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환생물입니다. 범폴.
1.
랭보는 어디로 보나 성실한 학생은 아니었다. 그가 이 대학에 들어온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를 진중하게 혼내거나 또는 경멸할 자격이 있는 아버지는 일찌감치 그의 세계에서 퇴장했다. 그의 어머니는 지금 이상으로 랭보가 더 엇나갈까 봐 겁에 질려 있었다. 어쨌거나 대학에 간 것만으로도 어머니는 안심하거나, 혹은 걱정하기를 포기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지루한 수업 따위에 관심이 없는 랭보는 강의를 빼먹고 거리를 어슬렁거리기 일쑤였다. 그런 나날 중 몇 번은 잘생긴 그의 얼굴에 홀랑 넘어간 여학생들의 마음을 골려주면서, 몇 번은 술에 취해 길가를 비틀거리다가 주저앉으면서 지나갔다. 멋진 학생은 공부 따위 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이 바람 같은 젊은이에게 돌연한 변덕은 당연하다. 시간이 지나고 매일 보는 거리와 골목이 모조리 시시해지자, 그의 관심은 당연히 학교로 돌아왔다. 랭보는 개강한 지 거의 한 달이 다 지났는데도 생소하게만 느껴지는 반질반질한 복도와 계단을 돌아다니며 학생들이 하는 양을 구경했다. 정시가 가까워지자, 모두가 각자의 강의실로 들어가서 착석하는 모습을 보며 그는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다시 복도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랭보는 유령처럼 발걸음 소리를 죽이고 조용해진 이 복도, 저 회랑, 또 계단들을 휘저으며 한참을 다녔다. 그러다 다다른 막다른 곳의 강의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정념 기호학에서는 무정형 연속적 상태라 할 수 있는 감각과 지각을 의미 발생 단위로 삼아 선조건 층위라 지칭하는데, 정념 기호학에서는 서사 기호학에서 분석할 수 없었던 인간의 심상을 독특한 방식으로…”
듣다 보니 점점 이끌리는 격정적 목소리였기에 그것이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서, 랭보는 문을 조금 열고 강의실로 들어갔다. 점점 듣다 보니 차차 문학과 시학에 관한 내용임을 알 수 있었다. 너무나도 젊다 못해 다른 교수들에 비해 어려 보이는 교수는, 격정적이고 폭발적으로 감격에 휩싸인 듯이 강의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강의였다. 학생들은 머리가 기민해서 교수의 그런 열정적 노력, 아니 노력을 넘어선 정신적 축복을 온 감각을 집중해 받아들이고 있었다.
“…오늘은 이제 여기까지! 모두 수고했습니다!”
랭보는 그의 마지막 말이 끝날 때까지 강의실에 들어온 채로 문 앞에 선 자신이 입을 약간 벌리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는 온통 방금의 충격적인 강의로 전율하고 그의 정신은 문학과 시, 예술로 헤집어져 있었다. 강의가 끝나자, 교수에게 질문을 하기 위해 앞으로 몰려온 학생들이 작은 무리를 이루었다. 한차례 간단한 질문들에 예의 차린 답변을 내놓는 시간이 지나가자, 학생들이 차차 강의실을 빠져나가고 랭보와 젊은 교수, 두 사람만이 남았다.
“저, 수강 등록하고 싶은데요.”
“랭보,”
“저를 아세요? 어떻게…”
“너에 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지.”
랭보는 잠시 학교에 자신이 떨친 악명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 반, 갑자기 부끄럽다는 생각 반이 지나가며 얼굴이 달아오르려 했다.
“…농담이야. 새 학기에는 학과 학생부를 외우거든. 문학부는 인원이 적으니까.”
금방의 강의로 인해 약간 상기된 얼굴로 떨며 개구쟁이처럼 웃는 교수의 모습을 보고 랭보도 그만 어질어질해져서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저,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폴-마리 베를렌, 베를렌 교수님이라고 부르렴.”
2.
그날 이후로 랭보는 종종 베를렌 교수의 집에 초대받았고 둘은 그의 방에서 문학에 관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베를렌 교수는 랭보에 대한 것이라면 사소한 취향에서부터, 무심코 나오는 버릇, 말의 호흡까지도 많은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이 행동했다. 예를 들자면 예술적 취향이나, 다소 버릇없는 말본새, 재빠르고 유연하고 우아한 동작 모두 랭보를 이루는 특이하고 매력적인 요소들이었다. 그런 것들을 베를렌 교수는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특유의 아련한 미소를 보이며 그냥 지나갔다. 랭보는 이 매력적인 영혼을 가진 교수에게 어쩐지 완패한 듯한, 분하다는 감정이 일었다. 동시에 이 경험의 격차를 메우기 위해 학교 도서관을 찾아가 그의 작품을 빠짐없이 읽었다.
