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폭력, 자살 요소 주의

 

0.🍊

희극파: (비극파를 밀쳐내며) 건전한 웃음을!

비극파: 교양 없는 놈들! (서정파들이 잎이 붙어있는 나뭇가지를 들고 들어와 무대 중앙에 자리 잡는다. 아무도 제지하지 않는다.)

서정파: 서정적인 작품을 주시오. 로맨틱하고도, 감성적인….

희극파: 사디스트! 위선자! 그만 해라!

비극파: 시끄러운 놈들! 우린 비극을 원해!

우둔한 사람들: 빨리, 빨리! 광대극을 공연합시다! 음담패설이 난무하는 화려한 공연을! (비극파를 공격한다) 귀신들은 뭐하나 저 위선자들 안 잡아가고! 구닥다리들은 물러가라! 복잡한 건 싫어! 웃기기만 하면 돼! 광대극을 공연합시다!

서정파: …장미와 달빛, 강렬한 키스! 연인들의 부드러운 탄식! 꿈, 시적인 공상!

비극파: …모호하고, 형이상학적인! (우둔한 사람들을 공격한다) 게으름뱅이! 퇴폐 저질놈들! 골 빈 놈들! 나가! 기생충! 기생충! 기생충! 비극을! 비극을!

희극파: (자신들을 방어하며) 즐겁고, 재미있는 공연을 합시다! 열정! 재치! 그리고, 복잡한 줄거리! 코미디를 합시다! 코미디!

(무대 뒤에서 10명의 가면을 쓴 이상한 사람들이 대형 숟가락을 들고 들어와 무리들을 분리시킨다.)

기인들: 이봐, 조용히 해!

비극파: 비극을!

우둔한 사람들: 광대극을!

기인들: 무대에서 나가!

희극파: 코미디를!

기인들: 꺼져!

서정파: 사랑!

기인들:

극장에서 나가!

(무대밖으로 다른 사람들을 밀어내며)

(청중들에게 말을 한다.)

아주 좋은 극장이군!

여러분들에게 보여드리겠소!

이보다 더 훌륭한 연극은 볼 수 없을 거요!

이제 연극을 시작하겠소! 세 개의 오렌지의 사랑! 세 개의 오렌지의 사랑!

(무대 장치를 한다)

윽, 조용! 조용!

앉아 주세요, 잡담은 그만! 서둘러 커튼을 올려! 자 쇼를 즐기세요!

(전령이 베이스 트럼본을 부는 나팔수와 함께 들어온다.)

전령:

왕께서는 왕의 상속자이자, 아들인 친애하는 왕자님이 우울증에 빠져 있어서 크게 상심하고 계십니다.

기인들:

쇼를 즐기세요! 쇼를 즐기세요!

쇼를 즐기세요! 쇼를 즐기세요!

(커튼이 올라간다)

-프로코피예프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프롤로그 중-

1.🍎

이 시기 요코하마는 오랜 정치·경제적 혼란, 최근 난민과 미등록 이주민의 대량 이주, 그에 따른 선주민과 이주민과의 문화적 갈등, 더 높아지기도 힘든 범죄율과 실종자 수, 이능력자 단체들 간의 알력 다툼으로 그야말로 갈때까지 간 인생들의 난장판 도시라고 부르면 좋을 형국이었다. 지금 도시는 마침내 더 떨어질 곳도 없는 밑바닥에 안착한 안도감을 느끼는 사람들 한무리와, 무엇이든 혼란을 틈타 한탕 해보겠다는 기세로 등등한 사람들 한 무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런 사회적 역사적 맥락 아래에서는 무슨 짓을 벌이던 부끄럽지 않았고 또한 무슨 일이 일어나도 크게 놀랍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에는 그들 모두에게 사과의 축복이 가득했다.

2. 🔥

요코하마 시내를 흐르는 강가를 가로지르는 기찻길 아래 어딘가에는 작은 컨테이너 박스가 있었다. 아무런 특색도 없는 작은 방에는 간이침대와 귀퉁이가 부서진 책상, 그리고 쓰레기통 정도만이 있다. 거대 범죄조직인 요코하마 포트마피아의 말단의 하청의 아웃소싱격인 조직원들이 이용하는 쉼터 중 하나였다. 지금 이 임시거처 앞에서는 나름 말단 중 뼈가 굵은 붉은 머리의 조직원이 썩은 사과를 깎아서 불태우고 있다. 옆에서도 사과가 채워진 트럭에서 말단의 하청의…줄여서 거지만은 면한 사람들이 비슷한 작업을 반복하고 있었다. 또 누군가는 사과를 태운 잿가루를 강에 버리고 있었다. 썩은 사과를 깎는 붉은 머리의 말단 조직원도 때때로 재가 쌓이면 그걸 삽으로 퍼다 강에 버리기도 한다. 오다 사쿠노스케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코에 묻은 검댕을 닦는데 최근 한계를 느끼고 마침내 포기했다. 그들 모두는 썩은 사과를 태우는 일을 반복하다가 주홍빛으로 물든 강물을 따라 흘러가는 재가 차차 쌓여서 한계가 느껴질 때쯤, 저렴한 저녁을 먹으러 가곤 했다. 점심에는 주로 썩은 사과의 멀쩡한 부분이 그들의 주린 배를 채워줬다.

