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물 아니고 힐링물입니다. 키이스x제롬, ㅈxㅂ.
1.
"저, 제롬 밀러 씨가 깨어났어요!"
병원의 의사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제롬이 깨어날 가망이 거의 없다고들 말했다. 그날 무대에서, 키이스의 바로 눈앞에서, 자기 대가리에 총질을 한 제롬은 피를 흘리면서 쓰러졌고 그걸 본 모두는 패닉에 빠졌다. 곧 구급차가 와서 그는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그건 사망 판정을 받기 위한 절차였을 뿐이었다. 누구도 제롬의 생존을 생각하지 않았다. 단 한 사람, 키이스를 제외하고. 키이스는 제롬의 연명 치료 동의서에 직접 서명하고, 막대한 병원비를 지불하여 제롬을 살려놓았다. 제롬이 깨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 어차피 영화를 제작하면서 번 돈을 쓸 곳도 따로 없었다. 가족도, 친구도 제롬 하나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입장이 바뀌었어도 제롬 또한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몇 번의 계절이 지나간 어느 해의 봄날에, 키이스는 갑작스러운 전화를 받았다.
"뭐라고요?"
"의식을 되찾았다니까요? 아아 세상에, 주여..."
"제롬이, 제롬이 뭐라고 말하던가요?"
"그게…. 직접 와 보셔야 이해 하실 것 같아요."
지금 당장 가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키이스는 전화기를 다급히 내려놓았다. 제롬이 깨어나다니, 바랐던 일이지만 정말로 일어날 줄은 몰랐던 일이다. 전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지 않았다. 한여름에 산타가 선물을 준다면 이런 기분일까? 먹던 식사도 찍던 영화도 저녁 약속도 머릿속에서 다 지워졌다. 제롬은 어떤 반응을 할까? 죽으려던 자신을 억지로 살려둔 걸 알면 다시 죽으려 하진 않았을까? 그렇다면 병원에서 묶어 두었을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마구 뻗어나갔다. 익숙한 병실 앞까지 무슨 정신으로 찾아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습관적으로 노크 없이 문을 벌컥 열었고, 곧바로 침대에 앉아 있는 제롬과 눈이 마주쳤다.
"...제롬."
"누구세요?"
"나야, 키이스."
"그게 누군데요?"
"네 친구, 키이스야. 하나밖에 없는..."
"엄마가 모르는 사람이랑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는데요..."
"뭐? 네 어머니는..."
"착하게 지내면 언젠가 데리러 올 거래요."
그는 방긋 웃는 제롬의 해맑은 얼굴을 보고 당황했다. 이게 무슨 소리지. 키이스는 뒤따라 들어온 간호사를 보고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간호사는 의사의 소견서를 내밀면서 고개를 가로저어 보인다. 종이에는 '유년기 이후의 기억 상실, 원상 복구 가망 없음….' 이라고 쓰여 있었다. 키이스의 심장이 빠르게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제롬의 기억 상실이 나쁜 일인지 좋은 일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는 한 가지 사실을 눈치챈다. 키이스는 이제 제롬이 말을 더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2.
제롬은 왜 말을 더듬지 않게 된 걸까? 키이스의 생각에, 가장 유력한 가설은 지금의 제롬이 어머니가 강도에게 살해당한 날의 기억을 통째로 잊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제롬은 더는 괴로워 할 이유가 없다. 어쩌면 그날 이후의 모든 날들이 제롬에게는 그저 잊고 싶었던 기억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기억의 망령들에서 풀려난 지금의 제롬은 몹시 행복해 보였다. 병실에서 벗어난 제롬은 어린아이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기뻐했다. 드넓은 푸른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히고는 낯선 햇살에 눈을 찡그렸다. 키이스는 그런 제롬의 어린 옆모습을 보면서 오래된 필름을 되감는 듯한 이상한 감각에 잠시 숨을 멈추었다. 텅 빈 키이스의 집에 들어선 두 사람은 잠시 현관에 서 있었다.
"집이 좀…. 쓸쓸하지, 미안."