랭보가 보기에 그의 초기 시 정신, 시작은 굉장히 훌륭했다. 그러나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최근의 어느 시점부터는 그 시 정신이 활동하기를 중지한 것 같이 보였고, 아예 요사이에는 작품활동이 없었다. 그의 동태를 살피면 다른 작품을 쓰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랭보는 그에게 직접 물어보기 전에 그의 아내에게 슬쩍 물어보았지만, 그의 아내는 늘 보이는 그 차가운 태도로 그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말할 뿐이었다.
“베를렌 교수님은 왜 더는 시를 쓰지 않으시는 건가요?”
갑자기 찌르고 들어온 질문에 그는 약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은 한참을 침묵했다. 적막을 가르고 랭보가 재차 질문했다.
“…마지막으로 시를 쓴 지 얼마나 지났어요?”
“모르겠다. 예전엔 쓸 수 있었지만…. 정신에 일어난 어떤 일 이후로는 쓸 수 없게 되었어.”
그렇게 말하면서 간절히 자신을 바라보는 교수의 모습을 보자, 랭보는 다른 어떤 말도 필요 없다는 것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하얀 달/ 빛나는 숲속/ 우거진 잎사귀 사이로/ 흐르는 말소리”
“너 그 시, 외우고 있어?”
그렇게 말하는 베를렌 교수의 얼굴이 너무나 기쁘고 벅차 보여서, 마치 이 순간 그 말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이 기쁨에는 단순히 제자가 자신의 시를 외운다는 것 외에도 다른 종류의 기쁨이 섞여 들어가 있었지만, 이때의 랭보는 그걸 알 수 없었다.
“거울처럼 깊은 연못 속/ 버드나무 그림자 사이로/ 부는 바람”
“들려줄래요? 당신 목소리로.”
베를렌 교수는 감격하다 못해 눈물이 맺힌 얼굴로 시의 나머지 부분을 낭송했다.
“사랑스런 사람이여/ 지금은 꿈을 꿔야할/ 아름답고 찬란한 순간….”
랭보는 교수가 왜 이렇게까지 자신의 시를 외워주는 것에 감동하는지 알지 못했으므로 잠시 어리둥절한 기분이 되었지만, 곧이어 자신이 드디어 그와의 감정적 우위에 서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순수하게 기뻐했다.
“별들이 달빛에 젖어/ 드넓고 따뜻한 고요가 창공을 뒤덮는/ 아름답고 찬란한 순간….”
그 후로 랭보는 교수의 집에 자주 드나들며 모두의 눈도장을 찍었고, 베를렌 교수가 시를 짜내는 것을 도와주는 도우미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와 시를 주고받으며 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랭보는 이 비상한 영혼의 소유자에게 언젠가 새 시집을 낼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에 행복해했다. 앞으로 다가올 시련을 모른 채로.
3.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베를렌은 랭보가 일정 이상 가까워지려고 하면 랭보를 차갑게 대하거나, 그의 시작을 비판하거나 하면서 밀어내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마음에 문학이라는 황홀함을 심어준 그가 갑자기 마음속으로부터 자신을 지워내는 것이다. 대체 그가 왜 그러는 건지는 도통 알 수가 없어서 랭보의 영혼은 고통받았다. 어쨌거나 교수와 본격적으로 싸울 수도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랭보의 공격을 견디기에 그는 너무 허약해 보였기 때문에 랭보는 반격의 기회조차도 가지지 못했다. 게다가 더 이상한 것은 교수는 수업이 없으면 가끔 연락도 없이 며칠씩 사라지는 여행길을 떠났다. 그럴 때는 그의 아내조차도 그가 어디로 갔는지, 언제 돌아오는지 제대로 잘 알지 못했다.
그런 기묘함에도 두 사람의 매일매일은 착실히 문학과 시로 채워지고 있었고, 초여름 하루는 마침내 베를렌의 새 시집이 출간된 날이었다. 와인잔을 들고서 두 사람은 새 시집의 출간을 기념했다. 와인병이 하나둘 쌓이고 슬슬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때였다.
