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ㅇ랭ㅂ폴, 랭폴. 정말이지 진짜로 뭐든지 괜찮으신 분 전용...

여느때와 다름없는 어느날에 랭보는 그래도 폴을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시인 폴 마리 베를렌느의 집을 물어물어 찾아가서 만난 건 그의 아내인 마틸드였고.... 그녀는 조용히 주소가 적힌 메모를 건네면서 아무 말도 하지않고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랭보는 어느 시골의, '생 폴 드 모졸 요양원'의 주소와 그의 병실 번호가 적힌 메모를 받는다. 그렇게 쪽지 하나를 들고 묻고 물어서 어렵게 찾아간 요양원에서 면회 신청을 했다. 그리고서 랭보는 요양보호사에게 4층의 병실로 안내받는다. 그런데 그를 따라가던 랭보는 문득 폴이라면 이곳에서 뛰어내리려 하진 않을까, 폴 같은 환자에겐 위험하지 않나, 왜 4층이지? 라고,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 랭보와 폴 사이의 거리는 좁혀지고, 4층의 어느 병실 문 앞에 당도했다.

그리고 조용히 병실 문이 열리고, 고개를 홱 돌린 폴의 무구한 두 눈동자가 랭보에게로 쏟아진다.

"누구야?"

"폴,"

"난 널 몰라."

폴의 약간 창백하던 볼이 이젠 발그레한 혈색이 돌았고, 내리깐 속눈썹에는 윤기가 돌았다. 요양원에서 규칙적인 생활을 해서일까.

"내가....기억이 안 나?"

"이상한 형아네..."

형? 날 두고 형이라고 했나? 랭보는 귀가 잘못된게 아닐까 잠시 고민했다.

"랭보, 나 랭보야. 정말 모르겠-"

"난 폴! 폴 베를렌느야. 친하게 지내자~"

"폴...?"

그때 병실까지 안내해 준 요양보호사가 랭보를 잡고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랭보는 가슴이 답답했다. 대체 저놈의 절레절레의 의미가 뭔데?

"지금 베를렌느씨는, 일종의 퇴행 방어기제 상태에요. 그러니까....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정신연령이 유아 수준으로 퇴행했다는 말예요."

"...네?"

"지금은 베를렌느 씨가 남긴 재산으로 입원해 있는데, 퇴원 시키시려 오신거죠?"

"......네?"

랭보는 당황했다. 세상에는 이 소년을 당황시킬수 있는것이 많지 않았으나 예외로 이 상황은 그러기에 몹시 충분했다.

"남은 돈은 환급해 드릴게요. 내려가서 간단히 퇴원 수속을 하면 됩니다."

폴이 낡은 곰 인형을 안고서 불안한 눈빛으로 랭보를 보며 천천히 걸어왔다.

"랭보형아. 우리 어디 가는거요?"

비쩍 마르고 체구가 작긴 했지만, 다 큰 남자가 랭보를 형이라고 부르는 모습은 꽤 신선한 충격을 줬다.

"으음....형이라고 부르지 마. 우린 친구니까"

"랭보."

"그래 그게 훨씬 낫다."

"랭보, 랭보, 랭보...랭보..."

폴은 곰 인형의 눈을 들여다보며 랭보의 이름을 가만히 되내어본다.

"그래, 폴, 이제 여기서 나가자!"

"나간다고? 그런 짓 하면, 원장 선생님이 화낼텐데...."

폴은 불안한 듯 바르르 떨며 랭보의 옷깃을 쥐었다.

"이젠 괜찮아 폴, 내가 있으니까."

랭보도 약간은 떨면서 대답하고서 자신의 옷깃을 쥔 폴의 손을 맞잡았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되는 구석이 하나도 없다. 지금 한가지 알 수 있는 건 병실의 작은 창문에 비친 랭보 자신이 미소 짓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째서? 폴이 이렇게 되고 말았는데 자신은 어째서 미소를 짓고 있단 말인가.