"집이 꼭 궁전 같아요! 엄청 넓어요! 이런 곳에 혼자 살아요? 혼자서 무섭겠다."
명랑하게 웃으며 재잘거리는 제롬의 모습은 정말로 어린아이로 돌아간 듯 순수해 보였다. 키이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제롬이 이렇게 된 데에는 분명 자신의 책임도 있을 텐데, 은근히 기뻐하는 자신이라니. 게다가 제롬이 정말로 깨어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아무런 준비 없이 생활감 없는 집으로 데려와 버렸다.
"...뭐 먹고 싶은 건 있어? 배고프겠다."
"먹을 것도 있어요? 형아 부자였구나."
"뭐든지 말해. 그리고 형이라고 부르지 말고 키이스라고 불러."
"키이스, 키이스."
제롬은 키이스의 이름을 몇 번 입안에서 굴려 발음해 보더니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다. 어쩐지 그 이름이 익숙한 울림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벽난로 앞에 마주 앉았다. 장작이 타들어 가며 부서지는 소리가 방 안에 가득했다. 제롬은 나무 타는 냄새를 맡으며 두 손을 난로 가까이에 내밀었다. 초봄의 꽃샘추위에 언 손끝에 붉은 기운이 고였다.
"제롬, 너무 가까이 가면 머리카락이 탈거야."
"응, 키이스가 있으니까 괜찮아."
그 말에 키이스는 잠깐 웃었다. 마치 괜찮아, 라는 말이 이 집 전체를 가볍게 감싸는 행운의 주문처럼 울려왔다. 조금 뒤에 키이스는 제롬을 두고 부엌으로 가서 케이크 상자를 꺼냈다. 수년 전, 둘이 함께 카페 진열대 앞에서 오래 서 있었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제롬은 그때 초콜릿케이크와 푸딩 사이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결국 아무것도 사지 못했었다. 나중에 꼭 한 트럭을 사주라며 농담처럼 말했던 그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후에 어른이 된 제롬은 약물 부작용으로 새벽에 벌떡 일어나 꼭 그때와 똑같은 그 초콜릿케이크와 푸딩을 가득 퍼 먹고서 구토하고 다시 잠들곤 했다. 그런 추억 때문에 키이스도 늘 같은 디저트를 집에 보관하고 있었다.
"배고프지? 달콤한 거 좋아했잖아."
"좋아! 나 푸딩 진짜 좋아해."
살금살금 다가온 제롬이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키이스는 초콜릿케이크와 푸딩을 접시에 옮기며 맥 빠지게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들은 함께 작은 식탁에 앉았다. 키이스의 맞은편에 앉은 제롬은 숟가락을 쥐고 푸딩을 한 입 떠서 입안에 넣었다. 그는 한순간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음, 맛있어!"
"그렇지?"
"아…. 근데, 이상하네."
"뭐가?"
"모르겠어. 이거 예전에 먹어본 것 같아, 그런데 기억이 안 나."
키이스는 끙끙대며 머리를 부여잡는 제롬의 의자 뒤로 다가가서 살포시 안아주었다. 이내 진정한 제롬이 키이스의 냄새를 킁킁 맡는다.
"키이스, 담배 냄새 나."
3.
밤이 깊어지자 제롬은 벽난로 근처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키이스는 조용히 그의 어깨에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리고 살포시 담요에 감싼 채로 조심스럽게 들어서 침실로 옮겼다. 그 순간 비몽사몽한듯 제롬이 낮게 중얼거렸다.
"엄마 꿈 꿨었어. 나한테 괜찮다고 말해줬어. 이제 안 아프다고."
"그래."
"나도 이제 괜찮은 거지? 키이스."
"응, 제롬. 이제 다 괜찮아. 함께 행복하기만 하면..."
제롬은 다시 눈을 꼬옥 감았다. 나이를 거스른 그의 얼굴은 마치 잠든 아이 같았다. 키이스는 한참 동안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시간은 제롬과 창문 사이 어딘가를 날아다니며 멈췄다. 물기 어린 창문 밖에서는 봄비가 부드럽게 지나가고 있었다. 잠시 후, 제롬이 다시 잠에서 깨어 조용히 속삭였다.