“베를렌 교수님, 정말이지 출간 축하드립니다.”
“음, 나를 폴이라고 편하게 불러도 좋아.”
“네? 그건….”
그렇지 않아도 학생과 교수 치고는 적은 나이 차와 베를렌의 젊음과 관용 때문에 예의범절과는 먼 대화가 지속되는 중이었는데, 이름을 편히 부르기 시작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다른 학생들이 보기에도 이상하게 보일 것을 대뜸 걱정한 랭보가 망설이자, 베를렌은 차차 제정신이 돌아왔다. 베를렌은 불안하게 미소지었다.
“아차차, 방금은 실언이었어. 우리가 그럴 수는 없는 거겠지…. 학생과 선생 사이에는….”
“아뇨, 아뇨, 폴이라고 부를게요.”
“그건 부적절하다니까!”
“네?”
“아! 우린 서로 거리를 두는 게 맞아! 거리, 거리 말이야…!”
베를렌의 급작스러운 철회는 랭보의 마음을 다치게 하기 충분했다. 대체 이 변덕쟁이 교수님이 작은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미 예의범절과 작별한 발칙한 대화를 부지런하게도 나눴는데, 지금 와서 결코 폴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도 이상했다. 베를렌의 작은 방 속에 든 두 사람의 감정이 한 단계 고양되었다.
“교수님, 대체 왜 그러세요? 왜 당신을 추종하는 저에게 이리도 못살게 구세요?”
“뭐가? 난 잘 모르겠다.”
“우리가 가까워질세라 저를 괴롭게 하시잖아요. 매번!”
“너를 괴롭힌다고? 내가?”
“왜 저를 비웃고 경멸하는 거예요? 우리가 가까워지는 게 겁나요?”
“뭐라고…. 난, 난 더는 못 견뎌!”
베를렌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자, 랭보가 그의 마른 손목을 잡아챘다.
“말없이 떠나는 것도 이젠 질렸어요! 항상 어디로 가는 거예요?”
“네가 알 필요 없잖아…. 내가 어디로 가든 네 알 바가 아니라고…”
베를렌이 익숙한 비애를 짓씹듯이 말했다.
“뭐가 아니야!”
순간 랭보의 외침의 기세에 눌린 베를렌이 입을 다물었다. 한 호흡이 지나고 베를렌이 다시 입을 열었다.
“랭보, 미안해, 우리 지금 정상 아니야. 내게 조금만 시간을 줘….”
그렇게 흐느끼며 말하는 베를렌의 내리깐 눈동자가 너무나도 고통으로 가득 차 괴로워 보였기 때문에 랭보는 꽉 쥔 그의 손목을 놔 줄 수밖에 없었다.
4.
그렇게 여름 방학이 된 지 약 한 달 반이 지났다. 둘의 다툼 후 베를렌이 말없이 여행을 떠나간지 꼭 이레 만이었다. 랭보는 베를렌네의 현관에 서서 그의 아내에게 베를렌에 대해 물어보았다.
“베를렌 씨가 항상 어디로 떠나는지 정말 모르세요?”
“관심 가지지 마세요, 그는 당신 같은 학생이 관심 가지기엔… 부적절해요.”
그의 아내의 힘없는 옆모습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랭보는 몰랐다. 부적절하다니? 그녀가 당최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말만 하는 통에 그는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그의 사적인 삶 속으로 망설임 없이 걸어 들어가기도 망설여졌다. 거기에는 무언가 랭보 자신을 파멸시킬 만한 진실이 숨어 있을 것만 같아서 다가가기가 막연히 겁났다. 그 자신도 이 운명이 쏠리는 듯한 느낌에 대해서 언어화시킬 수 없었다.
다음 날 저녁 랭보가 참을성 없이 재차 방문했을 때, 베를렌은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손등에 깊이 찔린 상처를 달고서 돌아온 그는 자기 방의 소파에 반쯤 누워서 졸고 있었다.
“베를렌 교수님, 돌아오셨어요?”
랭보는 문을 닫고 방에 들어오며 애써 미소 지어 보였다. 그러나 그의 입가가 불안으로 떨리는 것을 그가 알고, 그가 안다는 것을 그도 알고, 그렇게 영원하다.
“아, 랭보…….”