두 사람은 요양원의 1층에서 간단한 퇴원 수속을 밟고 건물을 걸어 나왔다. 요양원에서 내민 폴의 짐은 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가방에는 종이와 펜과 시집, 그리고 곰 인형을 포함한 약간의 잡동사니가 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이 무엇을 주는지 지금의 폴은 모르는 것 같았다. 잠깐, 지금의 폴이 글자를 쓸 수 있을까?

"폴, 글을 쓸 수 있어?"

한가로운 시골의 햇살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부서진다. 폴은 랭보의 말을 알아들은 것 같지도 않았다.

"글?"

"그러니까, 글자를 쓸 수 있어?"

폴은 가만히 자기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한 손에는 갓 나은 듯 발간 상처의 흉터가 나 있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괜찮아, 그럼 내가 가르쳐 줄게."

"글자를?"

"응, 그리고, 더 많은것도..."

랭보는 갑자기 말문이 콱 막혔다. 두 사람은 말없이 손을 꼭 잡고 시골길을 저벅저벅 걸었다. 얼마 안 가서 소박한 간이역이 나왔다. 두 사람은 역사의 긴 의자에 앉는다. 폴은 심심한지 부산스럽게 발장난, 손장난을 치면서 온몸으로 따분해하고 있었다. 랭보는 생각했다. 이 사람을 데리고서 어디로 가야 할까, 어떻게 하면 폴을...되돌릴 수 있을까. 되돌린다는 게 가능은 한 일인가?

...추억이 깃든 곳으로? 어떤 추억? 무책임하게도 또는, 차갑게 말해 어느 정도는 당연하게도 그의 아내는 폴을 즉각 요양원에 버렸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렇게 되고 나서도 파리에서 살았던 적이 없다면? 그렇다면 파리에 가서 폴이 다니던 곳들에 가면 기억이 되살아 나는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폴, 파리로 갈까? 어떻게 생각해?"

"파리! 이미 죽어버린 도시!"

랭보는 느닷없이 깜짝 놀랐다.

"...뭐라고?"

"으으응, 랭보랑 함께라면 난 어디든 좋아!"

해사하게 웃는 폴의 얼굴에 랭보는 잠시 골이 띵하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 사람도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었구나, 하고.

"잠깐만, 그전에 뭐라고 말했어?"

"이미 죽어버린 도시?"

"...그 말, 기억하고 있어?"

"잘 모르겠어..."

폴은 끄으응, 하고 두 팔로 머리를 부여잡으면서 괴로워했다. 정신이 퇴행한걸로 몸도 같이 젊어지는 것인지, 그 모양이 꽤나 귀여운 느낌을 줬다. 

결국 랭보와 폴 두 사람은 파리로 가는 기차를 탔다.

파리역은 각자 목적지로 향하는 사람들로 붐빈다. 웅성대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오자 폴은 불안한듯 한번 코트를 여미고 부르르 떨었다. 그가 퇴행하기 전에도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불쑥 나오고는 하던 습관이었다. 랭보는 폴을 이끌고 파리 시내를 아무렇게나 걸어 다닐 작정이었다. 둘은 우선 폴이 살던 집 주변으로 향했다. 

"랭보, 여기, 무서운 아줌마 사는 곳이야. 미친 여자."

자기 집 문간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인 폴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명백히 싫다는 의사 표현을 했다. 이렇게 된 후에 아내와는 싸우기만 한 모양인지 좋은 기억은 없어 보였다. 결국 폴의 집을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귀찮게 하면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마틸드 씨가 또 화낼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함께 하루 종일 수많은 거리와 다리들, 대성당과 궁전을 돌아다녔지만, 별다른 수확은 없었다. 랭보는 마음이 조급해졌지만, 폴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놀러 다니느라 기분이 좋아져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재회한 후로는, 폴이 제정신일 때 랭보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표정들만을 자꾸 수집하게 되었다. 그런 모습들에 랭보는 은밀히 기뻐하고는, 다시 한번 뜨끔하고 놀란다. 지금 중요한 건 예전의 폴을 되찾는 것인데, 단지 행복해하는 폴을 보고있자면...정말 기억을 되찾아주는 것이 그를 위한 일인지, 그저 자신의 욕심이 아닌지 의심되었다. 또한 반대로도 여겨졌는데, 자신이 아이가 되어버린 폴의 상태를 즐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폴, 배고프지? 샌드위치 사줄까?"