"키이스."
"응?"
"내일은 밖에 나가자. 산책하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좋지."
"같이 가줄 거지?"
"당연하지. 내일도, 그다음 날도. 계속 함께야."
제롬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눈을 감고 일정한 숨소리를 색색 내면서 잠든다. 키이스는 그 옆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기억이 없어도, 넌 지금 이대로 아주 괜찮아."
봄비는 조금씩 잦아들고, 방 안에는 푸딩의 달콤한 냄새와 따뜻하고 포근한 향기가 뒤섞여 있었다. 키이스는 그 냄새를 들이쉬면서, 사라져 버린 모든 순간들을 아주 천천히 흘려보냈다. 이제 더 이상 끔찍한 일들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 지금 이 제롬, 어린아이가 된 제롬과 자신이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겨우 몇 년 만에 처음으로 편안하게 숨을 들이쉬고 뱉을 수 있었다.
4.
창문을 통해 들어온 네모난 아침 햇살이 방안을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 제롬은 식탁에 앉아 신문을 들고 있었다. 모든 것을 잊은 만큼 글을 모르는 손끝이 조심스럽게 활자를 더듬는다. 그는 요즘 키이스가 구독했던 여러 낡은 잡지와 신문들을 모아 글자를 익히고 있었다.
"이거는…. '배우' 맞지?"
키이스는 커피를 마시다 말고 번뜩 고개를 들었다. 제롬이 신기한 듯 빛바랜 신문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신문지에 붙어 있던 먼지가 춤추며 햇살 아래로 흩어졌다.
"응, 맞아. 어떻게 알았어?"
"기사 제목에 네 이름 옆에 쓰여 있더라고. '인기 배우 키이스 벨' 그게, 너 맞지?"
키이스는 잠시 웃음과 한숨을 섞어 내뱉었다. 그는 어쩐지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오래된 거야. 그땐 연극 하던 시절이지."
"근데 지금은 배우 아니야?"
"이젠 영화 만드는 사람이야. 제작자."
"왜? 왜 그만뒀어?"
그 질문은 순수하고 또 너무나도 순수해서, 도망칠 틈조차 없었다. 키이스는 커피잔을 슬쩍 내려놓으며 잠시 눈을 피했다.
"글쎄…. 그냥, 무대보다 무대 뒤쪽이 더 편해졌달까. 사람들 앞에 서는 게 좀 힘들어졌지."
"왜? 무서워서?"
"응, 뭐 그런 걸지도."
제롬은 신문을 내려놓고 천천히 고개를 갸웃했다. 키이스는 어리숙한 제롬의 그 모습이 사랑스러웠지만 어쩐지 이어질 질문들이 불길했다.
"근데 난 네가 배우일 때 더 좋았을 것 같아."
"왜 그렇게 생각해?"
"배우는…. 관객들이 기다리는 사람이잖아. 대본이든, 관객이든, 다 너를 기다려. 그런 사람은 멋있어."
키이스는 대꾸하지 못했다. 대신 옅은 웃음만 지었다. 제롬의 말들이 기묘하게 가슴 한구석을 저릿하게 자극했다. 두 사람이 점심을 먹고 난 뒤 제롬은 설거지를 돕겠다고 팔을 걷었지만, 결국 싱크대 앞에서 거품을 얼굴에 묻힌 채로 끝났다.
"...나중엔 나 혼자서도 다 할 거야."
"그럼 그때 되면 내가 제롬 밥 얻어먹는 거네?"
"응, 진짜 잘할 거야. 키이스, 두고 봐."
그날 저녁에는 함께 욕조에 따뜻한 물을 채웠다. 욕조에선 거품이 천천히 피어오르며 천장을 따라 물방울무늬처럼 흩어졌다. 제롬은 거품을 모아 손 위에 올려놓고는, 그걸 키이스에게 보여주며 웃었다.