“어디 다녀오셨어요? 교수님,”
“불을 꺼줘. 부탁이야.”
랭보는 의아해하면서 순순히 그 말을 따라주었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 눈이 적응하자 밖에서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가로등의 불빛이 방안을 희미하게 밝혀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상대방의 표정 같은 세세한 것을 볼 수 없었다.
“먼저 너에게 때때로 무정해지고 불안하게 너를 밀어낸 것, 사과할게.”
“알고는 있으셨군요.”
“나는….아…….”
그 뒤로 이어진 베를렌의 고백은 이러했다. 그의 동성애자로서의 이중생활 때문에 그는 주기적으로 학교가 있는 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다른 먼 도시의 사창가에서 손이 거친 선원이나 머리가 짧은 군인들과 뒹구는 것만이 그의 욕구를 정기적으로 해소해 줄 수 있었다. 그는 이런 사실을 다른 교수들에게 들켜서 지독한 고초를 겪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그래도 욕망은 영원히 흐르고 완전히 충족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리고…. 내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랭보의 마음을 그토록 매몰차게 괴롭히던 그는 별안간 발가벗은 채로 난도질을 각오하며 그의 앞에 놓여졌다. 그 사실을 의식하자 심장이 파르르 떨려왔다. 그런데 그 순간 또 다른 기억의 파편들이 정신의 파도를 타고 밀려왔다. 랭보의 머릿속에 수많은 기억들이 밀려와 머리가 띵 하고 울렸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 손등에서 작열하는 고통이 느껴졌다.
“폴…?”
“나는…널…. 사랑한다고….”
“폴! 나 지금…!”
“…방금 고백은 잊어줘. 자, 이제 우리는 여기서 끝나는 거야.”
“……열매, 꽃, 잎사귀, 가지들이 여기 있소.”
랭보의 떨리는 목소리로 낭송된 이 시는 한 번도 폴의 현생에 발표된 적 없는 시였다. 결단코 전생에서 이 시만큼은 가져오지 않고 그의 마음속에만 간직해 두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랭보는 아무도 몰라야만 하는 그 시의 낭송을 이어갔다.
“…그리고 당신 때문에/ 뛰는 내 가슴이 여기에 있소.”
“랭보 너…”
“폴.”
반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늦여름의 시원한 바람이 스친 폴의 심장이 툭 하고 차갑게 전율하며 떨어짐을 감각했다.
5.
전생의 기억이 돌아온 두 사람의 사랑은 가을을 내달렸다. 뭐든 함께했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도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의 흥미로운 소문은 학교 담장을 타고 넘어 다녔다. 그러나 둘 다 그런 것쯤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랭보와 폴은 둘만의 집에서 식사도 잠자리도 함께했다. 한마디로, 매일매일 행복하게 보냈다. 폴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죽은 자식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랭보를 간절하게 사랑했다. 질투 많은 신이 그들을 행복하게 두지 않고서 꼭 나쁜 운명이 찾아오게 된 것은 그래서였을까? 겨울 초입에 두 사람이 손을 잡고 거리를 걷고 있을 때 일은 벌어졌다. 아니, 숨겨왔던 사실이 개봉된 것이라고 할까?
랭보가 갑자기 손을 놓치더니 길바닥을 구르며 다리를 붙잡고 넘어진 것이었다. 폴은 랭보가 또 자신을 놀려줄 장난을 시작했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병원에 갔을 때 이미 랭보의 한쪽 다리는 지독한 고통 속에 생명을 잃어가는 상태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의사의 말로는, 랭보에게는 차차 몸이 마비되어 종말을 맞이하는 병증이 있다고 했다. 원인 불명의 병이고 마땅한 치료법이 없어서 대증 요법으로 진통제만을 처방해 줄 수 있다고 전하는 의사의 말에 폴은 막연히 정신이 멍해졌다. 젊은이가 딱하게 되었다는 간호사들의 말이 귓가를 윙윙 울렸다.
병실로 돌아와 어떻게 말을 전해줘야 할지 망설이는 폴의 얼굴을 살피던 랭보가 살포시 웃었다. 폴도 침대에 앉은 랭보를 마주 보고 애써 헤헤, 웃으면서 괜히 꽃병의 꽃을 만지작거렸다.
“랭보, 너, 너 한동안 입원해야 할 것 같대, 겨울 방학 여행은 다음에 가자.”
“난 괜찮아. 폴 당신은?”