이들의 일과가 이렇게 된 데에는 나름의 설명이 필요한 듯 하다. 이들은 왜 태산같이 무덕무덕 쌓인 썩은 사과를 태워서 버리고 있는가? 그냥 버리면 강물에 둥둥 뜨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도 답이 될 수 있겠지만,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최근 유행하기 시작한 사과병 때문이었다. 요코하마에선 콩 심은 데서 팥이 나오는 게 맞는다는 말이 있을 만큼 갈때까지 간 인생들이 모여 사는 혼돈의 도시이기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는 않다. 도시에는 주기적으로 오는 역병처럼 특정한 과일과 사랑에 빠지는 저주에 걸리는 이능력이 유행했다. 이번에는 사과병인 모양이었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견디거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친밀한 접촉으로 낫게 된다는 백설 공주 이야기 같은 이능력이었다. 누가 죽지도 않고 병에 고통도 없으니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는 모양인지, 범인인 이능력자를 방역으로 찾기가 지극히 어려워서인지, 이 사태로 이득을 보려고들 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누구도 근본적 해결에는 관심이 없었다. 병에 걸린 인간들이 사랑의 사과를 찾아 거리를 헤매도, 최근엔 건강과 미용에 좋은 사과가 유행한다는 보도를 내보내면 이능력에 대한 입막음은 충분하다고 느낀 정부 측 판단 때문이기도 했다. 별수 없이 여기에 온 이 마도 요코하마의 공무원들은 대체로 스위스 은행에 송금할때만 적극적으로 일했다. 친밀한 접촉 따윈 기대할 수 없는 밑바닥 인생들도 7일만 지나면 사과를 갈망하는데 미쳤던 자신의 기억을 잊고 정상인으로 돌아오지만, 그동안은 요동치는 사과 가치의 조작으로 이득을 보는 시스템이 요코하마를 관통해 굴러가고 있었다. 그런 대유행의 때에 사과 장사를 통해 한몫 잡으려는 세력에는 물론 포트마피아도 끼어 있었기 때문에, 사과 가치의 유지를 위해서 말단들이 썩은 사과 무더기를 대량 폐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저녁 붉은 머리의 말단조직원 오다 사쿠노스케는 반쯤 먹던 썩은 사과를 드럼통 속에 던져넣고 가연성 기름을 사과 무더기에 들이부었다.

3.👑

한편 이 포트마피아의 보스와 주요 간부 두 명의 모임이 포트마피아 빌딩 최상층에서 진행되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허름한 동네병원 의사 아저씨 같은 인물과 요정 같은 드레스를 입은 미소녀가 제멋대로인 왈츠를 추는 칙칙한 방에서 수염도 안 난 소년 두 명이 말다툼을 할 뿐인 모임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장난스럽긴 해도, 꽤 멋지게 광택이 흐르는 고급 수트를 차려입은 모리선생의 모습은 중년에 걸맞은 아름다움이 있었다. 소년 두 명은….

“결국 마피아 내부 사과병이 문제면 네가 바퀴벌레처럼 부지런히 사사삭 돌아다니면 되는 거 아니냐?”

“츄야는 바보라서 그런 생각이 가능한 거라고.”

“어이 내가 틀린 말 했냐?”

“절대로 틀렸지. 넌 항상 틀려.”

“이 자식이 진짜….”

“그 스텝이 아니야! 린타로는 몸치!”

“방금은 앨리스쨩이 밟은 건데…너무해~”

“이제 츄야 오빠랑 춤 출 거야, 우리 잠시 시간을 가지자!”

“그런 대사는 어디서 배운 거니….”

앨리스는 푸른 코사지가 가득 박힌 하늘색 프릴 원피스와 청록색 보석이 박힌 미니 티아라를 뽐내면서 빙글빙글 돌았다. 스텝을 밟으면서 나카하라가 있는 곳까지 은사 스타킹을 신은 발로 사뿐사뿐 걸어갔다.

“오빠, 셸 위 댄스?”

“어어? 아, 그 그래.”

이때의 나카하라는 아직 앨리스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해 하고 있었다. 아 이건 보스인가, 보스의 장기 같은 일부분인가, 보스의 연인인가. 그러니 자연스럽지 못하고 가끔 긴장하며 떨떠름한 태도를 취하곤 했다. 나카하라가 손을 잡고 앨리스의 시중을 드는 동안 모리가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효율 좋게 내부 사과병 극복의 장을 만드는 타협점을 찾았거든~”

“모리씨가?”

“마침 대충 가까우니 네 생일 파티를 하려고 해. 간부들과 준 간부급들 소집시키면서~ 모여서 한 번씩 너와 악수하는 기회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데,”

“절대 싫어. 그보다 생일이라니 뭐야. 그런 건 어떻게 알아.”

“내가 너를 주운 날. 그때가 지금의 네가 태어난 날이지, 아닌가?”

“기일이었으면 좋았을걸……”

붕대를 감은 소년이 반항기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는 가운데, 모리는 여유롭게 보스 자리에 앉아서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사과를 다 깎아 갈 때쯤 생각을 정리한 다자이는 입을 우물거리다가 대답했다.

“알겠어. 대신 짧게.”

“짧고 산뜻하게 배신자의 처형식도 행사에 넣을까 하는데.”

“하…이젠 좋을 대로 해….”

“그럼 네가 하는 거로 하자. 생일 선물로 널 주역으로 만들어주고 싶거든.”

붕대에 가려지지 않은 눈속에 벌써부터 피곤하고 짜증을 느끼는 기색이 역력했다. 소년의 도자기처럼 부드럽고 창백한 혈색이 퍼진 한쪽 뺨이 움찔거리고 있었다. 최근엔 그 무엇도 예전만큼 활력을 가져다주지 못해 범죄 활동에도 신물이 날 뿐이었다. 이때까지 죽인 사람들도 좋은 기억력에 새겨져 매일 밤 원혼처럼 들러붙어 왔다. 이제 와서 자극은 전혀 상쾌하지 않아지고 있었다. 어떤 고급 와인이든 계속해서 마시면 언젠가 질리기 마련이다. 교복처럼 보이는 수트 위로 뼈가 도드라지게 드러나는 소년의 몸이 선 채로 조금 흔들렸다. 돌아본 뒤에서는 왈츠의 스텝을 맹연습하는 아름다운 금발 소녀와 모자를 쓴 소년이 있었다.