"키이스, 봐, 눈 같지?"
"응, 눈사람 같네."
"키이스는 눈 좋아해?"
"예전엔 싫어했어. 너무 추워서. 걷기도 불편하고."
"근데 지금은?"
"지금은 괜찮아. 같이 보면 괜찮은 것도 많으니까."
목욕 후엔 키이스가 뽀송한 수건으로 제롬의 머리를 닦아 말려주며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제롬은 텔레비전의 비누 광고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키이스의 팔에 살포시 기대었다. 키이스는 제롬의 동그란 머리통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제롬은 가볍게 재채기를 하고 훌쩍거리더니 불쑥 말을 꺼냈다.
"내일은 영화 보러 가자. 네가 만든 거 볼 수 있어?"
"그건 조금 오래 기다려야 될걸. 아직 편집 중이라서."
"그럼 산책하자. 가게에서 푸딩도 더 사고."
"좋지, 제롬, 이만 자자."
밤이 되어 두 사람은 같은 침대에 누웠다. 키이스 옆의 제롬은 뒤집어쓴 이불 속에서 작게 속삭였다.
"키이스."
"응."
"나 글 배우는 게 재밌어. 신문에, 네 이름 나온 것도, 무지 신기했어."
"그래?"
"응. 나도 언젠가 내 이름 신문에서 보면 좋겠다..."
"그래, 그럴 거야..."
제롬은 그렇게 말한 뒤 잠잠히 숨을 고르다가, 키이스와 덮은 이불 끝을 손가락으로 꼭 쥐었다. 키이스는 그 손짓을 어둠 속에서 감지한다.
"기억이 없어도 난 괜찮은 사람이지?"
키이스는 대답 대신 제롬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방 안에는 서로의 숨소리만이 천천히 섞였다. 창밖 가로등의 빛이 커튼 사이로 번져와, 두 사람의 얼굴 위에 잔잔히 내려앉았다. 키이스는 그 미미한 빛 속에서 눈을 감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하늘이 내려준 새로운 기회야. 상실의 끝이자 기적의 시작이야.
5.
영화 촬영은 계절이 바뀐 뒤 어느 날, 키이스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있으면 누구나 배를 가르고 싶어 하기 마련이었고, 키이스의 욕심도 끝 간 데 없었다. 인간이 언제나 더 욕망하고 원하게 되는 것은 숙명이다.
"네가 주인공이야, 제롬."
"나는 영화 같은 거 잘 몰라..."
"걱정 마. 그냥 있는 그대로의 너면 돼."
제롬은 망설였지만 키이스의 눈빛이 너무 간절해서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촬영이라기보단 일기처럼 보였다. 작은 카메라 하나와 조명 하나, 그뿐이었다. 키이스는 말없이 카메라를 들고 제롬을 바라보기만 했다. 렌즈가 천천히 줌 인될 때마다 제롬은 무언가 불안한 듯이 어색하게 웃었다.
"왜 그렇게 보고 있어? 나 이상해?"
"아니. 그냥 네가 너무 좋아 보여서."
"뭐야. 우리는 무슨 사이야?"
"형제 그 이상. 우리는 서로가 곧 자기 자신이야."
그 말은 꼭 대사 같았지만, 촬영 대본엔 없던 말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무언의 침묵이 흘렀다.
며칠 뒤, 키이스는 제롬에게 찍을 영화의 시나리오를 조금씩 읽어줬다. 그것은 기억을 잃은 한 남자와, 그를 돌보는 친구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구조 자체가 제롬의 삶의 거울상이었다. 처음엔 단순히 이야기가 아름답다고 느꼈지만, 어느 순간 제롬은 문장 속에서 자신이 본 적 없는 장면들을 기억해 내듯이 느끼기 시작했다. 그 안에 자신의 어머니가 있었고, 울려 퍼지는 총성이 있었다.
"키이스, 이거…. 이상해. 왜 이렇게…. 익숙하지?"
"아마 주인공이 널 닮았으니까, 그럴 거야."