"응! 랭보 좋아, 랭보 사랑해~하늘만큼 땅만큼!"

샌드위치 하나에 바로 활짝 웃으며 이런 순진한 말을 하는 폴이 존재한다는 점이 랭보의 마음을 쥐고 흔들었다. 폴은 랭보의 뺨에 뽀뽀를 해주며 감사의 말을 했다. 물론, 샌드위치는 폴이 남긴 돈으로 살 것이다. 두 사람은 노점에서 샌드위치 두 개를 사서 공원의 분수대 앞에 앉았다. 

솟아오르는 물, 한가로운 새소리, 흔들리는 나뭇가지 그림자 속의 두 사람은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있었다. 랭보는 샌드위치를 대충 입으로 밀어 넣었고, 폴은 반 정도 먹은 샌드위치를 깨작대고 있었다. 랭보는 손에 든 작은 사탕 꾸러미를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렸다. 노점상 주인이 그들을 안쓰럽게 보더니 선물한 사탕이었다. 두 사람이 어떻게 보일지는 뻔했다. 약간 모자란 동생을 돌보는 어린 형으로 보이겠지....

"폴, 다 먹었으면 이제 가자. 해가 지고 있어."

랭보는 폴의 코트 왼쪽 주머니에 든 손수건을 꺼내서 입가를 닦아주었다. 그래도 샌드위치를 다 먹는 것을 보면 요양원에서 규칙적인 식사를 한 덕분에 폴의 속이 좋아진 것 같았다. 어린아이가 되어버리고 나서는 더 이상 술을 찾지 않고, 그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랭보, 나 분수대에 들어가 보고 싶어!"

"뭐라고?"

바로 이런 황당한 충동을 수반하는 것이 동심의 특징이다. 말릴 새도 없이 뛰어간 폴은 분수대에서 솟아오르는 물을 잡으려고 해작대고 있었다. 낡은 코트가 거진 다 젖었다. 

"이만 가자. 감기 걸려."

"으음~!"

한쪽이 어려진 만큼 다른 쪽은 성숙해져야만 했기 때문에 랭보는 함께 물놀이하고픈 마음을 꾹 참았다.

"그렇게 좋아?"

"응!"

솟아오르는 물 사이로 보이는 기쁨이 만개한 미소에 비치는 석양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랭보는 가만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상황이 불러일으키는 기시감이 랭보에게 아이러니한 미소를 짓게 했다. 폴은 충분히 놀았는지 물을 뚝뚝 흘리며 분수대를 걸어 나왔다. 

"랭보, 그런데 우리 어디로 가는데?"

"어디든 폴이 가고 싶은 곳으로."

폴은 앉아서 잠시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결국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랭보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폴의 동그란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일단 오늘 밤에 머무를 곳을 찾아보자."

두 사람은 싸구려 여관에 들어왔다. 랭보는 돈이 없던 시절에 자주 이런 곳을 이용했기 때문에 특별히 거부감은 없었다. 폴이 남긴 돈은 충분했지만, 아껴서 나쁠 일은 없을 것이다. 랭보는 자신감 있게 문을 박차고 걸어들어갔고, 그 뒤를 두리번거리는 폴이 엉거주춤 따라 들어왔다.

"방 하나 주세요."

랭보가 적절한 것 치곤 조금 적은 돈을 내밀자, 여관 주인은 못마땅한 듯 두 사람을 흘겨보더니 장부를 뒤적여보곤 열쇠를 하나 툭 내려놓았다. 복도는 굉장히 비좁아서 일렬로 걸어야 했다. 여인숙과 민박이 뒤섞인 듯한 기묘한 여관이었다. 두 사람은 그들의 방에 들어왔다. 방에서는 허름하고 퀴퀴한 냄새가 나기는 했지만 있을 건 다 있었다.

"폴, 먼저 씻어."

"...나 혼자?"

이게 무슨 소리지. 랭보는 어려진 폴과 대화할 때면 자주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그럼 같이 씻을까."

