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레터 ㅂ해진
1.
봄을 맞아 편집실에도 따스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곳에 모인 날고 긴다 하는 소설가, 시인, 평론가 등의 인간들도 모두 저마다 자신의 ‘뮤즈’를 찾아가서 봄맞이 응석꾸러기 짓을 하곤 했다. 그러나 보아라, 감히 응석을 허락하지 않는 지독한 뮤즈를 가진 김해진만큼은 편집실에 홀로 남아 격한 기침을 토하며 글줄을 적고 있었다. 그녀에게 보낼 편지의 답장에는 그답게 봄바람처럼 부드럽고 다정다감한 문장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렇게 칠인회의 모두가 개나리를 보랴, 벚꽃을 보랴, 산수유를 보랴 하고 우우 몰려 나간 후로 적막한 편집실엔 세훈과 해진만이 늦게까지 남아 있었다. 해가 서서히 떨어지고 소쩍새 우는 소리가 솟쩍솟쩍 날 때쯤에, 해진은 책상에 엎드려서 달콤한 꿈을 꾸고 있었다. 언젠가 히카루와 함께 손을 잡고 천변을 걸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꿈을, 해진은 꿈꾸면서도 그것이 가짜임을 알았다. 그래도 조금 더 머물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훈은 담요를 책상에 엎드린 해진의 어깨에 조심스레 둘러 주었다.
그 순간, 얕은 잠에서 깨어난 해진이 세훈의 손을 붙잡았다.
“히카루, 나는,”
“네?”
잠에서 덜 깬 해진이 히카루의 이름을 간절히 불렀지만, 돌아오는 것은 세훈의 당황한 목소리뿐이었다. 정신을 차린 해진은 스스로가 한심해져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다, 세훈아, 내가 잠시 꿈꾸었나 봐.”
“어떤 꿈을 꾸셨는데요?”
“으응, 뭐, 허황한 꿈이니까 네가 신경 쓸 것까진 없다.”
“그런가요…. 그런데 집에 돌아가서 주무시지 않고 계속 쓰시게요?”
“원고와 편지글이 밀리다 보니 이렇게 되네. 그나저나 다들 어디로 간 건지….”
그렇게 말하고는 하하, 하고 웃는 해진의 얼굴에 핏기가 없어 보여서 세훈은 마음이 쿡 하고 찔린 듯 아파지는 것을 느꼈다. 이럴 때 신은 어째서 그 같은 아름다운 영혼에 허약한 몸을 내려주셨나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세훈은 그의 그런 모습조차도 구도가 훌륭한 그림처럼 잘 짜맞춰진 아름다움을 품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느낌이 으레 가져다주곤 하는 꺼림칙함은 자신의 마음이 못난 탓이라고 여겼다.
“다들 오후부터 꽃구경하러 가셨는데, 돌아오진 않을 것 같아요.”
“그래? 그렇구나…. 꽃이 피는 줄도 모르고 글만 썼네.”
“해진 선생님은 꽃구경하러 가지 않으세요?”
“글쎄 말이야, 나 같은 외톨박이는 같이 갈 사람이 없으니….”
해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안경을 쓰며 고개를 돌려서 얌전한 하품을 했다. 그는 오한을 느끼는 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그는 문간에 서 있는 얼빠진 표정의 세훈을 바라보았다. 세훈은 멍하니 해진을 바라보았다.
“세훈아?”
세훈은 제가 있잖아요, 라고 말할 배짱이 없어서 한참을 우물거리고 가만히 서 있었다.
“제가, 제가…그러니까.”
“으응?”
“선생님 옆에는 제가 있잖아요. 외톨박이라고 하지 마세요.”
저지르고 보니 입 밖에 내놓기 부끄러운 말이라는 게 새삼 느껴졌다. 해진은 하하 소리내어 웃었다. 세훈도 어쩔 줄 모르고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우리 세훈이가 있는데 내 깜빡했네. 같이 밤 벚꽃 놀이라도 갈까.”
“피곤하신데 괜찮으시겠어요?”
“내 남은 생에 몇 번이나 더 볼 기회가 있겠니.”
“그런 말씀 마세요.”
세훈이 깜짝 놀라 퍼뜩 대답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한순간 얽혔다가 풀어졌다.
“그래, 미안하다. 세훈아.”
2.
세훈과 해진은 나란히 편집실을 나서서 천변을 걸었다. 이때 산에 들에 온통 꽃이 활짝 피었고, 천변을 따라 피어난 벚꽃은 한창 흐무러져 있었다. 구경하기에는 딱 좋은 화조풍월의 풍경이었다.