“저기 츄야, 잠시 꺼져있어 줄래. 보스랑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하?”

“아. 그렇군, 츄야 군은 잠시 나가 있는 게 좋겠는데, 아무래도”

그는 유능했지만 파티에서 공개 처형할 배신자의 이름을 미리 알려주기엔 얼굴에 모든 것이 티가 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앨리스의 에스코트를 받아서 방문 앞으로 나가게 된 나카하라는 어리둥절해했지만 이내 받아들였다. 어쨌거나 보스가 명령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라 믿고서 차분히 문밖으로 나가서 서 있었다.

“말이나 좀 예쁘게 하면 저놈은 혀에 가시가 돋나, 젠장.”

애꿎은 문이나 노려보면서 서 있었던 나카하라는 이내 문을 빼꼼 열고 장난스럽게 귀여운 미소를 짓는 앨리스와 마주했다. 그 모습을 멀뚱멀뚱 보는데 한순간 앨리스가 사라졌다. 그래서 별로 보려던 건 아니었지만 보스와 다자이의 모습이 보이게 되었다.

‘…!’

나카하라가 한순간 본 것은 앉아있는 보스에게 다가서서 키스하는 소년의 날카로운 턱선과 뼈가 두드러진 손마디였다. 잘못 본 것인지 눈을 크게 뜬 순간 붕대 너머의 어두운 눈동자와 마주친 것도 같았다. 당황스러움에 눈을 비비자 찰나가 지나고 앨리스의 메롱 하는 얼굴과 다시 마주했다. 문이 닫히기 직전 머리 위에서는 청록색으로 빛나는 티아라가 매끄러운 긴 금발과 그 아래의 귀여운 미소를 장식해주는 광경이 눈을 찔렀다. 어쩐지 영혼이 허해진 느낌을 받은 나카하라는 숫제 바닥에 앉아서 기다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다자이가 문을 박차고 나왔다.

“뭐야. 네가 똥개냐? 아무데나 앉게. 간부답게 품위를 지키라고.”

“왜 나오자마자 시비냐 이놈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지만 자꾸 입술만 보이는 건 어쩔수 없었다. 헛것을 봤겠거니 하고 애써 눈 둘 곳을 찾으려고 시선을 회피하다가 그저 붕대를 쳐다봤다.

“내 얼굴에 뭐라도 붙었나? 재수 없게 뭘 째려봐”

“그냥 이렇게 생긴거다. 이 자식아.”

“…사과병에 대한 설명은 들었지? 다음 주에 내 생일을 빌미로 무효화 파티를 열어서 간부랑 주요 조직원들 불러서 악수회나 한다는거야. 와중에 다른 이벤트도 좀 있을거고.”

“이벤트라니, 재밌는 건가?”

다자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하필 한숨을 입술로 쉬는 걸까 하고 이상한 생각을 하기 시작한 주홍빛 머리의 소년은 온몸의 털이 쭈뼛거렸다.

“아~ 별게 다 재밌어서 사는 게 좋겠다 츄야는”

“아 이 새끼가 진짜…!”

4.🍷

요코하마를 흐르는 강이 보이는 화려한 파티장에는 여러 명의 간부들과 준 간부들이 방문했다. 그리고 초대하지 않은 손님들도 웨이터인 척 하며 여럿 숨어들어 있었다. 포트 마피아에서도 그들을 알고 있었지만 세를 과시하기 위해 이를 무시했다. 더구나 오늘은 더는 무시할 수 없게 된 배신자를 공개적으로 처형해 공포를 심어주고 포트마피아 내부에 존재하는 외부세력의 확장을 위협하기 위한 자리였다.

“생일을 축하드립니다. 다자이님.”

“생신을 축하드려요. 간부님.”

“아, 네. 감사합니다.”

물론 축하받는 당사자는 파티를 포함해 생일을 역겨워하고 있었지만… 영혼 없는 영업용 미소와 함께 착실히 악수회를 계속해 나가고 있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주홍빛 머리의 소년은 누님과 함께 와인을 나누면서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네가 행복해하니 내 마음도 흡족하구나”

“감사합니다 누님. 저도 최근엔 바쁜 와중에 이런 자리는 오랜만이라…”

한편에서는 무한한 불편의 악수회가 이어지고, 한편에서는 즐거운 와인 시음회가 펼쳐지고 있으니 간부 얼굴이나 보자고 구경하러 온 사람들도 그 광경을 구경했다. 슬슬 한쪽의 인내심이 바닥을 뚫고 떨어지기 시작할 무렵 악수회는 거의 끝이 나고 마지막으로 축하하러 온 인물이 있었다.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간부님께서는 날이 갈수록 성장하시네요….”

그의 끈적끈적 달라붙는 손길이 집요하게 소년의 손바닥과 손등을 따라서, 그리고 손목을 훑자 인내심에 금이 간 다자이는 품에서 총을 꺼내서 그의 가슴에 세발을 발사했다. 이런 식으로 없애줄 계획은 없었지만, 어차피 마지막에 온 그가 배신자인 만큼 처형은 예정되어 있었다. 한순간에 회장 바닥은 선혈이 낭자했지만 누구 하나 비명 지르는 이가 없었다. 다들 그러려니 하면서 그저 구경거리를 보는 눈으로 쳐다보거나, 외면하고 음식을 먹거나 와인을 마시거나 했다. 여기서 놀란 사람은 숨어든 외부 세력과 나카하라 츄야 뿐이었다.

“뭐야 제기랄…나만 또 영문을 모르지?”

“포트마피아가 스파이를 처형하는 방식 중 하나란다.”