"그럼 나, 진짜 이런 적이 있었던 거야?"
"아니."
그 대답은 너무 빨라서 오히려 숨겨진 진실의 확인 사살처럼 들렸다. 제롬은 무척 혼란스러웠다. 카메라 속에서 제롬의 시선은 점점 흔들렸다. 대본을 따라 걷고, 웃고, 슬퍼하는 장면들이 반복될수록 그는 자꾸 멈춰 섰다. 숨이 차오르고 꽉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키이스, 이거, 그냥 연기지? 이건 다 가짜잖아?"
"그래, 다 연기야."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프지?"
그날의 촬영은 중도에 중단됐다. 키이스는 제롬을 붙잡고 그저 오늘은 그만하자고 말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담긴 건 위로가 아니었다. 마치 진짜 기억이 돌아오는 걸 막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처럼 절박했다. 총상으로 인해 뇌에 문제가 있으니까 기억이 돌아올 가능성은 낮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자극을 주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모든 불행을 잊은 제롬 덕분에 행복한 자신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날 밤, 광학 편집실에 걸린 필름에 제롬의 얼굴이 멈춰 있었다. 그는 웃으면서도 눈동자 주변이 떨리고 있었다. 키이스는 그 장면을 수십 번이나 돌려봤다. 카메라 줌은 제롬의 얼굴 끝까지 파고들었다.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눈, 코, 입, 숨결, 그 모든 게 자신이 사랑하는 이의 형상이었다. 그의 손이 필름을 더듬었다. 마치 그 속에 제롬이 갇혀 있는 것처럼 애절하게 만져 보았다. 그건 너무나도 사랑하는 시선이 담긴 줌 인이었다.
6.
다음 날 일찍 일어난 제롬이 꼼지락대더니 침실의 따뜻함 속에서 중얼중얼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 어제 꿈꿨어. 무대 위에서 네가 나를 부르던 목소리가."
"...그런 꿈은 꾸지 마."
"근데 키이스, 그건 꿈이 아니었던 것 같아."
"아니. 꿈이야."
재빠르게 키이스가 제롬의 손을 잡았다. 피가 빠져나간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제발, 그건 지금 우리 얘기가 아니야."
제롬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조금 웃었다.
"...응. 그래도 난 좋았어! 키이스가 날 찍어줘서."
"왜?"
"그 카메라로 날 볼 때 키이스는 세상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는 얼굴이었으니까."
키이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제롬의 말이 사실이었다. 키이스는 카메라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만들고 있었다. 결국 기억을 잃을 정도로 고통받은 영혼을 다시 한번 괴롭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오로지 자신의 욕망 때문이다. 분명 그건 구원 따위가 아니라, 사랑을 가두는 감옥이었다. 둘은 그렇게 서로를 붙잡고 있었다. 기억으로부터 도망치려는 한 사람과, 그 기억을 영화 속에 되살려 박제시키려는 욕심마저 가진 한 사람이다. 모든 과거를 버린 채 빛을 향해 달리면서도, 결국엔 같은 그림자에 갇혀 있는 두 사람이었다.
"...오늘은 바다에 가서 촬영 하자."
"바다? 나 바다 가보고 싶어!"
그렇게 키이스와 제롬은 차에 타고 바다로 출발했다. 마침내 찾아온 바람이 잦아든 모래사장은 해 질 녘의 빛으로 붉게 물들고 있었다. 태양은 바다로 스며들고 있었고, 그 위로 파도소리와 바람결에 흔들리는 갈매기 울음소리가 간간이 섞였다.
"여기서 영화 찍어도 괜찮아?"
키이스가 물었다. 제롬은 맨발로 모래 위를 톡톡 밟으며 고개를 주억거리며 끄덕였다.
"응. 근데 너-무 예뻐서, 키이스가 영화만 찍으니까 아까워!"
키이스의 손에 든 카메라가 천천히 흔들렸다.
"뭐가 아까워, 널 찍을 수 있는데."