“나야 늘 괜찮지, 정말 영원히 괜찮지, 앞으로 매일 올게.”
“매일? 강의는 어쩌고?”
“병원비는 걱정하지 마, 이런 걸 해결하려고 내가 있는 거니까.”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속삭이는 폴은 거의 비굴할 정도로 침대 가에 무릎을 꿇고 앉았고 랭보는 그 태도에서 뭔가를 읽어내기에 충분한 눈치를 가졌다. 그러니까 내게 남겨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거군, 하고 쉽게 납득했다. 그러자 가슴이 서늘해졌다.
“아니. 매일 오지는 마. 당신 강의 해야지, 내가 없어도 살아가야지.”
“그게 무슨 소리야 랭보. 네가 없다니, 그럴 리가….”
없잖아, 라는 말은 갑자기 콱 막힌 목에서 흘러나오지 않았다.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눈물이 핑 돌았다.
“폴.”
“흑, 랭보, 어떡하지, 나….”
아, 이 ‘망할 여편네’가 또 우는군…. 그렇게 장난스럽게 생각한 랭보는 침대 가에 무릎꿇고 앉은 폴을 손을 뻗어 도담도담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그가 떨며 숨죽여 우는 소리가 제법 사랑스러웠다.
랭보는 겨우내 입원해 있었다. 물론 나아질 기미는커녕 걷지 못하게 되어서 나가려면 휠체어를 쓰거나 누군가 업거나 안아 들고 나가야 했다. 이제 겨울 방학이라 폴은 매일 찾아왔다. 폴은 매일 랭보의 다리를 주물러주면서 조곤조곤 요즘 일상은 어떤지, 학교에선 무슨 일이 있는지를 말해주었다. 그러면 랭보는 그걸 듣고 작게 맞장구를 치거나 조금 웃곤 했는데, 그의 병이 점점 진행되면서 그럴 힘이 없어져서 격한 토론을 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폴, 시를 그만두지 마, 우리 함께 멋진 시를 쓰자.”
“응, 그런데, 랭보, 지금은 쉬어도 괜찮아.”
“오로지 당신만을 향해/ 꿈을 꾸는 이 마음을/ 사랑스런 그대 손길로/ 따스하게 감싸주오.”
“…오로지 당신만을 향해/ 고동치는 이 마음을/ 아름다운 그대 두 눈에/ 부드럽게 담아주오.”
폴의 답가에 랭보는 만족스럽게 눈을 감고 숨을 내쉰 뒤 침묵에 잠겼다. 그 모습에 폴은 불안한 듯 손톱을 깨물면서 병실 침대 가를 서성인다.
6.
랭보가 병을 앓는 동안 겨울 방학이 다 지나가고 있었다. 그의 병세는 더욱 위중해져서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폴은 위태로움을 느꼈다. 랭보는 극심한 고통에도 결코 신음 소리 한마디마저 내는 법이 없었다. 진통제를 맞을 때는 조금 호전된 듯 보이지만, 그 외의 시간에는 고통을 견디느라 랭보가 애써 여유로운 척을 하고 있다는 것이 뻔히 드러나 보인다는 것을 그도 알았고 그가 안다는 것을 그도 알고 그렇게 영원했다. 그리고, 그런 불안한 두 사람에게도 공평하게 크리스마스이브 밤은 찾아왔다.
“폴~”
“왜 그래?”
“나 밖에 나가고 싶어. 모처럼-”
요주의 환자로 주목받는 그에게는 의사의 엄중한 외출 금지령이 있었다. 이제 랭보는 어딘가 나갈 몸 상태도 아니거니와, 감기라도 걸려 온다면 그땐 정말 치명적일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안된다는 말이 폴의 목구멍을 맴돌았다.
“크리스마스이브인데, 아,”
그런 말을 하는 동안 창밖으로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병원의 정원에도 눈발이 제법 날려 퍽 아름다워 보였다. 그는 랭보를 말릴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의 소원을 들어줄 기회도 이제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의사 선생님께는 비밀로 하고 살짝 나가자. 업혀.”
“정말이야?”
“그럼.”
랭보는 수척해진 폴이 자신을 업는 것이 부담될까 봐 잠시 망설였지만, 그 자신도 이미 건강했을 때의 무게감은 잃은 지 오래였다. 폴의 등에 업혀 랭보는 병원을 벗어나서 번화가로 가는 길을 신선하게 바라 봤다.