잠시 후 웨이터가 바닥을 치우고 트롤리에 시체를 실어서 정리해 나갈 때 쯤에는 이미 붕대를 감은 소년 간부의 모습은 회장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주홍 머리의 그도 범죄조직에서 볼 장 다 본 만큼 이런 때에 사과파이를 집어 먹는데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단지, 지금 체스를 즐기고 있는 보스와 누님을 바라보면서, 스파이는 쉽게도 찾으면서 사과 소동의 범인을 못 찾는 것일까, 하는 상념에 젖어 있었다. 보스의 퀸이 잡히자 오자키 코요는 기권을 했다. 대충 걸레질 한 바닥에 남은 희미한 핏자국만이 소년 간부의 가짜 생일을 기념하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구토를 한 창백한 소년은 손목의 붕대가 다 젖을 때까지 계속해서 손을 씻었다. 손을 비누칠하고 또 문대다가, 창밖에 보이는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을 보고 충동적으로 창문에다 남은 총알을 다 쏘고선 강물로 뛰어들었다. 창문이 산산조각나는 소리와 총성은 파티장의 음악 소리와 웃음소리에 흩어져 버렸다. 그 뒤로는 그저 아득히 밀려오고 밀려나는 강물에 생명을 맡길 뿐이었다.

5.🍜

강변에서는 말단 조직원들이 무더기로 쌓인 사과의 재를 강물로 꾸역꾸역 밀어넣고 있었다. 이번엔 상승장을 만들기 위해 멀쩡한 사과까지도 마구 잿더미로 바꾸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런 업무량의 과중함에 말단…과 거지를 겨우 면한 사람들은 야근일당을 받기 위해 늦은 시간까지 남아서 사과, 불, 잿더미, 사과, 불, 잿더미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젠 내가 사과인지 사과가 나인지 모를 상태로 일에 열중하는 가운데, 다들 조금씩 퇴근을 선언하고 우리의 붉은 머리의 말단만이 남아서 사과를 씹고 있었다. 다른 이들도 배가 고프면 수시로 먹어서 없애기도 했지만, 그것도 이젠 질릴 만한데도 오다는 꿋꿋이 사과로 배를 채우곤 했다. 그가 사과의 재를 버리려고 삽을 들고 일어선 순간 강물에서 이상한 이끼 덩어리를 발견했다. 어둠 속에서 시커먼 이끼 덩어리가 강물에 떠밀려서 다가오고 있었다. 빈약한 수풀 속을 헤치고 다가가서 치우려고 삽으로 건드리니 사람 얼굴이 있었다. 아니, 시체인가? 버려진 마네킹? 갓파?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가면서도 다가가서 우선 건져 올렸다. 사과의 재를 버리는 데에 방해가 되니까.

건져 올린 건 희미하게 맥동이 있는 사람이었다. 상당히 창백해서 거의 귀신처럼 보이는 소년이긴 했지만 우선 살아는 있었다. 이대로 방치하면 살인이 되나? 그럴 순 없으니 그는 심폐소생술을 시작했다. 인공호흡 시 환자의 코를 막고 입을 밀착하여 1초 동안 몇 번을 불어넣는 것이 가장 좋은가? 예전에 소설을 쓰기위해 찾았던 정보 따위를 생각하면서 숨을 불어넣었다. 그러는 동안 어쩐지 입안에 남은 사과 맛이 쓰게 느껴지기 시작했지만 아랑곳 않고 계속했다.

“쿠에엑-”

드디어 환자가 물을 토해내더니 약간 숨을 쉬기 시작했다. 안심한 오다는 물러나서 다시 재를 강물에 밀어 넣기 시작했다. 땅거미가 지고 완전히 어두워졌으므로 마지막이 될 삽질을 하면서 강변에 엇누인 물이끼내 나는 축축한 소년을 흘끔흘끔 바라봤다. 분명 숨은 쉬는데 잠든 것인지 힘든 것인지, 그냥 일어나기 싫은 것인지 일어날 생각을 않았다. 이런 아직 추운 봄에 벌써 물놀이를 하다니 위험하게시리, 아무리 비행 청소년이 많은 동네지만 약간은 혼내줘야겠다고 마음먹었건만 소년은 재를 다 치울 때까지도 일어나지 않았다. 강변 다리 아래에 있는 노란 전구가 켜진 함바 노점이 슬슬 닫을 준비를 하는지 부시럭대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놔두고 밥부터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 함바집 노인네에게 식사를 주문했다.

“라멘 하나”

“그려, 자네가 마지막 그릇이겠구먼.”

노인네가 뚝딱 말아준 것은 뜨끈하고 끈적한 국물맛이 좋지만 딱히 건더기랄 것이 없는 노점 라멘이었다. 최근 아이들 식비가 늘어 오늘도 사과로 식사를 때우려 했건만 어쩐지 아까 인공호흡 뒤로 오늘따라 사과가 영 맛이 없었다. 그와는 대조되게 김이 폴폴 나는 라멘 냄새는 향기로웠다. 혼자 먹기엔 치사하게 느껴져 깨우려고 슬쩍 소년이 누운곳을 바라보니 진작에 이미 일어나서 다가오고 있었다.

“나도 라멘 하나”

“돈은 있슈?”

“……”

소년은 왜인지 모르게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까지 오다는 그 얼굴이 돈이 없어 곤란하다는 의미인 줄 알았다. 구해준 마당에 굶으라고 할 수 없으니….

“내가 내지.”

“그럼 앉으쇼. 돈이야 다 똑같지.”

소년은 뻔뻔하게 자리에 척 앉더니 라멘을 국물까지 싹싹 비우기 시작했다. 사실 평소의 그라면 입에도 안 댈 음식이었지만 지금은 허기를 넘어선 광기가 느껴졌다. 그 전날에는 파티 스트레스로, 파티장에서도 악수 스트레스로, 아무것도 입에 대지 못해서 소년 간부는 무척 굶주려 있었다.

“배고픈가? 수영을 해서 그런가?”

“아니. 자살 중이었다만 방해받은걸세.”

“그렇군….”