“꽃이 만발했구나. 이런 줄도 모르고 편집실에만 있었네.”
“요즘 바쁘셨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풍경을 놓칠 정도로 중요한 일은 세상에 없겠지?”
해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개구쟁이처럼 씨익 웃어 보였다. 세훈은 해진이 가진 의외의 일면에 다시 한번 그에게 매료되는 것을 느꼈다. 남풍이 불어오는 따뜻한 봄날의 소년에게는 치명적인 순간이었다. 어쩌면 지금이라면…. 사실을 밝혀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그러했다.
“네, 네, 선생님, 저 히카루상 말인데요,”
“잠깐, 가만있거라.”
세훈은 순간 말이 막혀서 입을 합 다물었다. 해진은 소년의 머리와 어깨를 털어내 주었다. 벚꽃의 낙화가 분분하여 머리와 어깨에 잔뜩 떨어진 것이었다.
“이제 되었다. 세훈아?”
세훈은 혼이 빠질 지경이었다. 해진 선생님은 이미 사실을 다 아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 재료는 아직 부족했다. 방금의 대화도 분명 우연이다. 그런 생각을 하느라 잠시 가만히 있으니, 해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계속 세훈을 불렀다. 세훈은 가까스로 현실로 돌아왔다.
“아, 네, 저도 털어 드릴게요.”
사실 꽃잎이 훌훌 날리고 있는 곳에서 털어봐야 소용이 없었지만, 세훈은 해진에게 붙은 꽃잎을 떼어 주었다. 두 사람이 이렇게 무용한 행동을 즐기는 동안 하늘에는 먹구름이 몰려왔다. 다시금 진실을 고백하려고 세훈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저 히카루상 말인데요,”
“응?”
그러나 갑자기 울린 우레 소리가 두 사람을 갈라놓는다. 소낙비는 세상사의 무정함을 알려주듯이 추적추적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하천에 물이 불기 시작하고, 두 사람의 겉옷이 쫄딱 젖었다. 두 사람은 세훈의 겉옷을 함께 쓰고 비를 피할 곳을 찾으려고 뛰었다. 해진의 속도에 맞추려, 뛰었다기보단 빠르게 걸은 셈이 되었다. 결국 둘은 남의 집 처마 밑에 서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안색이 안 좋으신데…”
“어어, 괜찮다.”
“괜히 선생님을 끌고 나온 건 아닌가 싶어서….”
“전혀 아니다. 세훈이 너와 함께할 수 있어서 기뻤어.”
그러고는 또 웃어 보이는데 아까와는 달리 어딘지 모르게 병색이 있는 얼굴이었다.
“그러시다면 다행이지만…. 괜찮지 않아 보이셔서요.”
확실히 해진의 온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은 정확했다. 추위를 이길 수 없는 병약한 몸은 참지 못하고 기침을 연발했다. 세훈은 조용히 자기 겉옷을 해진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해진은 그 상냥함을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우수수 쏟아지던 소낙비가 금방 그치고, 다시 흐르는 어두운 구름 사이로 이지러진 반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3.
비를 맞은 게 잘못된 것인지, 그저 그럴 때가 온 것인지, 결국 해진은 열병으로 정신을 못 차리고 앓아눕고 말았다. 왕진 온 의사는 약을 주며 “사람 목숨이 그리 쉽게 끊어지진 않습니다.” 같은 말을 했지만, 그것은 “절망적인 상태”의 다른 표현이었다. 모두가 합의해 편집실의 일을 줄여주는 배려를 받은 덕분에 세훈은 해진의 집에서 병간호해 줄 수 있었다. 안방에서 잠시 의식이 깨어난 채로 끙끙대는 해진을 두고, 세훈은 부엌에서 죽을 끓였다.
“히카루가 편지를 보내면 금방이라도 살아나실걸?”
문득 귓가에 속삭이는 소녀의 목소리가 신경 줄을 팽팽히 세웠다. 소년은 조용히 해, 하고 홀로 속삭인다. 목소리는 다시 흩어진다. 해진의 방으로 죽을 담은 그릇을 들고 가서 작은 상 위에 놓는다.
“저 해진 선생님, 힘들겠지만 죽 드세요.”
“고맙다, 세훈아.”
“그럼 빨리 나으세요.”
“그러고 보니 나 누워있는 동안 편지 온 것 없니?”
“아직요.”
“그래….”
해진은 숟가락 들 힘도 없는 듯 깨작대며 죽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래도 성의를 생각해서인지 다 먹기는 했지만, 꽤 고역스러워 보였다.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는 해진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편지, 곧 올 거예요.”