“폴, 고마워, 나 실은 정말 이 거리가 그리웠거든.”
“고맙긴, 다음에도 또 몰래 나오자.”
“…그래도 될까?”
“응.”
폴의 등에 업혀서 감상한 거리의 무수한 반짝임, 사람들의 훈훈한 미소, 연인들의 들뜬 웃음소리, 흥겨운 캐럴은 무척 아름다웠다. 그러나 점점 희미해져 가는 의식에는 시상이 맺히지 않았다. 마침내 랭보는 그 앞에 엄연한 실재로서 현현한 끝을 직감했다.
“고마워, 폴”
“일일이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랭보.”
“…랭보?”
조잘조잘 떠들던 말소리가 뚝 끊겼다. 축 늘어진 랭보의 신체가 등 뒤에 무게를 더한다.
“랭보, 랭보, 일어나, 병원으로 돌아가자.”
아무리 불러도 등 뒤에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세찬 절망감의 엄습을 느끼면서 몸서리치는 폴이 반짝반짝 빛나는 거리 속을 걸어갔다. 그는 갑자기 유리 벽에 감금된 듯한 지옥 같은 적막 속에서 문득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우주가 암전했다. 그날 이후로 창가에 다가서도 별이 보이지 않았다.
7.
이윽고 다시 봄이 찾아오고 새 학기가 시작되었지만, 폴은 강의를 하지 않았다. 안식년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고 실제로 폴은 강의를 할 능력 자체를 상실했다. 사실 그에게는 더 이상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도 불분명했다. 그저 멍하니 안뜰에 앉아 하늘을 쳐다보거나, 추억이 담긴 두 사람의 시집을 뒤적거리거나, 목적 없이 홀로 유령처럼 거리를 걷거나 했다.
그는 밥도 먹지 않았고 잠도 자지 않았는데, 술만 마시고도 계속 살 수가 있을 것만 같았다. 몸에 한계가 와서 쓰러지면 그때야 허발하듯이 집안에 쌓인 아무 통조림을 욱여넣다가 헛구역질하기 일쑤였다. 랭보가 있을 때는 그를 신경 써 요리해서 영양소를 고려한 식사라는 것을 했는데, 이제는 그것도 전생 같았다. 더 이상 식탁에서 기다리는 랭보가 없으니 요리할 의미도 없다.
재채기할 랭보가 없으니 청소할 의미도 상실해서 두 사람이 살던 집안은 온통 먼지투성이였다. 그런 상태로 망령들린 시체처럼 움직이다가 몸이 한계에 다다르면 집이든 길이 든 아무 곳에서나 쓰러져서 짐승처럼 잤다. 행려병자와 같이 길바닥에 쓰러져 있으면 누군가는 그의 주머니를 털고 누군가는 그의 몸을 희롱했지만, 신경 쓰이지 않았다. 같이 잘 랭보가 없는 마당에 그 모든 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랭보는 돌아오지 않는다. 영원히. 그는 또 한 번 랭보를 잃었다.
어느 늦봄 아주 따스한 날이었다. 멍하니 골목길을 걷던 폴은 연한 아지랑이가 피는 골목 바깥을 바라본다. 거기에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랭보가 있었다. 머뭇대며 다가가자, 랭보도 폴을 눈치챘는지 고개를 돌려 방긋 미소 지었다.
“랭……”
그러나 이것은 환상이었다.
곧 거기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약간 열린 입을 다물었다. 폴의 가슴 깊은 곳이 비수로 찌르고 후벼 파는 듯이 아프기 시작했다. 온몸의 뼈마디가 욱신거리는 통증이 그를 뒤덮었다. 폴은 빈 술병을 쥐고 비틀거리면서 집으로 돌아와서 차가운 현관 바닥에 드러누웠다. 랭보는 돌아오지 않는다. 영원히. 그는 또 한 번 랭보를 잃었다.
창밖에서 장난스러운 랭보의 목소리가 들린다. 랭보가 낭송하는 것은 그치고는 저급한 내용으로 구성된 알렉상드랭으로 구성된 사랑 시였다. 잘 맞춰진 12음절의 운율이 안뜰에 낭랑하게 울려 퍼진다. 랭보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릴수록 폴은 먼지투성이 현관 바닥에 더욱 웅크리고 귀를 막았다.
“랭보는 오래전에 죽었어, 랭보는 오래전에 죽었어….”