당황스러운 대답이었다. 오다는 비정상에는 물론 익숙해진 몸이지만 내용하며 말투 하며 정상인 게 없었다. 실금이 간 빈 라멘 그릇을 바라보다 문득 소년의 손에 시선이 갔다. 뼈가 두드러진 흰 손등에는 자잘한 상처가 있었다.

“더 할 말은 없는 건가?”

“…방해해서 미안하다. 라멘으로 용서해줘.”

“풉-”

이것이 둘의 첫 만남이었다. 이 만남은 이후 어떤 세 사람의 주기적인 술자리로 이어지게 된다.

6.🍌

“오다사쿠, 센스 좋은데? 사과를 빼주다니”

사과 소동이 끈질기게 계속되고 오뉴월 비에 치자꽃이 향기를 더해갈 쯤에, 강물에 빠지고도 멀쩡했던 다자이가 독감에 걸려 앓아눕게 되었다. 마피아 소속 병원에 입원한 소년 간부의 병문안을 오게 된 두사람은 사과를 뺀 과일바구니를 준비했다.

“뺀 게 아니라 없는 거에요. 지금은 한창 상승장이라고요?”

“에에, 그런가. 보다시피 병중이라 소식을 몰랐네.”

걱정되는 마음에 병문안을 하러 달려왔건만 정작 당사자는 아파 보이지도 않았다. 한가롭게 바나나를 까먹으면서 대답하는 모습을 보니 안고는 맥이 빠졌다.

“아프다더니 멀쩡해 보이는걸요. 저는 갑니다.”

“벌써 가?”

“벌써가 아니에요. 요즘 얼마나 바쁜지 치가 떨립니다. 사과 상승장의 기세가 치열하다고요. 제발 빨리 좀 끝났으면 좋겠네요. 그럼 편히 쉬세요.”

과연 그 말대로 아프지도 않은 안고의 안색이 더 나빠 보일 지경이었다. 요즘 일상은 치열한 사과 정보전의 시기가 도래한 나머지 야근의 연속이었다. 이 소동을 틈타서 다른 조직들의 움직임이 수상해지거나 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고 있었다. 과일 바구니만 놓고 쌩하니 사라져버린 안고의 빈자리 옆에 오다가 앉아서 오렌지를 까고 있었다.

“다자이 네가 감기라니, 강물로 단련된 거 아니었나.”

“아앗, 요즘 강물 건강법을 게을리했더니 이런 사태가!”

“강물 건강법이라니, 그런 것도 있나? 냉수마찰이라면 들어봤다만.”

“나만의 특제 건강법이지. 따라 하면 안된다고?”

“그렇군”

조각낸 오렌지를 소년의 끊임없이 떠드는 입에 넣어주면서 오다는 간단히 대답했다. 태클 담당인 안고가 사라지니 대화가 급격히 빌딩을 올라가고 있었다. 두사람은 한참을 실없는 소리를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사과를 옮기는 중대한 임무를 하러 오라 오다를 부르는 전화에 의해 야속하게도 즐거운 만담은 끝이 났다. 대놓고 아쉬워하는 다자이가 볼멘소리를 했다.

“그럼 다 나은 다음에는 우리 집에서 카레라도 먹지”

“오오! 그거 날 꼬시는 거야? 이거 부끄러운걸~”

“그렇군. 그러니 입수는 참고 얌전히 입원하도록.”

“그래….”

그렇게 말하는 순간에는 소년의 얼굴에 음산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아마도 지금은 오직 그 한사람만이 그 기색을 눈치챌 수 있었다.

7.☕

퇴원과 함께 환영하는 듯 찾아온 암살자와 피튀기는 시간을 보내고 온 다자이는 오다가 퇴근하기 전에 목욕재계를 하고 말단의 아파트로 찾아갔다. 이때 그는 아직까지 유리알처럼 순수한 모습만을 보여주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물론 마피아 간부가 순수할 수는 없는 것은 어린애에게도 자명한 이치였지만 그런 눈속임을 하고 싶도록 만드는 묘한 무언가가 그에게는 있었다. 우편함에 든 열쇠를 집어 들고 임시 거처의 문을 열자 선객이 와 있었다. 물론 그가 기다리는 오다사쿠는 아닌 좀도둑이었지만.

“엇!”

“앗?”

그리고 깜짝 놀란 나머지 그 좀도둑을 품에서 꺼낸 총으로 쏘고 말았다. 이 쓰레기 무덤 같은 동네에서 깜짝 놀라게 만든 건 저쪽이 나쁜 거니 이 정도는 정당방위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다. 훔칠 것도 없는 동네서 재수 없게 좀도둑질을 하다니…. 죽인 건 죽인 거니 어쩔 수 없다 치고 괜시리 시체를 만들어서 일이 귀찮게 되었다. 시체가 있는 곳에서 카레를 먹는 것은 기다려왔던 오늘의 완벽한 데이트 계획에 부합하지 않는 이미지였다. 오붓한 시간을 위해 낑낑거리면서 시체를 적당히 캐비닛 옷장 안에 숨겼다. 이 집도 원래 주인은 다른 말단조직원이었는데 얼마 전 의문의 사정으로 세상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모르는 옷장 속에는 모르는 옷가지가 뒤엉켜있었다. 그것들을 대충 창밖에다 내던지고서 옷장에 시체를 잘 앉혀놓고 탈취를 위해 가루세제를 탈탈 뿌린 후 문짝을 닫고 넥타이로 손잡이를 칭칭 감아서 묶었다. 이젠 바닥만 닦으면 완벽했다. 이런 뒤처리를 직접 해본 적이 없는 고급 간부인 입장에서 이 정도면 준수한 수준이었다. 소년 간부는 익숙지 않은 청소와 증거인멸의 중노동에 헉헉대면서 바닥에 흩어진 핏자국을 마구 걸레질했다. 소파에 튄 핏자국은 코트로 가렸다. 오뉴월 해가 뉘엿해지자 말단도 퇴근할 시간이 다가왔다. 초인종이 울리는데 마음이 급해져서 그만 손을 씻는다는 걸 깜빡한 게 떠올라서 급하게 싱크대로 달려가서 주방세제로 손을 씻었다. 평소의 그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들의 연속이라 누가 옆에서 본다면 경악했을 것이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서.

