밖에서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조용했다. 크리스마스의 밤은 고요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폴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창가의 빈 의자를 바라보았다.
선물 상자가 아직 그 위에 놓여 있었다. 붉은 리본으로 묶인 양피지와 잉크 꾸러미다. 촛불이 거의 다 꺼졌지만 그 붉은 리본만은 아직도 선명하게 빛났다.
"랭보..."
폴은 일어났다. 비틀거리며 의자로 다가갔다. 선물 상자를 집어 들었다. 리본이 손에서 풀렸다. 양피지가 바닥에 떨어졌다. 잉크병이 데굴데굴 굴렀다. 그는 양피지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잉크병을 열었다. 코발트블루, 랭보가 좋아하던 색이다. 벽난로 앞에 앉아 무릎 위에 양피지를 펼쳤다. 손이 떨렸다. 하지만 그는 펜을 들었다. 잉크를 찍었다. 그리고 마구잡이로 쓰기 시작했다.
"장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에게.
다시 한번 크리스마스가 왔어. 그리고 너는 오지 않았어.
이 집은 온통 네 흔적으로 가득하네. 네가 앉던 의자, 네가 쓰던 책상, 네가 걷던 바닥이야. 모든 것이 너를 기억하고 있어. 나는 미쳤지. 알고 있어.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이렇게 준비하고, 기다리고, 미쳐가는 나 자신을 봐. 하지만 멈출 수가 없어. 이 하루만큼은 네가 돌아올 수 있다고,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될 수 있다고 믿고 싶어서. 용서해 줘. 내가 너를 붙잡으려 했던 것을. 내가 너를 파괴했던 것을. 또 우리의 사랑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였던 것을 용서해 줘. 하지만 후회하지 않아. 단 한 순간도. 너와 함께한 그 광기의 날들, 그 찬란했던 지옥만이. 그것이 내 삶의 전부였어. 그 이후의 모든 날들은 그저 그 광채의 그림자일 뿐.
메리 크리스마스, 랭보.
언제나 너의,
폴 마리 베를렌느가"
편지를 다 쓰고 나서 그는 종이를 접었다. 그리고 벽난로를 바라보았다. 벽난로에만 불이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다. 폴은 천천히 편지를 불 속으로 던졌다. 종이가 불길에 휩싸였다. 새겨진 잉크가 검게 타들어 가며 연기가 되어 올라갔다. 굴뚝을 통해, 밤하늘로, 다시 하늘 어딘가로 흘러갔다.
"...받았어?"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대답은 없었다. 단지 창밖으로 눈이 소복이 내리는 소리만이 들렸다. 폴은 벽난로 앞에 앉아 불을 바라보았다. 방은 폐허였지만 그의 얼굴에는 묘한 평화가 깃들어 있었다. 마치 마침내 무언가를 가까스로 완수한 사람의 표정이다. 창밖으로 새벽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의 아침이었다. 눈은 그쳤고, 거리는 하얗게 덮여 있었다. 어디선가 교회 종소리가 들렸다. 폴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옛날의 다락방을 떠올렸다. 춥고 습했지만 촛불로 가득했던 그곳이다. 두 사람이 함께 책을 읽고, 시를 쓰고, 독주를 마시며 밤을 새웠던 그곳이다.
"메리 크리스마스."
그가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그리고는 난장판 가운데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랭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머리에서 눈을 털면서 미소를 지으며, "미안, 늦었네."라고 말하면서 걸어온다. 꿈이었지만 괜찮았다. 일 년에 단 하루, 크리스마스만큼은 꿈이 허락되니까. 방안은 고요했다. 부서진 접시 조각들 사이로 아침 햇살이 부딪힌다. 창가의 의자 위에는 아직도 붉은 리본이 놓여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어젯밤의 희망과 광기 그리고 사랑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폴은 매년 크리스마스가 오면, 이 모든 일을 다시 반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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