결국 두 사람은 좁은 욕조에 끼어서 목욕을 했다. 욕조는 낡고 작은데, 두 사람의 체격도 결코 작다고는 못할 정도라서 꽤나 안쓰러운 인권유린의 현장처럼 되어버린 목욕이었다. 욕실을 나와서 수건으로 폴의 머리를 이리저리 쓸어주며 랭보는 그가 대체 몇 살까지 퇴행한 건지 궁금했다.

"폴, 당신 몇 살이에요?"

"7살, 내년에는 학교에 갈 거야."

손가락을 펼쳐 보이며 당당히 말한다. 한때는 어른스러웠던 랭보의 연인은 이제 일곱 살짜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의 정신에 뚫린 구멍은 이제 그의 일부이다. 구멍을 도려낼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학교에 갈 필요는 없어. 내가 글 쓰는 법 가르쳐줄 테니까"

"랭보가?"

"응. 가방에서 종이 꺼내 와서 앉아봐."

폴은 순순히 랭보가 시키는대로 했다. 두 사람은 한참 알파벳을 종이에 썼다. 그리고 자신들의 이름을 쓰려고 랭보가 종이에 두 사람의 이름을 쓰고 발음했다.

"폴 마리 베를렌느, 이렇게 쓰는거야."

"랭보, 랭보, 나 머리가 너무 아파. 왜? 왜?"

폴은 자신의 이름을 적다가 무언가 떠오르려 하는지, 머리를 부여잡고 팔로 연신 두들겼다. 랭보는 폴의 손을 잡고 다시 펜을 쥐여주었다. 

"힘들어도 써야 해. 그게 당신이야."

"싫어. 랭보. 나 이거 싫어!"

폴은 펜을 내려놓고 책상 앞에서 울먹인다. 랭보는 문득 일곱 살의 의미를 깨닫는다. 글을 배우고, 시를 짓기 전의 나이. 그때로 돌아가야만 폴이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이리라.

"그래. 그럼 그만하고 자자."

"응."

비좁은 침대에 두 사람이 누웠다. 옆방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방음의 의미가 없는 벽을 타고 온갖 소리가 들려왔다. 랭보는 눈을 꼭 감고 모로 누워있는 폴의 실루엣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레 그것은 어른이라기엔 너무 앳된 얼굴로 느껴졌다. 랭보는 이불에서 손을 들어 폴의 옆얼굴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돌연 폴이 눈을 번쩍 떴다.

"랭보, 어두워서 무서우면 어떡해?"

"어딘가에 달빛이 있으니까 무섭지 않아."

"어디에 있는데?"

"어디든. 폴이 앞으로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그려질 거야."

"달빛이?"

"하얀 달, 빛나는 숲속, 우거진 잎사귀 사이로 흐르는 말소리..."

랭보는 너무나도 익숙한 시구를 가만가만 읊어 주었다. 토닥여주자, 폴은 금방 하품을 하더니 잠에 들었다. 랭보는 그러고도 막막한 느낌에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두 사람은 어느 날 어느 시에 일어나서 런던으로 향했다. 꾸벅꾸벅 조는 폴을 이끌고 랭보는 파리에서 칼레 해협까지 철도로 이동했다. 칼레에서 도버까지는 증기선을 타고 이동했다. 증기선에서 멀미로 칭얼거리는 폴에게 사탕을 주며 달랬다. 이렇게나 멀미를 하는데, 예전에 자신과 있을 때는 어떻게 점잖은 척 꾹 참았을까 궁금했다. 

랭보와 폴은 바닷가의 부두에 앉아서 크레페를 먹었다. 얌전히 앉아서 먹는 모습에 칭찬해 주고 싶어서 또 둥근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폴의 머리는 햇빛을 받아서 따끈따끈했다. 

"폴, 잘 먹는 모습이 보기 좋은걸,"

"...응!"

폴이 제정신일 때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방싯방싯 웃는 얼빠진 표정을 보고선 랭보는 그만 또 넋이 나가버렸다.

"런던에 오니까 좋아?"

"응! 바다...파도...하늘!"