“?문 여는 게 늦는데 무슨 일 있었나?”

“헉, 아니, 헉, 아무 일도 없었어. 오다사쿠. 하….”

“그래도 이상하게 숨차하는데, 분명 다 나은 게 맞는가?”

“아니…응. 병원에서는 그렇다고 하더군. 이상하게 덥네. 하하, 하…. 밖으로 나갈까?”

그래도 깨끗하게 치웠는데 열쇠를 건네주다가 손이 너무 차가운지 미미하게 놀란 기색의 오다에게 뭔가를 들킨 느낌이 들어 뜨끔했다.

“정말 괜찮은 건가? 식은땀을 흘리는 것 같은데.”

“괜찮아! 절대로 일을 많이 해서 그런 거니까 응.”

“그럼 코코아라도 만들까,”

거절할수 없는 제안에 연신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다자이는 쇼파로 가서 앉았다. 그 와중에 오다가 코트를 걸어주겠다고 해서 코트를 창밖으로 던져버리고 재빨리 자리에 앉았다. 핏자국을 숨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느라 눈에 핏발이 설 지경이었다. 그의 손이 깨끗하지 않다는 것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지만 오늘만큼은 그 무언가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자, 마시는 동안 카레를 준비하지.”

오다가 준 코코아는 실수로 소금을 넣어서 약간 짰지만 이제 다자이는 코코아가 달콤한지 씁쓸한지를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아까 시체를 넣은 캐비닛이 조금씩 들썩대면서 흔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젠장 아까는 분명 시체였는데…!’

확실히 숨통을 끊어놓지 않은 자신의 어설픔을 탓하고 있기엔 상황이 너무 촉박했다. 캐비닛 통째로 창밖에 던질까? 아니 그건 아무리 자신이라도 너무 이상하고 눈에 띄는 행동이었다. 무엇보다 그러다가 캐비닛이 열리면 별로 식전에 보여주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튀어나온다. 아아 젠장…. 이제 어쩌면 좋지?

“저기 말야, 외식할까 하는데, 오늘 뭔가 그런 기분이야. 전에 먹었던 라멘 생각이 난달까.”

“?그런가”

오다의 어리둥절 하지만서도 수긍하는 모습에 안도의 한숨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렸다. 방금 지어낸 말이지만 그 라멘 별로 맛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두사람은 다행히도(?) 아파트를 나서서 강변까지 걸어갔다. 오다는 다자이의 손톱에 낀 핏자국을 보아 알고는 있었지만 그의 새파란 안색 때문에 필사적으로 모른 척 하고 있었다. 이 필사적인 무표정을 뚫을 만큼 다자이는 눈치가 빨라서, 들킨 것을 들켰다는걸 알게 될지도 모른다. 다리 아래의 노점까지 걸어왔건만 오늘의 함바집은 주먹밥 집으로 변해 있었다. 식당 노인네는 사과병의 여파로 요동치는 물가에 밀가루를 구하지 못해서 두사람은 주먹밥과 함께 국물만 남은 라멘을 먹었다. 어차피 둘 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8.🥃

냉장 보관 창고에 든 수많은 사과박스들이 이제는 현금 박스보다도 값진 물건이 되었다. 정직하게도 사과가 든 사과 박스를 시외에서 옮기는 임무를 새벽부터 트럭을 몰고 차곡차곡 수행해 나가는 말단의 일상덕분에 포트 마피아는 오늘도 돈을 쓸어 담고 있었다. 물론 며칠 전까지는 사과를 태워서 강에 버리는 일을 했지만….

“…이번 주에는 그런 일을 했다.”

늘 셋이서 모이는 한가로운 바에서 그들은 주로 이런 근황 이야기를 했다.

“음… 이번 주는 츄야랑 타다당~콰광~ 했는데 츄야녀석이 나를 열받게 했어. 어쩐지 매주 똑같은걸.”

그는 이 설명을 하다가 포로의 혀에 칼침을 박은 기억이 떠올라서 이상하게 찝찝해했다. 그때는 별거 아닌 일이었지만 이상하게 오다 앞에서만 마주하고 있자면 이런 일들이 특별히 숨겨야 할 사실처럼 여겨졌다. 상대방도 어엿히 범죄조직의 일원인데도 말이다.

“저는 말해보자면 사과병의 내부 희생자들이 사과에 쏟아부은 돈 때문에 자금손실을 메꾸느라 바쁘고, 다음 사과병의 유행이 어느 지구에서 발생할지 예측해내는데 골머리를 썩히고있다... 정도겠네요.”

“오다사쿠. 안고가 뭔가 일다운 일을 하고 있어.”

“그렇군….”

“한바탕 지나간 후 남아도는 수입 사과를 먹어 치우느라 도시 내 식당에서 사과를 권하는 통에 정말이지 곧 사과가 될 것 같습니다. 마무리가 끝나면 사과병 없는 시외로 휴가라도 갈 예정이에요. 이 고생에 그 정도 보상은 해주겠지요 보스도...”

“시외로 휴가?! 나 아직 수영복은 없는데~”

“데려가 준다고 안 했어요!”

“전에 수영복 없이도 강에선 잘만 하던걸.”

“그거 수영이 아니고 자살이었다니까?”

“둘 다 사람말을 좀 들어!! 간부랑 같이 가는 게 휴가냐고!”

“해변에서 먹는 카레 맛있지~”

“절대로 혹 덩어리를 달고 갈 순 없어요. 무조건 혼자 갈 거니까요.”

