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타 지옥 캠프 플롯 토스 합작, 원작은 호랑 님의 플롯입니다.
※ tw. 정신병, 자살.
1.
푸르른 파도가 차차 높아져 온다. 그렇게 숨을 막히게 한다. 차가운 물 속은, 물 밖의 따뜻함보다도 더 몸을 녹일 위안이 된다. 숨이 막혀 아득해지는 순간만 넘기면 자아의 경계가 녹는듯한 안식이 찾아온다. 수심 깊은 곳 저 아래에서는 온화한 모닥불과 북 소리가 들린다. 더, 더 아래로, 저 아래로 내려가서 그 온기를 쬐고 싶다.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체온은 냉수도 따뜻한 어미의 품처럼 느끼게 한다. 차가운 물에 휘감겨 상냥한 압박감과 먹먹한 침묵을 즐긴다. 그러고 있자면, 드디어 그와 불화하던 이 세상이 자신의 존재를 기쁘게 받아들여 주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아스라이 멀어져가는 의식이 갑자기 시끄럽게 찢어진다.
"폴! 폴, 당신 미쳤어?!"
랭보는 집에 돌아와서 옷을 입은 채 욕조에 잠긴 폴을 발견했다. 차가운 물은 넘쳐흐르고 있고, 욕조에서 끌어낸 폴의 안색은 창백하기 짝이 없다. 어항에서 막 건져낸 물고기처럼 바닥으로 내팽개쳐져 꿀렁꿀렁 물을 뱉어낸다. 불운하게도 혹은 절묘하게도 그에게는 아가미가 없다. 폴은 가슴츠레한 눈을 뜨고서 한참을 젖은기침을 하며 온몸을 써서 물을 토해낸다. 그리고는 젖은 옷을 비틀어 짜며 랭보에게 말한다.
"랭보, 저녁은 뭘 먹을까?"
"지금 당신은 그게 중요해?"
"양배추 롤은 어때? 재료 있는데."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익사하고 싶은 거야?"
"와인도 같이 마시자. 나 추워."
배시시 웃는 폴의 얼굴에 랭보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폴의 손끝에서 물이 뚝뚝 흘러내려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그 자국은 랭보의 마음에도 깊이 새겨졌다.
2.
아가미가 없더라도 인간은 바다를 꿈 꿀 수 있다. 폴의 주머니에는 언제나 돌멩이가 가득 들어있었고, 랭보는 그것을 빼내어 버리는 일을 습관적으로 했다. 바다는 두사람이 지켜야 할 금기가 되었다. 바닷가에 혼자 가지 않을 것을 약속하라고 단호히 말하는 랭보 앞에서 가만가만 새끼손가락을 걸 수밖에 없는 폴은 유약한 인간이다. 그리고 그 유약함이 친수성을 띄고 있어서, 오늘날 두 사람은 괴로워진 것이다.
폴은 자주 바다 위로 떨어지는 꿈을 꾸고 일어났다. 그럴 때는 옆에서 자는 랭보의 품에 들어가서 심장에 귀를 대고 두근거림을 느끼려고 했다. 그러면 둥, 둥하고 북소리가 들려온다. 물속 깊은 곳, 저 아래에서 타오르는 모닥불과 함께 울리던 그 북소리다. 불안하게 뛰던 자신의 심장이 그 차분한 북소리에 맞춰 동기화된다. 폴은 그 순간 랭보라는 지휘자에 맞추는 하나의 악기가 되어 떨린다. 잠에서 깬 랭보가 부드러운 손길로 폴의 동그란 뒤통수를 껴안아 쓰다듬어 준다. 그렇게 그들은 다시 잠든다.
그런 밤들이 계속된다. 랭보도 종종 폴이 바다에 빠지는 악몽을 꾼다. 분명 미성년은 랭보 자신이고 어른인 쪽은 폴인데도, 폴을 생각하면 말 그대로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보는 것 같았다. 매일 수난 구조를 위해 랭보가 뛰어들지만, 역부족이고, 물은 무겁고 너무나도 무거워 가라앉는 폴을 끌어올릴 수 없다. 짜디짠 물이 입안으로 들이치고 문득 랭보는 생각한다. 다른 존재들은 익사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는다. 결함이 있는 생명체만이 물 밖에도 물 속에도 적응하지 못하는 변칙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높고 어두운 파도는 악몽이 되어 그들을 매일 밤 덮쳐오고 숨구멍을 틀어막는다. 두 사람은 물 위를 표류한다.
3.
어느날 밤새 잠을 설치고서 늦잠을 잔 랭보가 느지막한 오후에 일어났다. 따사로운 햇살이 창문으로 들이쳐 기울어지고 있었다. 노란 햇빛에 비친 먼지가 하얀 포슬눈처럼 허공을 맴돌며 빛났다. 잠을 충분할 정도로 잔 탓인지 지나치게 안락한 기분이다. 그러다 문득 옆자리에 폴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손으로 빈 자리를 짚어 본다. 그가 빠져나간 이불에는 일말의 온기조차 남아있지 않다. 그가 나가고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폴은 지금, 어디에 있지?