“그래…. 항상 고맙다. 히카루상, 편지, 오면 깨워 다오.”
“주무세요, 지금은.”
세훈은 방문을 닫고 나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내가 어저껜 무슨 짓을 하려 한 걸까. 막상 해진 선생님에게 사실을 들킨다고 생각하니 등허리가 서늘했다. 그보다, 자신은 어서 편집실의 방으로 돌아가서 히카루와 함께 편지를 써야 했다. 세훈은 한달음에 달려가서 편집실의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해진선생님께’
‘해진 선생님,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봄은 오기 시작하는군요. 봄까치 소리가 유난입니다. 해진선생님은 벚꽃 구경을 하셨는지요? 원고를 쓰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바람을 쐬는 것도 좋아요. 저도 병원 근처 꽃나무의 분분한 낙화를 보며 선생님을 그리워했답니다. 선생님도 꽃을 보며 제 생각을 하셨나요? 그렇다면 우리는 이어져 있다고 믿습니다. ….’
방 안에 틀어박혀 히카루와 함께 편지글을 쓸 때만큼은 세훈도 자기 자신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그는 현실과는 전혀 다른 거짓말을 청산유수로 술술 내리 엮었다. 그 안의 소년이 아닌 소녀만이 가질 수 있는 대담함으로 모든 문장이 매력을 과시했다. 마침내 완성된 편지는 우체국의 소인을 찍으러 가기만 하면 되었다. 세훈은 자신을 뛰어넘는 자신에게 감탄했다. 동시에 히카루의 편지에서 나는 자신의 내음새에 불안함을 느꼈다. 그러나 다시 고쳐 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세훈은 길가의 민들레 꽃떨기를 발길에 채가며 달려서 우체국의 소인이 찍힌 편지를 다시 집으로 가져와 해진에게 전해 주었다.
“해진 선생님, 편지 왔어요, 히카루상에게서….”
“그래?”
해진은 오래도록 너무나 굶주린 사람처럼 얼른 접첨접첨 접힌 편지를 뜯어 펴 보았다. 편지의 내용은 그녀와 봄꽃, 그리고 동봉된 소설에 관한 길지도 짧지도 않은 답신이었다. 그런데 편지와 소설이 너무나 해진의 사정을 아는 듯이 보이는 탓에 그는 눈가에 눈물을 글썽였다.
편지에 동봉된 그녀의 소설 ‘야앵풍경’의 내용은 이러했다. 가혹한 세상사에 시달리는 두 남녀가 희미한 달빛에 의존해 밤 벚꽃놀이를 하는데, 곧 심술궂은 먹구름이 소낙비를 내리기 때문에 두 사람은 비를 피하며 시간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다음날부터 비를 맞은 소녀가 앓아서 입원하게 되고, 끝내 여름이 오기 전에 남자를 홀로 두고 소녀가 죽는 결말이다. 읽을 때는 대담한 문장이 감각적인 즐거움을 주고 다시 곱씹어보면 쓸쓸하고 허무한 느낌을 주는 소설이었다. 소설은 해진 자신의 흉중을 꿰뚫듯이 그에게 있었던 일과 생각이 담겨 있었다. 한참을 빛나는 눈동자로 집중해서 소설과 편지를 번갈아 바라보다, 정신을 차리니 한참 세훈을 문간에 세워두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세훈은 오한이 들고 식은땀이 날 정도로 긴장했다. 이 모든 걸 들켜서도 안 되는데 또 그가 몰라서도 안 될 것 같은 그런 이중적인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히카루가 세훈 자신이라는 낌새를 내비칠 때마다 해진 선생님의 반응을 살피는데, 그가 아는지 모르는지는 도통 모를 일이었다. 어떤 때는 티끌만큼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보이다가도, 어느 날에는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신선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었다.
“세훈아?”
“네, 네?”
“괜찮니? 안색이 안 좋은데, 감기 옮은 건 아니겠지?”
“네, 괜찮아요.”
세훈은 자기의 불안과 기대에 짓눌려서 거의 혼이 빠질 지경이었다. 해진은 영문을 모르겠으니 설명해달라는 눈빛으로 세훈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나 세훈이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앞으로도 두 사람 사이에 설명 따위는 없어야 한다. 적어도 이때의 세훈은 그렇게 느꼈다.
과연 히카루의 말이 맞았다. 해진은 그녀의 편지를 받은 지 사흘이 지나자 회복하여 겉으로 보기에 멀끔한 모습으로 편십실에 얼굴도장을 찍었다. 세훈과 히카루는 그런 해진을 마음 깊이 사모하고 응원했다. 앞으로 다가올 일들을 모른 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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