“혹 덩어리라니…너무하네. 우리의 우정이 고작 그 정도야?”

“...카레 만들기라면 자신 있다.”

9.🌁

“마녀의 저주를 풀어주는 마법의 키스라는 거, 동화에만 있는 건가?”

“무슨 개소리야 또”

하늘이 청명한 어느 봄날 오후에는 멋진 모자를 쓴 주홍머리의 소년과 붕대를 감은 칙칙한 소년 두 인물이 옥상에서 스코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새로운 이능력자의 이주 정보에 따라 2인 1조로 원거리 견제법을 사전 연습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번의 입맞춤이라는 게 정말 마법을 풀 힘이 있겠느냐고.”

“제발! 꿈 꾸는 소리는 침대에서만 해라.”

마음을 다잡고 다시 스코프를 들여다보며 총알을 날리는 감각을 정묘하게 가다듬으려고 했다. 신경을 800미터 밖의 한점에 집중하는 일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게다가 이 악우의 그런 장면을 봐버린 직후에는….

“그런 동화들은 사실 경험적인 고백 아니었을까 싶어져서 말이지”

“그래그래 좋을 대로 떠들어라 이젠….”

“츄야는 생각 안 해? 한 번의 경험이 모든 것을 바꿀 수도 있는 가능성.”

문득 마음속에 참을 수 없이 치밀어오는 질문이 있었다. 지금까지 훔쳐본걸 보게 한 게 의도인지 아닌지, 보게 한 것이라면 그 의도는 무엇인가 하는 하나의 질문. 나카하라의 성정상 그러한 충동은 조금의 참음도 않고 튀어나왔다.

“그러고 보니 키, 키스 말인데 왜들 하는 거냐?”

물론 그런 질문은 최악의 형태로 튀어나왔다. 정말이지 멋쩍게도 혀까지 꼬인 채로 말이다.

“글쎄…. 나도 별로”

나카하라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러면 그렇지, 하고 있을 때에 붕대를 감은 소년의 잔망스러운 주둥이가 우물거렸다.

“참고로 네가 사과병에 걸려도 보스한테 했던 것처럼은 안 해?”

“누가 하래?! 아오 이 미친 자식이…!”

등허리가 선득해지는 느낌을 애써 무시하면서 주먹을 꽉 쥐고 분통을 터뜨리는 소년은 벌떡 일어섰다 앉기를 반복했다. 그는 그러다가 다시 정신을 가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차라리 평생 사과만 먹고 만다.”

10.🪑

막장인생들이 주로 사는 부둣가 마을에선 오늘도 스산하면서도 악바리같이 활기찬 기색이 가득했다. 이곳에는 이제는 다리가 제각각인 의자와 어딘가 수상한 얼룩이 있는 옷가지, 태엽이 고장 나 스스로는 돌아가지 않는 자명금 등등…내력을 알 수 없는 한심한 물건들이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끈적한 소금기를 뒤집어쓰고 마구 팔리는 난장판이 들어섰다. 여기서는 유통기한이 지난 폐기 도넛 상자나 반토막난 천엔 지폐를 2백엔에 팔아치우는 부류까지도 존재했다. 우리의 붉은 머리 말단과 소년 간부는 오늘의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집에 있던 식탁 의자를 팔아치우려고 시장에 나왔다. 물론 이전 집주인의 소유물이었지만 이제는 이전 주인은 영영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의자들은 영락없이 이 두 악동의 손에 떨어졌다. 의자를 팔아치운 돈을 잽싸게 챙기고서 시장을 둘러보던 두 사람은 묘한 것을 발견했다. 귀퉁이가 깨진 노란색 어린이용 카세트 플레이어를 팔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물론 얼마 전까지는 오다의 아이들의 집에 있던 카세트플레이어였다. 그리고 팔고 있는 사람도 어디선가 마주친 적이 있는 듯한….

“어?!”

“앗?!” 이 동네의 암묵적인 규칙에 착실히 부합하게도 상인은 잽싸게 도망갔다. 두사람은 그를 반사적으로 쫓아가려다가, 오다가 바닥에 널브러진 비닐을 밟고, 다자이가 다시 반사적으로 그를 잡았지만, 오다가 미래를 보고 있는 줄 알고 그대로 넘어질까 주춤거리는 통에 추격을 시작부터 틀려먹고 말았다. 두사람의 환상적인 합동에 카세트 플레이어는 영영 돌아오지 않게 되었다.

“오다사쿠…. 그나저나 어쩐지 갈 때마다 집이 썰렁해지더라니”

“그렇지…. 그 캐비닛도 진작 팔았다.”

“…안에 든 건?”

“집에 돌아가니까 없어졌더군.”

전번의 모든 노력은 허사였다. 붕대를 두른 소년은 잔잔한 좌절감을 씹으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기절만 시켜서 인도적이라고 생각했어. 잘했다 다자이”

그 말에 그만 그는 이제 와서 노력이 허사였던 것은 아무래도 좋아지고 슬슬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찾아간 오늘의 노점상에서는 급기야 난리 통에 쌀까지 떨어진 모양인지 버섯탕을 팔기 시작했다. 물론 반쯤만 먹어도 되는 버섯이었기 때문에 두사람은 해롱거리면서 집안을 헤매거나 차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미친 짓을 벌여놓거나 하게 되었고… 뒤늦게 카레를 먹으러 합류한 안고가 두사람을 기절시켜야만 했다.

11.🍎

사과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이능력이라는 마법은 각자에게 하나의 게임을 선사했다. 어느 날에는 바닷가의 파도가 따끈하게 빛나면서 차례로 바스러지는 정오 무렵의 어떤 이에게도 같은 운명이 들이닥쳤다.

“오다사쿠?”