렌즈 속의 제롬은 눈썹이 석양빛에 젖어 있었다. 그 표정은 연기가 아니었다. 그냥 충실히 살아 있는 순수한 얼굴, 햇살에 반사된 바다의 숨결 같았다.
"제롬, 여기 와봐."
"왜?"
"글자 써보자. 너 요즘 공부하잖아."
"글씨…. 어려워."
"괜찮아. 이름만 써봐. 네 이름 써봤어?"
제롬은 망설이다가 손가락으로 모래를 긁었다. 선은 삐뚤빼뚤했고, 모래가 흩어져 모양이 흐릿했다.
"이게 '제롬'이야?"
“음…. 거의 다 맞아.”
키이스가 웃으며 제롬의 손을 잡아 덮었다.
"여기, 이렇게. 'J'. 그리고 이렇게 돌려서, 'e'."
둘의 손가락이 동시에 움직였다. 석양빛에 닿은 손끝이 조금 따뜻했다.
"그럼 키이스 이름도 알려줘."
"나? 내 이름?"
"응. 같이 써야지. 나란히."
"좋아."
키이스는 제롬 옆에 앉아 자신의 이름을 썼다. 'Keith' 글자 끝은 파도에 젖어 금세 번들거렸다. 제롬이 헤헤 웃으며 말했다.
"둘이 꼭 한 단어 같네."
"그렇지."
둘은 마주 보고 방긋 웃었다. 파도가 살짝 밀려와, 모래 위에 남은 글자를 스쳤다. J의 곡선이 먼저 사라졌다. 그 뒤를 따라 K가 반쯤 무너졌다.
"야, 지워진다..."
제롬이 키이스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키이스가 간지러운듯 조금 웃는다.
"괜찮아. 또 쓰면 돼."
"매번 이렇게 지워질 텐데?"
"그럼 계속 쓰면 되지."
제롬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몸을 숙여 키이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카메라가 모래밭 위에 굴러떨어졌다. 렌즈는 바다 대신 두 사람의 그림자를 비추고 있었다. 바람이 지나가며 파도 소리와 섞여 이름을 지운 대신 숨소리를 허공에 남겼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해는 거의 바닷속으로 잠겼다. 모래 위에는 이제 아무 글자도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모래 위 두 사람의 발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키이스는 천천히 제롬의 약간 축축한 깡마른 손을 잡았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찍자."
"응."
"이 장면…. 우리가 있는 그대로 담겼으면 좋겠는데."
"응, 근데, 이미 찍혔어."
"응?"
제롬이 웃으며 카메라를 가리켰다. 렌즈에는 검은 실루엣 두 개가 붙어 있었다.
"봐, 우리 둘이 있잖아?"
그리고 바다에서 또 한 번 파도가 밀려왔다. 모래 위의 모든 것을 덮고 지나갔다. 그 안에는 이름도, 웃음도, 마지막 태양 빛 한 줄기도 함께 섞여 있었다. 어두운 밤이 완전히 내려앉을 때까지, 키이스와 제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의 손을 잡은 채, 그저 바다가 들려주는 소리를 들었다.
7.
브로드웨이의 밤공기는 늘 그렇듯 습했다. 늦은 저녁, 키이스가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손을 말릴 때쯤이었다. 부엌 쪽 작은 창문이 살짝 흔들리더니, 무언가가 ‘딱’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제롬은 즉시 뒤를 돌아봤다.
"뭐야? 바람이야?"
"제롬."
키이스는 미묘하게 얼굴이 굳어 있었다. 잠시 후 문손잡이가 아주 천천히 내려갔다. 제롬은 헉 하고 숨을 삼켰다.
"누구지...?"
"조용히 해."
키이스의 목소리가 한없이 낮게 떨어졌다.
"안으로 들어가."
"키이스...?"
"침실로 들어가. 옷장 안에 숨어."