8.
폴이 유일하게 친했던 다른 교수에게 붙잡혀서 끌려간 평일 오전의 신경정신과 의원은 한산했다. 의사는 몸을 덜덜 떨고 있는 그의 길고 긴 이야기를 들어줄 만큼 인내심이 크고 시간이 많았다. 환자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의사가 진료기록을 작성하다 말고 손을 멈춘 채로 경청했다. 긴 진단 후에 나온 약은 하루 13개의 알약이었다. 폴은 한동안은 그 약 모두를 꼬박꼬박 매일 빠짐없이 먹었다. 그러자 더 이상 랭보가 꿈에서조차 나오지 않았다.
뜻밖의 문제가 있었다. 약을 먹자 점점 정신이 멍해지면서 소중했던 추억들마저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세상에 남겨진 랭보의 조각들을 이렇게 잃을 순 없다고 생각했다. 세상에서 사라져서는 안 될 타고난 시인의 자취들을, 자신 안에서 이렇게 없어지게 만들 순 없었다. 폴은 약을 먹기를 중단했다. 그리고 이상적인 랭보를 간절히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의자에 쿠션을 두고 대화하기 시작했다. 랭보가 간절히 필요할 때마다 이상적인 존재가 된 랭보와 상상 속에서 계속해서 대화했다. 문학과 시, 예술에 대해 논하는 작아진 랭보는 꽤 매력적이었다. 폴은 이 상상 놀이에 금방 매료되었고 빠져들었다. 술을 진탕 마시고 난 다음이면 환상은 더욱 선명해져서, 급기야 제 간절함으로 인해 랭보의 영혼이 쿠션에 깃든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이런 짓을 하느라 폴의 건강은 착실히 나빠지고 있었지만, 그의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불타오르며 고양되고 있었다.
폴은 쿠션과 함께 안뜰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변의 동네 사람들은 어린 연인이 죽어버린 뒤로 돌아버린 폴 마리 베를렌 교수의 소문을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다행인지, 폴은 아무것도 신경 쓸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수군거림을 알지 못했다. 환상을 유지할 수 있는 정신상태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폴, 이건 내가 아니야.”
어느날 이상적인 랭보가 말했다.
“폴, 이게 내가 바란 일인 것 같아?”
또 이상적인 랭보가 말했다.
“폴, 여기서 더 불행해지지 마.”
또한 이상적인 랭보는 말했다.
“폴, 너무 무리하지 마!”
9.
그러나 환상은 정말 교묘해서 이상적인 랭보는 이제 폴의 말에 점점 잘 반박하지 않게 되었다. 환상에 환상이 덮어지고 겹쳐지면서 그 되먹임에 퇴화가 일어난 것이다. 원래 인간의 기억력과 상상력 사이에는 경계가 없으며, 세월의 더께를 쓴 기억이란 꿈과 뒤섞이는 법이다.
이상적인 랭보와 시를 쓰고 그러는 동안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 폴은 교수도 그만두고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아서 결국 집을 처분하게 되었다. 집에 있는 몇 가지 없는 살림살이들에 압류 딱지가 붙었다. 압류딱지가 집안 곳곳에 붙는 동안 폴은 랭보의 향기가, 내뱉은 숨결이 담긴 낡은 쿠션만을 꼬옥 끌어안고 있었다. 이상적인 랭보는 그의 품에 소중히 안겨 있다.
“랭보,”
“폴.”
그러나 그는 대화 중 돌이킬 수 없이 변질된 망상 속에 이제 살아있던, 온전히 존재했던 랭보는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죽은 사람은 어떤 말에든 반박할 수 없다. 폴은 마지막 남은 짐 가방에 든 베로날 한 통을 모조리 목구멍으로 털어 넣으면, 이제 드디어 그의 이상적인 랭보와 같이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돌아가고, 안뜰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고요 속에 확신한 폴은 음독자살을 곧장 실행으로 옮겼다.
잠시 후 서서히 의식이 흐려지는 폴을 마지막으로 다정하게 안아준 이상적인 랭보가 폴의 이마에 가만히 입맞춤해 주었다. 그의 시체가 발견되었을 때 어느 누구도 그가 왜 낡은 쿠션을 그토록 애지중지 끌어안고 죽은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Every time I see your face
There's a cloud hangin' over you
In such a beautiful way
There's a poetry to your solitu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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