랭보는 조금 놀랐지만 해야 할 말을 했다.

"이제 매일 보게 될 거야."

폴은 입을 약간 벌리고 랭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정말 랭보의 기대에 부응하는 답이 무엇인지 모르는 걸까.

"그리고...매일 시를...쓰겠지...?"

더듬더듬 정답을 말하는 폴의 갈 곳 잃은 시선과 어색한 모습을 랭보는 가만히 보고 있었다. 자신이 뱉은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어쩌면 지금이라면.... 랭보는 나뭇가지를 들어 모래사장에 시를 쓰기 시작한다. 폴은 그 모양을 호기심 가득히 쳐다본다.

'그 누가 인생을 안다고 단언할 수 있으리. 다행스러운 사실은 고통스러운 이 삶이 단 한 번으로 끝난다는 것. 이동 수단이라곤 말라빠진 두 다리가 전부.'

랭보는 적고, 다시 읽으며 다 쓴 뒤에 폴에게 나뭇가지를 건네주었다. 폴은 끙끙대며 나뭇가지를 쥐고 모래사장을, 한참을 노려보다가, 나뭇가지를 랭보에게 돌려주며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랭보는 당황해서 나뭇가지를 멀리 내던졌다. 

"폴, 괜찮아."

"아아...랭보...미안해...내가...내가..."

구슬처럼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서 동전만큼씩 번졌다. 랭보는 다시 폴의 코트 왼쪽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원래 이렇게 잘 울 수 있는 사람이었나, 환청에 시달리고 괴로워하더라도 버석함을 유지하던 폴이었는데, 지금은 두 뺨을 완전히 적시도록 고장 난 수도꼭지가 멈추지 않았다.

"울음 뚝 그쳐. 그치면 사탕 줄게."

"응."

꾸러미에 얼마 남지 않은 사탕으로 눈물을 그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한숨을 돌린 랭보는 손수건을 쥐고 주저앉은 폴의 코밑에 가져다 댄다.

"흥해 흥."

"흐응~"

폴의 손수건은 이제 못 쓰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곱게 접어서 코트 왼쪽 주머니에 넣어 놓았다. 겨우 울음을 그친 폴은 붉어진 눈으로 랭보와 시가 적힌 모래사장을 번갈아 보더니 가만히, 천천히 모래사장에 입 맞춘다. 그리고 다시 환한 미소를 짓는다.

"폴! 여기 우리가 왔었던 곳이잖아, 기억이 나?"

"우리가?"

그러나 폴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갸웃거리며 랭보를 바라보았다.

"그래, 우리가 함께."

"잘 모르겠어..."

"시에는 왜 입맞춤한 거야?"

"그건...그건...그래야 할 것 같아서."

"왜?"

"왜냐하면, 그게 네 시에 대한 나의 진정한 평가야."

랭보는 깜짝 놀라서 폴을 바라보았다. 폴도 자신의 입에서 튀어 나간 말에 동요한 듯 깜짝 놀라서 랭보를 마주 보았다. 한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해서 꼬였다. 다음 순간 폴이 먼저 고개를 돌려 눈을 피했다.

"방금, 방금 뭐라고 한 거야?"

"투시자, 새로운 세계를 확장시키는 시인이라고, 나 알았어. 알고 있었어!"

"폴? 폴, 설마 돌아온 거야?"

"아아...아..."

폴은 갑자기 머리를 쥐어뜯더니 다시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워하며 신음했다. 폴이 환청에 시달릴 때면 하곤 했던 버릇 그대로였다. 랭보는 폴의 두 뺨을 감싸 쥐고 폴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다시 눈물이 차오르는 일은 없었지만, 깊은 눈동자는 상처를 품고 있었다.

"폴, 기억해 냈어?"

"아니...아니야...난 못해..."

폴은 공허한 얼굴로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다. 랭보는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결국 두 사람은 일어서서 모래사장을 다시 걸어간다.

랭보는 폴을 이끌고 런던에서 그들이 살던 집으로 곧장 갔다. 집주인도 그대로였고, 폴이 남긴 돈으로 충분히 비용을 지불할 수 있었다. 비록 집주인이 아이처럼 나비를 쫓는 폴을 보고 미심쩍게 쳐다보기는 했지만.