제롬은 머뭇거렸지만, 키이스의 표정이 이상하리만치 굳어서 겁이 나 다른 생각을 못 했다. 결국 제롬은 침실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커다란 옷장이 한쪽 벽을 채우고 있었다. 작은 나무문, 낡은 손잡이, 그리고 그 뒤에는 빽빽한 어둠이 있다. 옷장에 손을 대자마자 키이스가 뒤에서 속삭였다.
"빨리 들어가."
"같이 들어가면..."
"좁아."
"그러면, 키이스는?"
"난 괜찮아."
그 말과 함께 키이스는 제롬의 등을 떠밀었다. 몸이 안으로 들어가면서 문틈이 닫혔고, 그 좁은 틈 사이로 잠깐 마주친 키이스의 눈빛은 분명 미소였는데, 동시에 '조용히' 하라는 신호로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다 댄다. 입술이 움직였다. 쉿. 그 단 한 음절이 제롬의 심장을 쥐어짜듯 흔들었다. 그 순간, 오래전 기억의 냄새가, 피와 담배 연기, 술 냄새, 울음소리가, 무대 위에서 터져 나오던 조명처럼 번쩍였다. 그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휘몰아쳤다.
"어, 엄마..."
아주 낮고 작은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 그리고 곧 그 뒤를 이은, 무거운 충돌음이 집안을 울린다. 옷장 밖에서 키이스가 누군가와 싸우고 있었다. 숨이 멎을 만큼 길었던 몇 초가 지난다. 탁자 위에서 유리잔이 바닥에 떨어지고 깨지며 고함이 섞였다. 한 순간, 세상이 멈춘 듯했다.
두 발의 총성.
짧고, 냉혹하게 공기를 찢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다음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제롬은 옷장 안에서 손톱이 부러지도록 문을 움켜쥐었다. 숨을 쉬면 들킬 것 같아서 숨도 죽여서 참았다. 그는 더 이상 키이스의 이불 속에 숨어 꼼지락대는 순진무구한 아이가 아니라, 어른의 몸에 갇힌 어린아이였다. 눈을 감았지만 소리가 들렸다. 탕, 탕, 하고 울린 총성이 그날의 총소리와 겹쳤다. 오래전 피투성이의 바닥 위에서 들려오던 그 끔찍한 데자뷔. 눈물이 흘러내리지만 굳은 몸을 움직여 닦을 수조차 없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다. 문밖이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고막이 윙윙 울릴 정도였다. 그때 문이 천천히 열렸다. 빛이 스며들었고 키이스의 실루엣이 서 있었다. 키이스는 어깨에 총알이 스쳤는지 피가 나는 어깨를 붙잡고 있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그가 말했다.
"제롬, 괜찮아. 다 끝났어."
제롬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른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키이스가 다가와 그를 끌어안았다.
"괜찮아, 괜찮아. 이제 안전해."
그러나 제롬은 여전히 대답하지 못했다. 키이스가 소매로 눈물을 닦아 주었지만 넋 나간 사람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8.
그의 입이 몇 번 열리고 닫히더니 소리가 뒤엉켜 나왔다.
"키, 키... 이스..."
제롬이 처음으로 다시 말을 더듬었다. 키이스의 손이 제롬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하지만 제롬은 마치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 같았다.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굳은 몸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날 이후 제롬은 거의 말하지 않았다. 그의 하루는 일정했다. 키이스가 끓여주는 죽을 먹고,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고, 깨끗한 옷을 입고, 다시 침대에 눕는 것이다. 그는 마치 무대에서 대사를 잊은 배우처럼, 세상의 텍스트를 읽지 못하는 눈으로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 며칠 뒤, 제롬이 입을 열었다.
"…미, 미…. 안."
키이스는 전등을 끄며, 조용히 물었다.
"왜. 뭐가?"
"나…. 또, 또…. 못... 나갔어."
키이스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네 잘못 아니야. 제롬."
"나, 널…. 지켜야 했는데..."
"그건 내 몫이야."
"근데…. 너, 넌…"
제롬의 목소리가 숨이 막혀 오는 듯 점점 희미해졌다.
"너는…. 또 다쳤잖아."