랭보는 가볍게 몸을 일으켜 벌떡 뛰쳐나온다. 폴이 어디로 갔는지를 찾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옷을 급하게 걸친다. 집을 나서면서 훅 하고 차가운 공기를 들이쉰다. 그런 순간에는 모든 게 명료하다. 바닷가에 가면 폴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바닷물을 바닥이 드러나도록 마시고 있을 지도 모른다. 폴 그 자신이 왜 그러고 있는지도 모른 채로.
숨차게 달려간 바닷가는 햇빛이 강하고 동시에 바람도 사나웠다. 황량한 모래사장에 둥글게 쭈그려 앉은 뒷모습이 보였다. 안심하고서 다가가니 나뭇가지로 모래 위에 무언가를 적고 있는 폴의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랭보는 다가가서 옆에 쭈그려 앉아 폴을 바라보았다. 폴이 골똘히 생각하는 옆얼굴은 정말이지 사랑스러웠다. 그는 모래에 글씨를 적는데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
"폴, 뭘 적고 있어? 시?"
"아니, 유서."
"뭐?"
"그래, 이대로라면 언젠가는 임종이 찾아오니까."
"찾아온다고? 당신이 가는 게 아니라?"
"응. 느껴져."
제 대답의 어디가 이상하냐는 듯 빤하게 랭보를 보는 폴은 어딘가 부서진 것 같았다. 그 부서진 귀퉁이로 계속해서 물이 새는 듯했다. 그 광경을 가만히 보던 랭보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폴은 망가졌고 그건 어쩐지 자신 때문인 듯도 하다. 그렇다면 축축한 폴이 바싹 마를 만큼 따뜻하고 행복하게 해 주면 그만이다. 랭보는 폴을 구원해주기로 한 것이다. 그가 유서가 아닌 시를 쓸 때까지, 난파선에 탄 채로 난파선을 고치기로 한 것이다. 그런 무리라도 랭보 자신이라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4.
랭보는 일자리를 구했다. 생각할 수 없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소년은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오늘은 세 번째 직장에서 해고당한 날이었다. 그런 일로 기죽지 않는 랭보는 씩씩하게 빵과 종이 조금을 사서 집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의 집에는, 먼저 퇴근한 폴이 수프를 끓여두었는지 고소한 냄새가 났다. 그러나 부엌에는 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욕실에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열었다. 또 물이 넘치는 차가운 욕조에 옷을 입은 채로 들어가 멍하니 앉아있는 폴의 모습이 보였다.
"폴, 뭐해?"
"너도 들어올래?"
핏기없이 파리한 얼굴과 대조되게도 장난스럽게 웃는 표정의 폴은 해맑아 보였다. 랭보는 그래도 안심하고 문간에 앉아 바지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폴이 이렇게 미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시를 계속해서 쓰지 않는다면 정말로 모든 것이 끝장이 날 것만 같았다. 지금 시를 놓아 버린다면, 두 사람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랭보는 어쩐지 창문 너머로 불어오는 듯한 비릿하고 짠 바다 내음을 주제로 시상에 잠겼다. 폴은 욕조 안에서 즐거운 듯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샹송 트리스트를 부르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욕실에 울렸다.
"당신의 마음에 달빛이 있어요, 달콤한 여름 달빛이, 그리고 귀찮은 삶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당신의 빛 안에서 나 죽음을 맞이하네요-"
폴의 목소리는 아주 촉촉하고 무척 감미로웠다.
"나는 고통의 발자국들을 잊어요, 내 사랑이여, 당신이 흔들어 재울 때, 나의 슬픈 마음과 생각이, 평온하며 사랑스러운 당신의 팔에서, 당신은 나의 아픈 머리를 붙들어요-"
랭보는 마치 오늘 처음으로 진정하게 노래를 듣는다는 행위를 하는 것만 같았다.
"오- 때때로 당신의 무릎 위에서, 그리고 발라드를 읊어주네요, 우리가 서로 말하는 것과 같은 발라드를-"
이렇게 달콤한 노래를 듣는데 왜 이렇게 짜고 비릿한 냄새가 날까? 노랫소리가 점점 가늘어진다.
"당신의 눈에는 슬픔이 가득하면, 나는 당신의 눈에서 술을 마셔요, 수많은 입맞춤과 사랑으로, 나는 치유가 되어요-"
점점 심해지는 짜고 비릿한 냄새에 랭보는 문간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어서서 보니 욕조안의 물이 새빨간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랭보는 달려들어 폴을 건져낸다.
5.