수많은 부실한 식사 후에 드디어 손수 만든 카레를 먹게 될 모양인지, 이번에야 말로 카레를 해주겠다는 문자를 받고 아저씨의 단골 카레 가게로 가니 반겨주는 것은 햇빛이 눈부시게 들어찬 주방과 한 사람의 사과병자였다. 어쩐지 맛이 간 눈빛으로 중학생이 들어갈 만한 자루에 담긴 썩은 사과 한 뭉치를 하나하나 꼼꼼히 씻고 있었다. 카레에 사과가 들어가던가? 아마 아니었던 거 같은데, 하는 생각이 소년의 지나치게 똘똘한 머리에 순간 맴돌았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한순간 다가선 소년이 붉은 머리칼 아래를 손으로 잡고 고개를 올려 입을 맞췄다. 아주 한순간, 카운터에 늘어져 하품하던 삼색 고양이가 돌아누울 동안만의 짧은 입맞춤이었다. 오다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그리고 다시 느리게 눈을 떴다. 그는 단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계속해서 사과를 씻었다.

그날 카레에는 주스로 만든 사과가 들어갔다.

12.💨

강물 건강법이니 뭐니 기세등등히 취미 자살 행각을 계속하던 다자이가 어울리지 않게도 감기에 걸려서 앓아누운지 이틀이 지났다. 그가 탐정사 출근을 안 하는 와중에는 오랜만에 사과병이 도지기 시작한 요코하마에는 사회 혼란의 서곡이 연주되고 있었다.

“도출되는 결론은! 사과가 필요해! 나 같은 최고의 탐정에게는 말이지!”

여기서 하필이면 최고의 탐정이 사과병에 걸리고야 말아서 탐정사 책상에는 뽀득하게 닦은 사과 뭉치가 가득 쌓이게 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 가장 최선의 해결책인 붕대 녀석이 오질 않으니 온종일 답답한 쿠니키다는 1시간에 한 번씩 전화통을 붙잡았지만 살았는지 죽었는지 녀석은 계속 부재중이었다. 받는다고 한들 정식으로 휴가를 사용한 녀석에게, 더구나 이틀 전에는 전화로 자업자득이라고 타박해놓고서, 무단결근도 아닌 녀석을 부르기는 뭣하고, 돌아버릴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다자이 녀석은 뭘 하는 거냐!”

물론 아픈 와중이겠지만, 생각하니 답답함이 치밀었다. 보일 땐 일이라곤 하지 않아 화딱지를 부글부글 일으키는 녀석이 또 정작 눈앞에 보이질 않으니 더욱 신경에 헛헛하니 깊은 피로를 몰려오게 만드는 어지러운 녀석이었다. 더구나 무슨 짓을 벌였을지도 모르는 녀석이다. 그런 상념이 떠오르기 시작하자 불안은 걷잡을 수 없어졌다.

“다자이 씨니까, 별일 없을 거예요. 다녀오겠습니다”

...그런 말과 함께 사과 몇 개를 들고 기숙사로 찾아가게 만들기까지 한 아츠시군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시 생각하면, 호랑이 소년이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녀석인가? 아니 애초에 소년의 보호자라는 녀석이 이 사단에 무책임하게 아파 드러누워서 간호를 받다니…. 등등 끝없이 내달리는 사고에 마침내 참을 수 없게 된 쿠니키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남은 탐정사원은 드디어 망설임을 떨쳐낸 이 용맹한 청년의 출발을 기쁘게 응원했다. 제발 다자이씨를 끌고 와서 이 사단을 끝내줘….

식사거리를 들고 달려가는 금색 장발의 청년의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그러면서도 달리기를 멈출 수 없는 이유에는 오늘따라 보이는 강물의 잔잔함이, 물 아랫것들이 떠오르지 못하게 내리누르는 듯이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13.🍎

아츠시 군은 소년 가장의 특권으로 일찍부터 퇴근하고서 간병하러 와서 그의 보호자의 곁에 앉아 있었다. 그의 머리 빼고는 쓸모가 적은 보호자는 누워서 콧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젠 머리도 숫제 기침하는 기능만을 남겨두는 형편이었다. 칼로 하는 건 뭐든지 잘한다면서 그의 도움을 거절한 쿄카가 사과를 깎아 자르는 동안 아츠시는 그의 보호자의 머리의 쓸모에 지장이 없기를 빌면서 물수건을 갈아주었다.

한편 쿄카는 요전번에 목욕탕에서 만나서 다 같이 등도 밀어주고 커피 우유도 얻어 마신 긴, 히구치에 대해 탐정 사원들에게 뭐라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멍하니 그런 고민과 싸우느라 실질 사과 깎기에는 진전이 없었다. ‘퇴근하고 싸우면 손해’라길래 완전히 경계할 타이밍을 놓쳤다는 사실에 혼란을 느꼈다. 그러고 보면 저기 누운 사람도 옛날에는 마피아였다고 했나...?

그리고 소년은 소녀의 그런 고민도 모른 채, 차가운 손에 이마를 기대오는 연약한 우상의 박동에 벅차오름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이 사람의 도움이 될 수 있어서, 이 뜨거움이 기쁘다고 여겨버리고 마는 데에 약간의 놀라움을 느꼈다. 그리고 그 당혹함을 얼버무리기 위해 문득 미소 짓고 말았다.

“왜 그렇게 웃어? 역시 아츠시군도 내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냐?”

“아니…. 아니에요. 그치만 술은 줄이세요. 캔에 든 것만 먹지 말고요. 길고양이도 아니고.”

“너 갈수록 쿠니키다군을 닮아가~섭섭해~”

그리고 얼버무림과 함께 미소의 의미는 먼 훗날까지 깨끗하게 잊혀졌다. 세 사람은 다 함께 토끼 사과를 먹으면서 절대로 참지 못하고 달려올 것이 분명한 쿠니키다를 기다렸다.

그리고 여전히 사과의 재가 강물 아래를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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