"이제 여기서 당분간 살 거야. 폴, 맘에 들어?"

"정말? 난 랭보랑 함께라면 어디든 좋아!"

"그래?"

"응!"

"그럼 잠시 장 보고 올 테니까 집 지키고 얌전히 있어야 해. 폴."

랭보가 폴의 뺨에 입맞춤하고서 한번 꼭 안아주고 폴을 놔 주었다. 폴도 순진한 눈으로 자신을 마주 바라보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였을까, 그 시선만으로 그 순간 방심한 것이다. 랭보는 폴을 혼자 둬도 된다고 착각했다. 자신이 없는 곳에서 사고를 일으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한 것이다.

랭보가 시장 가방을 들고 돌아왔을 때는 집은 적막하고, 작은 종이쪽지 하나만이 남겨져 있었다. 

- 랭보, 정말 미안해. 나 찾지 말아줘. -

폴의 쪽지는 철자가 틀리고 글자도 엉망진창이었다. 랭보는 잠시 눈앞의 세계가 캄캄하게 암전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화가 치밀었다. 자신에 대한 화인지 대책 없는 폴에 대한 화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정신도 온전치 않은 사람이 어딜 나간 건지, 나가서 무슨 험한 꼴을 당하려고 혼자 나돌아다니는 건지 미칠 지경이었다. 곧 감정은 초조함으로 급변했다. 그 특유의 유려한 필치가 아닌 엉망진창인 글씨를 봐서 폴의 정신이 유아 수준을 벗어나지는 못했을 것 같았다. 랭보는 장바구니를 팽개치고 한달음에 길거리로 나섰다. 아이를 잃어버린 어머니의 기분이 이런 걸까, 하고 생각하다 그것이 자신이 할만한 생각은 아니라는 머쓱함에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주민들에게 물어보며 찾다 보니 폴이 어디로 갔는지 알 것 같았다. 강에는 무너진 채로 방치된 다리가 있는데, 폴은 종종 홀로 그곳에 앉아 있곤 했다. 그리고 역시나, 폴은 오늘도 그때처럼 끊어진 다리 끝에 오도카니 앉아 물이 흘러가는 걸 보고 있었다. 

"폴, 찾았잖아."

폴은 랭보를 본체만체했다. 다만 그는 어디 뒷골목에서 두들겨 맞은 건지 얼굴에는 코피가 번져있고 옷도 더러워져 있었다. 랭보는 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집으로 돌아가자."

폴은 그제서야 화들짝 놀라면서 랭보를 본다. 방금까지 랭보가 환상이라고 착각한 모양이다.

"랭보, 나, 아니, 우리, 같이 있으면 안 돼."

"무슨 소리야 그게. 밥 먹으러 가자."

"우리 같이 있으면 네가 불행해져."

"저녁은 뭘 먹고 싶어?"

"나는 나고, 너는 너야. 그래서 우리, 불행해져."

"오늘 시장에 갔는데 포도를 사 왔어. 폴이 좋아하잖아."

전혀 대화가 성립하지 않았다. 폴이 답답한지 가슴을 움켜쥐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랭보, 내가 미안해..."

"알아. 나 항상 알고 있었어. 우리 함께하면 불행해질 거라는거."

"내가, 내가 미안해..."

"그래서 뭐? 내가 선택한 거야."

랭보는 눈썹을 으쓱하며 폴을 보고 씨익 웃어주었다. 그리고 소매로 폴의 얼굴을 슥슥 닦아주었다.

"돌아가자. 가서 함께 멋진 시를 쓰자."

"지금 와서 글을 쓸 자신은 없어...다 잊어버렸어."

"내가 다시 가르쳐 줄게."

랭보가 손을 내민다. 폴은 부끄러운지 귀가 붉게 물든 채로 주저하면서 그 손을 잡는다. 두 사람은 끊어진 다리를 뒤로하고, 황혼 속에서 그들의 집으로 돌아간다. 두 사람은 영영 불행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만을 위한 축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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