병원에서는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팔에 긴 흉터는 남을 거라고 말했다. 랭보는 병원 침대에서 곤히 잠든 폴의 이마를 쓸어주었다. 잠들어 있을 때는 어른이라기엔 너무나 어린아이 같은 얼굴이다. 오래 입원할 돈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면 바로 귀가하도록 되어 있었다. 랭보는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러 거리로 나갔다. 물론 가망이 없는 일이지만, 곧 깨어날 폴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기 위해서 헛수고라도 해야 했다. 이대로 폴을 내보내면, 그가 바닷가로 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랭보는 하루종일 구두닦이 등 잡일을 하고 푼돈이라도 쥐고 병원으로 돌아왔다. 의사는 폴 베를렌 씨는 퇴원 수속을 밟고 나갔다고 말했다. 그는 의사의 면전에 욕설을 내지르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의사는 지금 그가 온전치 않은 사람임을 몰랐고, 귀찮은 일을 더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태양은 수평선을 넘어가면서 하늘과 땅을 천연색으로 물들인다. 랭보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쏠리듯 바닷가로 달려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이 달리고 있기 때문인지 엄습하는 공포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점차 호흡이 거칠어질 때쯤에 해변에 도착했다. 바로 정면으로 노오란 태양이 바다의 표면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반짝이는 물결 하나하나를 빠짐없이 눈으로 훑는다. 너무 눈이 부셔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눈을 부비고 다가가며 다시 물살을 쳐다본다. 광활한 바다 그 가운데 금빛으로 빛나는 곳에, 한 사람이 물속에 반쯤 잠긴채로 걸어가고 있었다. 바다 깊이 더 깊이 망설임 없이 나아가는 실루엣에 가슴이 철렁한다. 물가로, 랭보는 그를 향해 급박하게 달려가면서 생각한다. 주머니에 돌이 들었을까? 다리에 바위라도 묶었을까? 상처는 벌어지지 않았을까?
"폴, 폴! 잠깐만! 폴!"
랭보의 간절한 외침에 폴은 말끄러미 그를 돌아본다. 마치 집 안에서 부른 것과 똑같이 여상한 표정과 동작이다. 그 일상성에 랭보는 미칠 듯 아득해진다.
"왜? 랭보."
"왜, 왜냐니, 왜 여기 있어? 당신 어디로 가는 거야?"
랭보는 다가가서 폴의 여린 손목을 잡아챈다.
"물 속으로, 저 아래로. 나를 부르고 있어."
그렇게 말하는 폴의 눈동자에서 상처가 비쳐 보였다. 그의 부서진 귀퉁이로 바닷물이 콸콸 들어와서 침수되고 있는 순간이다.
"집에 가자. 추워진다, 당신 감기 걸려."
"괜찮아, 랭보, 다 괜찮아."
"뭐가? 대체 뭐가 괜찮은데?!"
"이게 내가 찾은 진정한 시야. 바다 아래에서 들리는 북 소리, 그리고 노래."
폴은 랭보가 이해 할 수 없는 말을 하며 방긋 웃었다. 아니, 그는 한편으로는 그 말을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두려웠다. 끔찍하다. 귀를 틀어막고 싶다. 이런 결말을 긍정해줄 수는 없다. 절대로. 랭보는 폴을 억지로 끌어안아서 가까스로 품에 가뒀다. 그리고서 쿵, 쿵 하고 뛰는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려줬다. 그제서야 폴의 바짝 마른 몸에 힘이 스스르 빠진다. 랭보는 잠긴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한다.
"...돌아가자, 폴."
6.
"나는, 난 가야 해. 랭보. 물 속으로, 바닷속으로."
"거기에 아무것도 없어! 물 속에 뭐가 있다는 거야!"
밀려오는 파도 속에서 두사람이 다툰다. 물에 그 모습이 고스란히 비친다. 그 응시는 거의 운명적으로 희망과 연결된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아름다움을 명상하고, 자신들의 미래를 명상한다. 그러니까 한순간 이들의 나르시시즘은 일종의 자연적인 거울이 되었다. 그리고 그 거울은 죽음을 보여준다. 이제 이 거울은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물보다도 깊고, 잠들어 있고, 죽은, 무거운 물이다. 삶이 이 순간 죽음에 의해 그려진다.
폴은 물에서 죽기 위해 태어난 피조물처럼 잔잔하게 미소 짓는다. 랭보는 그런 폴을 찰나적으로 이해해 버리고 만다. 물이라는 미지 속으로의 도약이 폴이 가진 마지막 생명의 불꽃이 원하는 바임을 이해한다. 랭보는 폴을 살포시 놓아준다. 그리고 폴의 손목을 잡아채서 먼저 바닷속으로 척척 걸어간다. 두 사람은 황금빛 바닷속으로 녹아 간다. 폴은 이해의 일치에 감격해서 랭보를 끌어안는다. 랭보는 마지막 인공호흡을 하듯 폴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는 숨을 불어 넣는다. 태양은 시시각각으로 기울어져 간다. 파도는 점차 어둡게 채색된다. 둘은 한참을 그렇게 끌어안고 있다가, 문득 폴이 랭보를 바라보며 말한다.
"랭보, 저녁은 뭘 먹을까?"
"...이 망할 여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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