키이스는 대답 대신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제롬의 눈에 또 눈물이 고였다.
"무서웠어. 더 무서운 건 그게 나, 나였어야 해, 했단 거야."
그 말에 키이스의 손이 잠시 멈췄다. 제롬은 그 뒤로 한동안 완전히 말을 잃었다. 아침에도, 밤에도, 그저 멍하게 창밖을 보았다. 키이스는 그런 제롬을 매일 같은 루틴으로 돌봤다. 음식을 만들어 입에 넣어주고, 시트를 갈아주고, 머리를 감겨주었다. 그의 손길에는 어떤 조건도, 기대도 없었다. 마치 이미 버려진 시간을 다시 주워 모으는 사람처럼 그렇게 했다. 제롬을 되찾았다는 만족감이 키이스를 거의 온전히 행복하게 했다.
"제롬, 미안해하지 마."
9.
이제는 이름만 남은 오래된 극장. 그레이 하우스. 그곳은 키이스와 제롬 둘뿐인 상영을 위한 장소가 되었다. 오랜 촬영 끝에 카메라를 멈추고, 필름 릴을 돌리며, 편집기를 닫았을 때 키이스가 말했다.
"이제 정말 끝났어."
제롬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키이스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럽고, 제롬의 목소리는 여전히 불안하게 툭툭 끊겼다.
"…그, 그럼, 이게… 뭐, 완… 완성?"
"그래. 완성."
영화는 제롬의 얼굴로 시작하고 제롬의 얼굴로 끝났다. 후반부 부터는 말을 더듬고, 눈이 흔들리고, 쉼 없이 호흡이 부서지는 그 모든 장면이 그대로 남았다. 키이스는 어느 한 장면도 지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떨림이야말로 그들의 이야기였으니까. 기억을 되찾은 후, 제롬이 말을 다시 더듬게 되자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영화를 계속 찍을 것인가를 고심했다. 목소리를 키이스가 낸다든지, 아예 무성 영화로 바꾼다든지,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런데 두 사람은 갑자기 깨달았다. 이 영화는 개봉을 위해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보기 위해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이 벼락처럼 다가왔다.
밤중에, 둘은 조용히 극장으로 향했다. 어릴 적 숨어들었던 문은 반쯤 녹슬어 있었고, 스크린은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키이스가 낡은 영사기를 세팅하면서 제롬을 보고 웃었다.
"떨려?"
"조, 조금..."
"괜찮아. 네 모든 게 다, 이제 영화 속에서 살아있는 거야."
"나… 나 그런 거 이제 잘 몰… 몰라. 그냥… 키이스가 좋다면 됐어."
"응, 그거면 충분하지."
불빛이 꺼지고 영사기의 덜컹거림이 퍼졌다. 스크린 위로 희미한 빛의 입자들이 날아올랐다. 서로의 그림자가 관객석 천장 위를 스쳐 지나갔다. 영화는 제롬을 담고 있었다. 발그레하게 상기된 얼굴로 행복한 듯 이런저런 말을 하고, 집과 정원에서 춤을 추고, 해맑게 웃는 모습들, 또 불안해하고, 무서워하거나, 폐인이 된 모습들, 그리고 더듬으면서도 하고픈 말을 기어코 하는 모습들까지 스크린을 타고 계속해서 새로운 이야기가 이어졌다. 두 사람 뿐인 적막한 극장 안에는 필름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그러다 제롬이 입을 열었다.
"…나, 그 소, 소리 싫지 않네."
"어떤 소리?"
"내 목, 목소리. 예전엔 싫었는데, 지금은…"
"...좋지?"
"...응."
말은 여전히 더듬었지만 이번엔 조금 더 편안하고 부드럽게 숨결이 이어졌다. 객석에 앉은 두 사람의 손이 가만히 맞잡혀 있었다. 이어진 손으로는 생생히 살아있는 온기가 서로에게 전해진다. 그 순간, 스크린에 남은 잔광이 두 사람을 스치고 지나가며 마치 오래된 필름 속의 먼지처럼 천천히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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